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추어 명고수 송영주
만한번의 이치로 이어낸 북장단의 예술세계
김정은 편집위원
명고수 송영주
그가 북장단을 실어내는 것을 불 수 있었던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 많지 않은 사람중에 낀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기에 가까운 명쾌하고 사려 깊은 그의 북가락을 쉽게 잊지 못한다. 그래서 판소리의 참맛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그의 북가락을 들을 수 있었던 사실을 적잖은 행복으로 여기게 마련이다.
아마추어 명고수 송영주선생(아마추어의 영역에의 규정은 그 자신이 평생동안 고집해온 것이므로 일단은 따라주기로 하겠지만 아무래도 그의 북가락을 들어 본다면 이 규정은 도무지 설득력이 없다)을 처음 만난 것은 6~7년 전의 일이다. 정확하게 생각해 낼 수는 없지만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인가 하는 국악경연대회에서가 아닌가 싶은데, 그는 그때 판소리부 심사위원으로 대회를 지켜보고 나오는 중이었다. 어느 대회에서나 있는 일이기도 한 심사결과에 대한 불만은 그때도 여지없이 노출되고 있었기에 그에게 심사평을 부탁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었다. “여보시오, 기자 양반 다 제가 잘한 것 같이 생각하지만 만한번 연습한 사람하고 만번 연습한 사람하고는 어디가 달라도 다른 것이오, 그것을 잡아내는 것이 심사를 맡는 사람들 할 일 아니겠오?” 구체적인 심사평이 아닌데도 그의 이 말은 참으로 큰 설득력을 갖고 있다는 생각을 했었다.
‘만번과 만한번의 차이’는 그가 평생을 안고 살아온 좌우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이 글을 위한 인터뷰를 갖고 나서였다.
사실 우리 국악이 민족음악으로서 제위치를 확보하고 이해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랜일이 아니다. 예부터 우리나라에서는 예술인들을 재인이나 광대라하여 천민계급을 하시해왔던 것인데 그런 까닭에 국악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어서 대부분의 소리꾼이나 고수, 연주가들은 재인에서 나오기 마련이었다. 물론 판소리의 경우 그것이 보편적인 민속예술로 자리잡아가면서 명창에게는 벼슬이 주어졌고(이것에 대한 정확한 고증은 아직 얻어지지 못했지만) 또 <비가비>라하여 양반 충신 소리꾼이 등장하기도 했지만 그것이 사회적인 통념을 바로 잡아주는 틀은 되지 못했었다. 따라서 양반 계층들은 대부분이 판소리는 즐겨하면서도 자신이 직접 소리를 하거나 북채를 잡는 일이 금기시 해왔고 다만 적극적인 청중으로서 한 문화권을 형성하는 바탕을 마련했을 분이었다. 그러면서도 조선조 양반네들은 이 판소리를 자신들의 집안에까지 끌어들여 즐기고 익히고자 했으며 명문 출신 중에서 직업적인 고수는 아니었지만 북을 배워 치는, 소위 한량이라 일컫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특히 일제 말기에 이르러서는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정책이 극심해져 국악인들의 설땅이 없어지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는데 그나마도 판소리의 명맥이 이어질 수 있게 된데는 각지방의 명문가 사랑방이 톡톡한 구실을 한 셈이 됐다.
명고수 송영주가 지방의 내놓라하는 집안 출신이면서도 고수로서 최고의 경지에 이르게 된데에는 바로 당시의 이러한 환경이 바탕되었다. 그의 선대는 정읍군 태인면 오봉리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았는데 그의 말로는 벌쭉한 명문거족은 아니었지만 일년 1천 5백석을 추수하는, 그 지역에서는 내놓라 하는 가문이었다 한다.
그가 더듬어내는 어린 시절은 1년 사시사철 끊이지 않는 과객들과 사랑방에서 흘러 나오는 소리와 북장단으로 채워져 있다. 그의 기억속에 자리잡고 있었던 적잖은 소리꾼들이 당대의 내놓라 하는 명창들이었음을 알게 된 것은 훨씬 이후의 일이지만 7~8살 어린나이에 만났던 구성지고 신명났던 소리에의 감동은 지금에도 고스란히 그의 가슴에 남아 있다. 일년 열두달 추석과 설을 제외하고는 소리꾼과 예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것은 그의 조부 영향이었다. 판소리를 특히 좋아했던 그의 조부는 궁내부 주사를 지내기도 했는데 한일합방이 되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남은 생애를 보내면서 국악에 심취하게 되었다. 당시 그의 집을 드나 들었던 사람들은 전도성․송만갑․정정렬 등 명창과 거문고의 전득송, 피리의 김삼채, 단소의 전용선을 비롯한 명인을 비롯 그밖에도 수많은 예인들이 그의 집에서 기거하거나 찾아들었다. 이러한 집안 영향으로 선생은 태어나기도 전부터 소리를 몸에 얹고 자라온 셈이 되었는데 그의 말처럼 뿌리는 속일 수 없어서인지 소리와 북장단을 향한 마음은 이미 어렸을 때부터 싹텄다고 한다.
그는 늘상 북장단에 큰 흥미를 갖고 있었다. 틈만 나면 북을 만지작 거리던 그를 하루는 전도성의 지정 고수였던 전계문이 보았다. 그이는 판소리사에서는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전도성의 당질로 명고수로서 뿐아니라 춤과 거문고와 양금 피리 등에도 뛰어난 명인이었는데 일곱 살 어린아이가 북에 흥미를 갖고 있는 것이 기특하였는지 그에게 장단의 기초를 일러 주었다.
송영주와 북과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1920년 일호씨의 4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선생은 열 살 되던해에 국민학교에 들어갔다. 따라서 자연히 북을 가까이 할 수 있는 기회가 줄어 들게 되었으며 전주 제일보통학교와 전고를 거쳐 중국 신경법정대 법학과를 졸업하기 까지의 동안에는 방학때나 판소리를 접할 수 있었을뿐 아예 북을 잡아들 수 있는 여건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 동안에는 선생은 역시 전계문으로부터 북을 배워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던 내당숙 권재남으로부터 북의 이론을 익혀 두었다. 대학 졸업후 그는 전북 도청에 근무하다 해방이 되자 전주시 학무계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다 경찰 특채시험으로 경찰직에 몸담게 되었는데 이 시기에 그는 다시 북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당시 전주에는 전계문의 제자인 박창을이 남문 근처에 있던 전동 국악원에서 북을 가르쳤는데 선생은 이 때가 비로소 본격적인 북공부를 할 수 있었던 시기였다고 말했다. 박창을에게 박가락을 지도 받으면서 선생은 하루 왼종일 가락을 몸과 가슴에 안고 지냈다. 하루 한두시간의 본격적인 수련시간 말고도 그의 머릿속은 늘상 북가락으로 채워졌고 그의 손가락은 장단을 좇아 움직였다. 북가락과 하나 되기 위해서 만번 연습보다 만한번의 연습을 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인식은 이때부터 그의 정신적 지침이 되었다.
6․25가 일어나고 나라가 이데올로기의 극심한 혼돈속에 빠져 있을 때였다. 그는 그때 임실경찰서장으로 재직 중이었는데 그의 스승인 박창을이 부역 혐의로 김제 경찰서에 수감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앞뒤 가릴 것 없이 자신을 담보(?)삼아 박창을을 빼냈다. 그리고는 자신의 집에서 함께 기거하면서 박창을의 가락을 완벽하게 전수하는데 전력을 다했다. 아무리 경찰 간부라 하지만 당시의 시대 상황속에서 부역 혐의의 수감자를 빼냈다는 것이 예사로운 일은 아니었다. 주위에서는 그의 사상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결국은 그것이 빌미가 되어 아무런 연고도 없는 충청도로 발령이 나자 세달 남짓 근무하다 아예 사표를 내고 정치를 해보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그는 민주당에 들어가 제 4대 국회의원 선거에 정읍에서 출마했다. 짧은 연륜에도 그는 당선이 됐고 1960년 4․19로 국회가 해산되기까지 농림분과 위에서 일했지만 그 이후 손톱 만큼의 미련없이 정계에서 손을 뗐다. 철두철미한 그의 성격으로서는 도무지 적성에 맞지 않았던 정치인으로서의 삶은 비록 짧은 세월이었지만 그에게 많은 이치를 가르쳐 주었다. 국회의원직에서 물러난 이후 1963년부터 2년동안 한국국악협회 이사장을 지내기도 했던 그는 지금까지 일체의 공직에 나가지 않고 지내오면서도 우리 국악을 발전시키는데 적잖은 영향을 미쳐 왔다.
수십년동안 그가 바쳐왔던 북과 함께한 생애는 그를 우리나라의 독보적인 고수로 앉혀 놓았다. 그것은 그의 북가락이 지닌 완벽에 가까운 장단과 기교, 유연한 손놀림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그가 이제는 보기드문 북의 정통성과 전통성을 계승한 고수인데다가 논리 정연한 이론으로 그를 따를 사람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 바탕된 때문이다.
그의 북에 대한 논리는 정연하고 단단하며 북가락은 화려하고 섬세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판소리 연구가 최동현씨는 그의 북가락을 이렇게 평한 바 있다. “송영주의 특징은 우선 섬세하고 다양한 잔가락에 있다. 김명환이 와서 집대성된 남도 가락이 남성적이고 고졸한 느낌을 주는데 비해 송영주의 가락은 여성적이고 화려한 것을 특징으로 한다. 이같은 특징은 송영주가 이어받은 북가락이 지극히 발달된 것이었던데다가 자신이 이를 더 세련시키는 고정에서 얻어 졌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특히 자진머리에 있어 송영주의 북가락은 화려함의 극치를 이룬다고 평했으며 혹자는 이를 「환상적」이라 표현하기도 한다고 소개했다.
선생이 강조하는 북과 소리의 관계는 특별하다. 소리를 좇아가는 것이 북이 아니라 소리를 지휘하는 것이 북이라고 그는 늘상 강조한다.
“북이 가는 길과 소리가 가는 길이 각각 다르므로 이길을 어떻게 원만하게 조화시키느냐에 따라 신명난 제대로의 소리판이 이루어지게 되는 법이지요. 그래 난 소리를 잘 살려내고 못 살려내는 것은 북이 하기 달려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이를테면 장단을 짠다커니 친다커니 맞춘다커니 하는 일종의 역할을 규정짓는 말들 중에서도 나는 짠다는 말이 북장단의 역할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라 봅니다.”
그가 북을 가까이 해온 수십년동안 확고하게 인식해온 이러한 이치는 곧 잘 논란의 대상이 되곤 하는데 지금은 작고한 명고수 김명환과 실전(?)은 지금도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일화중의 하나가 되었다.
70년대 중반쯤 되던해였다 한다. 김명환의 집에서 소리판을 열었는데 그 중간에 고수의 역할에 대한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 당대의 최고 고수로 인정받았던 김명환이 「북은 소리를 따라가며 맺고 달아 풀어주는 것을 분명하게 해주어야 한다」고 이야기 했다. 그러나 소리의 보조가 아닌 북의 독자적 역할을 강조해 왔던 그는 그말을 곧장 일축하고 나섰다. “김선생의 말대로라면 북은 소리에 잘따라가면 된다하니 소리가 삐면 북도 같이 삐고 소리가 제자리를 찾지 못하면 북도 길을 잃어야하고 또한 소리가 미끄러지면 북도 미끄러져야 명고라 할 수 있다는 뜻인데 아무리 명창이라하더라도 몇시간동안 소리를 할라치면 곳곳이 삐기도 하고 미끄러지기도 하려니와 그것을 그대로 따라하다가는 그판이 어찌 되겠소? 그때 그때 삔곳은 맞춰주고 미끄러진데는 바로 올려주는 역할을 할 수 있어야 비로소 명고라 할 수 있을 것이오”. 한동안 설전이 오고 간 끝에 좌중의 사람들은 이들 두 명고의 말이 모두 옳은 것으로 해두자고 마무리 지었지만 정작 김명환은 “송선생의 말도 새겨 둘만한 것” 이라는 인정을 해두었다 한다.
어느 자리에서고 선생의 북에 대한 해박하고 논리 정연한 이론은 막힌데 없이 술술 풀려 나오곤 하는데 그가 고수로서 늘상 강조해두는 것중의 하나가 바로 고수의 자세와 추임새이다.그는 판소리를 들려주는 예술로서 뿐 아니라 예술로서 본질을 갖고 있다고 여기고 있는데 따라서 소리꾼이나 고수는 그 자세가 제대로 갖추어져야만 제능력을 발휘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추임새 역시 그는 명고의 중요한 요건 중의 하나로 들고 있는데 가락이 좀 덜 익었다 하더라도 추임새가 뛰어나면 그 약점을 보완할 수 있다고 말할 정도이다.
그의 북에 대한 이치는 자신의 표현대로 철학적인 바탕에 근거를 두고 있다. “서양음악은 고학적이고 인위적이며 합리적인데 반해 우리 음악은 철학적이고 자연적이며 사실적이지 않아요? 북의 장단도 같은 바탕에서 설명되어 질 수 있지요.” 그는 장단을 동양적 사상으로 해석한다. 중모리. 중중모리의 열두박은 열두달, 진양의 스물네박은 24절후, 휘모리 두박은 음과 양, 자진모리 네박은 사계절, 엇모리 열박은 불교에서 말하는 시방세계로, 그가 설명하는 장단의 원리를 듣고 있다보니 북의 이치며 장단의 바탕이며 고법의 정립을 위한 온갖 부문들을 들춰내고 연구했을 수 많은 세월과 그속에서 녹아났을 어려움을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실제 북을 치는데 있어선 한배의 속단, 음양을 강조한다. 이 바탕은 그의 스승인 박창을이 강조했던 것이기도 한데, 한배는 속도를 이름이고 음양은 강약을, 속단은 끊어주고 이어주는 것을 말한다.
“사실 아무리 이런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해도 정작 소리판에 쓰여지지 못한다면 모두 허사 아니겠오? 그러니 만번 보다는 만한번 연습하고자하는 자세가 보다 중요한 것이란 말이지요” 그의<만번의 이치>는 어김없이 이부분에서도 강조되었다.
선생은 얼마전부터 대학에 나가 젊은 이들을 지도하고 있다. 자신이 갖고 있는 크지 않은 지식을 물려 줄 수 있다는 즐거움으로 그는 이즈음 수업 준비하는 일이 즐겁다고 말한다. 그가 재목감으로 마음속에 꼽아둔 제자들이 하루하루 달라져 가는 것을 보면 북과 함께 해온 생애가 결코 후회스럽지 않다고 한다. 이런 선생에게 이즈음 걱정거리 하나가 생겼다.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이 앞으로 번듯한 활동을 할 수 있는 여건을 자신이 마련해 줄 수 있느냐는데 대한 걱정이다. 그도 그럴것이 인간문화재에게서 지도를 받아야지만 국악계의 정통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선생은 이미 오래전부터 인간문화재감으로 거론됐었지만 그때마다 직업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또한 자신 스스로도 그런 <형식>이 마뜩치 않아서 고개 돌렸던 일이 지금에 와선 적잖게 후회스런 모양이다. 그럼에도 선생은 그런 일에 큰관심을 두지 않는다. 다만 몇해전부터 지속해오고 있는 고법 정리 작업이 자꾸만 늦어지는 것이 염려스러울 뿐이다.
선생은 먹는 것은 덜먹고 잠자리쯤은 조금 불현해도 되지만 소리만은 어우러져 있어야 될 것 같아서 아예 전주에 거처를 꾸려 혼자 지내온지 꽤 오래다. 고향인 태인과 서울에 살고 있는 아내나 4남 3녀의 자식들이 그것을 이해해주니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라고 선생은 혼잣말처럼 털어 놓았다.
그에게 북의 의미를 물었다. 잠깐 미간을 찌푸리면서까지 생각에 골몰했던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인격의 수양이라고 할 수 있을까? 고수는 소리꾼과 제대로의 조화를 이룰 수 있을대 비로소 제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고 더욱이 동반자가 완전한 제기량을 발휘해야만이 만족할 수 있으니 나를 통해 상대방을 더욱 높일 수 있는 수양이야말로 제대로 된 수양 아니겠오?”
그의 북이 지고한 경지에 이르게 된 바탕은 바로 북을 치는 예술행위를 통한 인격 수양에 있었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