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정렬이 서울에 올라와 한 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창극의 편극이었다. 창극은 이미 1903년 원각사 시절부터 공연되고 있었으나, 이 때의 창극은 극이라기보다는 배역을 나누어 소리를 하는 정도였다고 한다. 무대장치도 없었고, 연기나 분장도 형편없었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의 창극은 정정렬에 의해 그 정형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정정렬은 창극의 편극에 나서게 된 계기는, 1933 <조선성악연구회>가 결성되고, 그가 상무이사를 맡아 실질적으로 이 단체를 주도함녀서 부터이다. 당시 <조선성악연구회>는 130여명의 명인 명창이 모여 있는, 명실공히 국악의 총본산이었다. 처음에는 관훈동에 있었으나, 1935년 박녹주의 주선으로 순천 사람 김종우의 후원을 받아 익선동에 큰 건물을 마련하면서부터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1935년 봄 정정렬 편극의 춘향전이 동양극장에서 공연되자 몰려드는 인파로 그야말로 대성황을 이루게 되었다. 일주일 간의 서울 공연 후 전국 주요 도시를 순회하면서도 춘향전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고 한다.
정정렬은 1935년 가을 심청전을 편극하고, 심봉사 역을 맡아 열연을 하였다. 이 심청전 또한 대단한 인기를 얻었다고 한다.
춘향전과 심청전의 성공에 고무된 <조선성악연구회>에서는 직속 극단인 <창극좌>를 조직하여 여러 편의 편극을 공연하게 되었는데, 정정렬은 이후에도 계속 편극을 맡아 하였다. 주요 작품을 보면, 1936년 4월 창극좌 창립공연작 흥보전, 그 해 가을 숙영낭자전, 1937년 별주부전, 1938년 배비장전, 옹고집전 등이었다. 이렇게 해서 정정렬은 우리 창극으 l전형을 만드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던 것이다. 정정렬 이후의 창극은 정정렬이 편극한 창극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오히려 그 때의 수준에도 못 미친다는 얘기를 들을 정도인 것을 보면, 당시 창극의 수준이 어떠했는가 짐작 할 수 있다.
정정렬이 서울에 와서 벌인 활동 중 두 번째로 들어야 할 것은 레코드 취입이다. 우리나라에서 1910년대부터 일본 레코드회사에 의해 취입이 되기 시작하였으나, 축음기의 보급이 미미해서 별다른 중요성을 갖지 못하다가, 1930년대 중반에 이르면 축음기가 상당히 보급되어 5~6개의 레코드 회사에 의해 경쟁적으로 판소리의 취입이 이루어지게 된다. 특히 1935년을 전후한 시기에는 여러 명의 소리꾼이 각기 배역을 나누어 소리를 녹음한 전집물이 여러 종 출판되어 가히 S.P의 전성시대를 이루게 된다. 정정렬은 이러한 전집물의 취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이 때 정정렬이 주도적으로 참여한 전집물들을 보면, 폴리돌 판 심청가, 폴리돌 판 적벽가, 빅타 판 춘향가, 오케판 춘향가 등인데, 모두 판소리사에 길이 남을 불후의 명반들이다. 심청가, 적벽가, 춘향가 모두 뛰어나지만, 특히 춘향가 <정정렬이 판을 막아버렸다>고 할 만큼 대단한 평가를 받았다.
정정렬이 판을 막아버렷다‘는 말은 정정렬이 너무 잘 불렀기 때문에, 다음에는 감히 누가 춘향가를 더 부를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이다. 곧 정정렬의 판소리가 갈 수 있는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말인데, 사실 이러한 평가는 현재까지도 유효하다고 할 수 있다. 정정렬의 춘향가를 능가하는 춘향가는 여태까지 나타나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정렬이 춘향가를 특히 잘 불렀다는 것은, 1930년 9월 22일 조선일보 서부지국 주최 조선팔도명창대회 때 <일야(一夜)는 꿈을 비니, 장주(裝柱)가 호접되고, 호접이 장주되야, 실같이 남은 혼백~>하는 몽중가를 무려 다섯 번이나 재창이 받아 했다는 데서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전승되고 있는 춘향가는 보성소리만 빼고는 거의 다 정정렬의 춘향가를 이어받은 것이다. 정정렬의 춘향가를 고스란히 이어받은 사람은 김여란→ 최승희․박초선이지만, 우리나라의 대표적 여류 명창인 김소희도 춘향가는 정정렬제 춘향가가 중심이 되어 있으며, 박동진 또한 춘향가는 정정렬제를 중심으로 판을 짜고 있다. 보성소리와 함께 우리나라 현대 판소리의 양대 산맥을 형성하고 있는 동초 김연수제(오정숙․이일주․조소녀․민소완 등이 부름) 소리도 춘향가는 정정렬제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특히 김연수는 정정렬의 말년에 춘향가를 배웠는데, 정정렬이 죽자, <5년만 더 배웠어도……>하면서 아쉬워했다고 한다. 그만큼 정정렬의 소리가 좋았던 것이다.
정정렬이 서울에 와서 벌인 일 중에 또 들어야 할 것은 고전(古典)의 판소리화였다. 주지하다시피 판소리는 본래 열두 바탕이 있었다고 하는데, 19세기 말 경에 일곱 바탕은 전승에서 탈락하고, 다섯 바탕만이 남았다. 그런데 정정렬은 사라진 일곱 바탕 중에서 배비장전․옹고집전․숙영낭자전을 창극화하여 되살려 놓았던 것이다. 이 중에서 숙영낭자전의 일부는 박녹주를 통해 약 40여분 여의 판소리로 남아 전승되고 있으며, 정정렬이 취입한 대목도 한 대목 남아 있다.
또 특이하게 옥루몽 중에서 ‘<강남홍을 만나다>라는 대목이 녹음되어 남아 있다. 옥루몽은 한 번도 판소리로 불리어진 적이 없으므로, 이는 순수한 정정렬의 창작곡임이 틀림없다. 사실 정정렬이 여러 편의 창극을 편수하여 공연함으로써 창극의 정형을 창출한 것은, 이처럼 창작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정정렬은 이 외에도 단가 적벽부와 강상풍월을 만드었다고 한다. 물론 판소리곳곳에 정정렬이 새롭게 만들어 넣은 대목이 널려 있기도 하다.
정정렬이 마지막으로 오른 무대는 1937년 12월 중순 동양극장에서 막을 올린 심청전인데, 여기서 정정렬은 심봉사 역을 맡아 열연을 하였다고 한다. 이 공연이 끝난 뒤 12월 말 경 경성 방송국에서 <박석 고개>를 방송하고 곧 자리에 누어, 끝내 회생하지 못하고 1938년 3월 21일 정오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의 장례일은 3월 22일이었고, 정오에 그가 판소리적 열정을 불태웠던 조선성악연구회 회관에서 이동백․송만갑 등 원로와 남녀 동료제자 천 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영결식을 거행하고, 유해는 화장하였다고 한다.
정정렬이 죽고 나서 판소리의 전성기는 끝이 났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정정렬 이후의 판소리는 침체의 길로 접어들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