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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12 | 연재 [저널초점]
까치밥으로 남은 홍시감과 썩어가는 배추
윤덕향 발행인(2004-01-29 17:04:13)

가을 걷이가 끝난 들판에는 겨울바다나 연극 끝난 후와 같은 고즈넉한 적막이 있다. 벼포기가 잘려나간 논, 앙상하게 말라붙은 고추대가 널브러진 밭에는 허수아비조차 시간의 흐름에 겨워 비스듬히 누우려한다. 저녁 어스름속에 오르는 저녁 연기의 매캐한 내음조차 시름에 겨운 것처럼 보이는 것은 고향을 떠난 도시민의 설움에서가 아니다. 까치밥으로 남겨둔 홍시감에서 여유로운 농부의 마음을 입에 올리는 것은 차라리 도시민의 사치로운 감상이다.
논 팔고 밭 팔고 그것도 모자라 소팔아 대학공부를 시킨 자식놈은 코도 비치지 않고 취직시험 공부에 지쳤는지 사업자금을 보내달랜다. 이제는 더 팔아낼 것이 없다는 것을 뻔히 알련마는 눈뜨면 들리는 천만, 억하는 돈단위에 자식놈도 눈이 뒤집혔을 법하다. 하기야 텔레비전에 나오는 무슨 빌라다. 별장이다 하는 것이야 다른 세상 사람들의 얘기라 치더라도 회사 직원밖에 안될 사람들의 집이 드라마 속에서는 별천지 같지 않은가? 도시에만 붙어 있으면 언젠가는 그 같은 호사를 하며 살 것인데 애써 보낸 도시에서 자식놈을 불러올 수는 혀를 깨물어 죽는 한이 있어도 없는 일이다. 다만 걸리는 일이 있다면 조상님 산소를 돌보는 것이지만, 시세를 아는 조상님이라면 오갈 수 없는 이 몸이 살아있는 동안의 시묘로 만족하실 것이라 마음을 다잡아 먹을 수밖에 없다.
도대체 남의 집 밥상에 올라가는 쌀가지 간섭하는 일이 대명천지 어느곳에 있을 수가 있겠는가? 무역이라는 것이 내게 없는 것을 사들이고 내게 여유가 있는 것을 내다 파는 것에 기초하는 것이 소박한 생각이다. 내 물건만 팔고 남의 물건을 전혀 안산다면 그도 문제가 없지 않으나 내가 사기 싫은 물건을 굳이 사라고 윽박지르고 구박하고 협박하는 사람은 상종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다른 사람에게서 똑같은 물건을 살망정 구박하고 윽박지르는 사람의 가게에는 가기 싫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럼에도 가장 순수하게 농민을 위한다는 분들께서 하시는 말씀은 어쩔 수 없으니 참으라는 것이다. 차라리 솔직하게 어찌할 수 없으니 모두 농사를 짓지말고 그 논밭에 골프장이나 스키장, 무슨 가든과 같은 식당을 만들테니 잔디밭에서 잡초나 뽑고 나무 손질이나 하라고 한다면 가슴이야 짠하지만 솔직한 것이 마음에 들 법도 하다. 이건 위하는 척 사람의 오장을 긁어대다. 추곡수매가와 수매량을 더 올릴 수 없다하여 한숨을 쉬는 판에 무슨 미국쌀을 수입할 것처럼 변죽을 올리고 있다.
애국심에 호소하여 양담배의 시장점유를 막으려던 정부는 다시 애국심에 호소하여 미국쌀의 진출을 막으려 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왜 양담배를 사람들이 얼마간 주저하면서도 사피우는지를? 담배값을 전매청에서는 한번도 올린 적이 없다. 다만 값이 좀더 비싼 새로운 담배가 나오고 품질이 개선되었다고 선전하였을 뿐이다. 그런 한편으로 기왕의 담배는 품질이 떨어지고 급기야는 더 이상 제조, 판매되지 않았을 뿐이다. 처음 등장할 때의 품질을 유지하면서 담배이름이 살아남은 것이 어디 있는가? 없다. 값싼 미국산 쌀을 애국심을 가지고 사먹지 말고 값이 비싸더라도 우리나라 쌀을 먹으라는 얘기도 하루 몇십, 몇백만원을 몇 백원처럼 쓰는 사람들에게는 그럴 듯한 얘기이다. 하지만 턱없이 오른 집 한 채 장만하느라고 졸라맬대로 졸라맨 허리띠를 더 졸라매어야만 하는 일반 서민들에게 몇 천원, 몇 만원은 몇 십, 몇 백만원과 같은 부담이다.
애국심은 국민 모두에게 요구되는 덕목이지만 현재 1차 적으로 애국심이 강조되어야 하는 집단은 넘쳐나는 돈을 주체할 길없어 외제로 머릿속가지 채우고 싶어 안달이 난 부류이다. 천박한 정신을 온통 휘감은 사치로 감출 수 있다고 믿는 집단이 선도하는 소위 과소비를 다집고 비로소 졸라맬대로 졸라맨 서민들에게 애국심을 호소할 수가 있을 것이다. 또 한숨으로 논밭을 채우는 농민들에게 우리 경제의 어려운 현실을 진솔하게 설득할 수가 있을 것이다. 배고픈 자식을 가진 부모에게 몇 십 몇 백만원짜리 식사를 마친 자가 지르는 온갖 미사여구는 한낱 소새끼나 말의 울음만도 못한 것이며 서로간에 공동체 의식은 공유할래야 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해도해도 너무한다 싶은 것이 천박한 부류들의 행동양식이다. 그들에게서 건전한 상식을 바라는 것은 애시당초에 그른 일이지만 가난으로 포원진 마음에서라면 이제 그 응어리가 어느 정도 풀릴 법도 하건만 이건 시쳇말로 구제할 방법이 없는 것 같다. 그들의 돈놀음 만으로 끝난다면 그도 무제가 아니다. 그런데 그저 돈이 시키는대로 살아가는 노예들의 광란은 주변으로 끼치는 해독이 너무도 크다. 경제적 여유가 없는 집단에게 미치는 해독은 두 말할 필요가 없고 자신의 능력을 바탕을 착실하게 경제적 여유를 누리는 사람들조차 경제적 여유를 가졌다는 점 하나만으로 돈의 노예와 같은 저울로 평가된다. 심정적으로는 차라리 돈의 노예들에게 그들만의 무대를 마련해 주는 것이 바람직한 것 같다. 가급적이면 우리나라와는 멀리 떨어진 절해고도나 우주 저편으로
그러나 그들도 어쩌면 할 말이 있을 것이고 그들만의 잘못은 아니다. 그들이 보고 듣고 최선의 덕목으로 삼아왔던 것은, 그들이 인생에서 최고의 가치로 지향했던 목표는 바로 황금이었다. 그들이 황금을 인생의 최고 덕목으로 선택하게 된 것은 자신들의 천품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다. 배후에는 정신을, 우리 집단 공동체의 문화를 곁눈질하지 않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로지 황금을 향하여 매진하도록 채찍을 가한 세력이 있다. 그 채찍질로 단련된 우수한 집단이 오늘 돈이 노예그룹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오로지 돈이 고향이며 그들에게 있어서 황금은 정신이자 문화인 것이며 나아가 삶 그 자체인 것이다. 어쩌면 그들을 비난하고 질시하는 우리네 의식의 밑바탕에는 황금숭배의 우수한 추종자 그룹에 편입되지 못한 열등생의 의식이 잠재해 있는지도 모르며 돈의 노예들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아마도 회심의 미소를 지을 것이다.
선거를 앞두었으니 언제나처럼 유통체계의 완비가 공약으로 내걸리고 과학적 영농, 합리적 영농, 살기좋은 농촌의 건설 따위의 입에 발린 말들이 텅빈 논과 밭을 채울 것이다. 또 어쩌면 돈의 노예들 주 재수없는 몇 사람이 걸려들어 본보기로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치도곤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단언하건데 그들과 그들의 아들 딸에게 이땅의 정신과 문화를 알리려는 노력은 어디에서도 없을 것이다. 그들에게 자식을 키우듯 논을 갈고 밭에 씨뿌리는 농부들의 가슴속 이야기를 들여주는 일만은 없을 것이다. 그 같은 일을 해야될 사람들조차 선거만 지나면 까치밥으로 남은 홍시감이 미련스러운 농부의 값싼 사치로만 보일 것이니 말이다. 밭에서 썩어가는 배추를 바라보는 농부의 주름진 얼굴은 지금 무엇인가 말하려 한다. 다만 말이 되어 나오지 않을 뿐이다. 뿌리로서의 고향을 찾느니 차라리 땅을 수입해다가 고향을 만들고 싶어하는 자들에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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