연구현황
전북지방에서는 고고학 학술활동이 시작된 것이 일천한 관계로 다른 선사유적들도 마찬가지이나 고인돌에 대한 학술발굴조사와 연구가 미진한 상태이다.
전북지방 특히 고창 지역의 고인돌은 1967년 국립중앙박물관 조사단에 의해서 상갑리 일대 고인돌군이 단일지역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밀집 분포를 보이는 곳으로 알려졌다. 그 뒤 1984년 고창군 아산면 용계리 일대에 댐을 건설하게 되어 전주 시립 박물관에 의해서 23기 발굴조사 되었고, 1991년 원광대학교 마한 백제 문화 연구소에 의해서 고창군 아산면 죽림리에서 16기의 고인돌이 발굴조사 되었다.
고창군 아산면 소재한 고인돌에 대한 3차례의 발굴조사와 각 시군 지역에 대한 지표조사를 통해 전북지방에 분포되어 있는 고인돌이 다양한 양상을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영래 선생은 아산댐 수몰지역인 용계리 유적과 죽림리 발굴에서 두 유적의 고인돌 축조 시기를 기원전 3세기말에서 2세기까지로 추정하였다. 그리고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형식과 구조가 변화하였으며 전형적인 북방식 고인돌에서 남방식 고인돌로 변해가고 있다고 추정하였다. 고창지역에서 이루어진 발굴조사와 그를 중심으로 한 연구조사로 전북지역의 고인돌에 대한 이 같은 추론을 얻어낼 수 있어 앞으로의 연구를 위한 기초가 마련되게 되었다. 그런 한편으로 발굴조사에서 한 점의 유물도 출토되지 않은 점은 그 배경과 더불어 아쉬운 점이 아닐 수 없다. 이는 고인돌의 형식과 구조에 의하여 형식간의 변천과 고창지역 고인돌의 축조시기에 대한 것은 어느 정도 밝혀졌지만 유물을 통하여 고인돌 축조인들의 문화상을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유물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고인돌 자체에서 얻어진 추론에 대한 검증이 이루어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고창지역 고인돌 발굴조사에서는 고인돌 사람을 묻는 매장방법을 하부 구조의 크기에 따라 추정하였다. 즉돌로 만든 널의 길이가 150cm이상인 것은 성인을 곧게 펴서 묻었을 것으로 생각하였고 그보다 길이가 짧은 것은 성인을 굽혀서 묻거나 2차장을 하였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 중 굽혀서 묻거나 2차장을 한 것은 전북지방의 경우 크기가 독널무덤(???)에서도 볼 수 있는 매장방법이며 2차장은 최근까지도 부안군 위도나 옥구군 선유도 등지의 섬이나 해안지방에서 시행되었던 초분(草墳, 草?)등과 관련되는 것이다.
전북지방에서는 살펴본 바와 같이 고창지역을 중심으로 3차례의 발굴조사에서 모두 42기의 고인돌이 조사되어 나름대로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발굴조사 된 고인돌은 고창지역의 많은 고인돌 중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지역적으로도 고창군 아산면 상갑리 일부 지역에서만 조사되었다는 한계성을 안고 있다. 더욱이 전북지방에 분포되어 있는 고인돌에 비추어 본다면 지금까지 발굴조사 된 것이 전북지방 고인돌의 성격을 대표하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따라서 전북지방의 고인돌에 대해서는 고창 지방에서 조사된 것을 기초로 각 지역에서 지표조사를 통하여 확인된 고인돌에 대한 보다 폭넓은 조사를 통하여 보다 분명한 성격과 연대 그리고 축조집단의 문화가 밝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선사시대의 다른 연구분야나 유적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전문인력의 부족, 또는 다른 여건의 미비로 인하여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고인돌 성격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고인돌은 전북지방에 적지 않게 자리하고 있다. 이 고인돌은 우선 매우 무거운 뚜껑돌을 어떤 방법으로 운반하였겠는가하는 소박한 의문을 자아내게 한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수십톤 때로 수백톤에 달하는 뚜껑돌은 인근에 있는 산에서 캐내 온 것일 수도 있다. 이 점은 고창지역 등지의 경우 산구릉이나 산에 인접한 곳에 고인돌이 놓여있는 점에서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수 km 떨어진 곳에서부터 운반하여 왔을 것으로 밝혀진 것도 있다.
아무튼 고창 상갑리 일대에 자리하고 있는 고인돌의 경우 인근에 있는 섬틀봉에서 돌을 캐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 하더라도 수십 톤의 돌을 운반하는 방법이 문제가 된다. 이처럼 큰돌의 운반에는 오늘날 사용되는 것과 같은 크레인이 사용되지는 않았을 것은 물론이다. 또 지금까지의 자료에 의하면 도르레의 원리도 알려져 있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되며 오로지 사람의 힘에 의존하여 운반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아마 많은 사람이 동원되어 철로처럼 양옆으로 긴 통나무를 깔고 그 위에 길이가 짧은 통나무를 가로로 걸쳐 굴림대가 되도록 하여 운반하였을 것이다. 이 같은 방법으로 돌을 운반하는 실험이 몇몇 곳에서 이루어진 바가 잇는데 그 중 한 결과에서는 1톤의 돌을 1.6km 운반하는데 16명의 성인 남자가 8시간 노동을 하였다고 한다.
이 실험 결과를 기초로 30통의 뚜껑돌을 운반하는 데에는 480명의 성인남자가 동원된 것으로 볼 수 있다. 480명의 성인남자가 있는 집단을 오늘과 같은 핵가족집단으로 추정하여 부양가족이 3인이 된다고 할 경우 집단은 2,000여명의 인구집단이 된다. 가령 100통의 무게를 가진 고인돌을 축조하기 위하여 필요한 집단의 인구는 6,400여명에 이른다. 당시 고인돌을 만드는 사람이 그 일에 동원된 사람들과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최소한 그 일에 동원된 사람들에게는 음식이라도 제공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면 평범한 경제력으로는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즉 약탈경제가 아닌 생산 경제를 기반으로 한 집단에 의하여 축조가 가능한 것으로 생각된다. 또 고인돌은 그것을 만든 집단이 그 뒷면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묵묵히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즉 2,000명 정도의 집단이면 필연적으로 사회조직이 요구되었을 것이며 하다못해 통장이나 반장과 같은 조직의 통솔자가 존재하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고인돌에는 조직의 통솔자가 존재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역사적인 증거가 숨어있는 셈이 된다. 이런 저런 추론을 통하여 고인돌을 만든 집단은 곧이어 마한 집단으로 성장하였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으며 전북 지방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고인돌은 마한의 모체가 되는 집단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고인돌은 선사시대와 마한을 거쳐 삼국시대라는 역사시대를 이어주는 과도기의 문화와 역사를 말해 줄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인 것이다.
많은 고인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전북지방 고인돌의 문화상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는 고고학적인 발굴조사가 극히 적게 이루어졌고 한 지역에 편중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따라서 전북지방 고인돌의 성격과 축조인들의 문화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보다 정밀한 지표조사와 각 지역에 분포되어 있는 고인돌과 관련된 유적이 발굴조사되고 그를 통한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에 앞서 더욱 중요한 것은 이들 유적에 대한 도굴, 경작, 개발에 의한 인위적 파괴를 막아 보호 보존하는 일이다. 아울러 고인돌 문화가 지니는 역사적 의미는 선사시대와 역사시대를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것으로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그 문화의 실체는 앞으로 빠른 시일내에 밝혀져야 할 과제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