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1 | [문화시평]
연극의 힘을 믿는 투철함이 절실하다
-제11회 전라북도대학연극제를 보고-
김정수․연극인
(2004-02-03 10:08:43)
지난 11월 23일부터 25일까지 전북예술회관에서 열린 제11회 전라북도 대학연극제는 여러 가지 착잡한 심정을 느끼게 한 행사였다. 명색이 도내 각 대학 연극반이 참가하는 연극제가 대학 당국이나 대학 재학생, 일반 시민 모두에게 외면당한 체 자신들만의 초라한 자축연에 그치지 않았나 하는 것이 그 주된 이유였고, 썰렁하기 짝이 없어 오들오들 떨며 지켜본 작품들이 그 감정을 부채질 했다.
『전라북도 대학연극제』는 도내 각 대학 연극반들이 활성화되기 시작한 1979년 서로간에 조직적인 연대와 교류의 필요성이 강하게 작용하여 구성된 『전라북도 대학연극 협의회』의 산물이다. 지금도 여전하지만 도내 연극학과나 관련 강의가 전무한데다가 기성 극단의 활동조차도 침체된 상황에서 이러한 협의체를 통한 연극인구의 저변확대와 이론 및 제작에 관한 정보교류는 절실한 문제였다. 당초 6개 대학 연극반으로 출발한 이 협의회는 현재 13개 대학으로 늘어나면서 매년 (80년, 81년 제외) 대학연극제를 개최, 지방연극의 활성화와 연극인구 확대를 꾀하면서 꿈틀대는 젊은 의식을 선 보여왔다.
그러나 이번 연극제는 그 주최마저 전라북도 연극협회가 대신 떠맡을 만큼 협의회의 구심점이 약해진데다 참가 수도 역대 최소인 3개 대학에 그쳐 협의회의 존립 문제 마저 거론될 정도였다. 더구나 기획 면에서도 여러가지 취약한 모습을 드러내 요식적인 행사에 그친 인상이었다.
대학 연극이 대학의 울타리를 벗어나 사회를 상대로 발표할 기회를 갖는다는 것은 여러 면에서 의의있는 일이다. 그것은 그들이 갖고 있는 외형적 기량의 우열로 따질 문제가 아니라 그들만이 품어낼 수 있는 신선한 의식과 발랄한 감수성, 학구적 진지함을 자연스럽게 기성 사회에 전달한다는 대학극의 또 다른 기능 하나를 수행할 수 있기에 더욱 그렇다. 대학이라는 학문의 터가 사회에 긍정적으로 기여하는 훌륭한 통로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물론 이러한 전제도 대학극이 그 위상에 걸맞는 자기 확립과 역할 수행이 뒤따랐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전주대학교 『볏단』이 공동창작한 <남한산성>은 그런 면에서 가장 대학극다운 노력을 보여주었다. 역사를 새로운 각도로 바라보고자 하는 의욕을 집단적으로 응축시켜 작품으로까지 구성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일단 그 의욕을 높이 살만 했다.
이 <남한산성>은 조선 말 주변 열강들의 침탈 과정과 국난의 위기속에서 김상헌과 최명길이라는 두 인물을 축으로 그들의 고뇌와 행동을 그려냄으로써 우리의 역사의식을 일깨우자는 의도를 가진 작품이다. 공동창작 작품 같지 않게 매끄러운 극적 구성과 세련된 언어 구사가 돋보이면서 학생창작극의 새로운 발전 가능성을 기대하게 하여 일단은 흐뭇했다. 그러나 욕심을 더 부리자면 역사극이 역사를 재해석하는데 필수적인 세계관이 모호하다는 것과, 부제가 ‘그대 초민들이여’임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초점이 궁중을 둘러 싼 대신들에 맞춰져 역사의 격변기에 가장 큰 수난을 감내하는 대다수 미중들의 삶과는 유리되어 있다는 결정적인 결함을 지적할 수 있겠다.
표현에 있어서는 극도로 단순화시킨 무대와 절제된 연기가 깔끔한 균형을 이루었지만 지나치게 잦은 장과 장 사이의 암전이 극의 흐름을 깨뜨렸으며, 상황에 맞지않은 부적절한 배경 음악과 현대무용의 삽입, 의상의 통일성 결여 등이 눈에 띄었다. 전체적으로 의욕이 충만한 작품이었으나 외형에 치중한 작위적인 실험이 오히려 부정적인 인상을 주었다.
반면에 전주교육대학 『이랑』은 <농녀>(윤조병/작)라는 사실주의 연극을 무난히 소화해냈지만 대학극다운 실험의식은 전혀 엿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먼저 어떤 의도에서 작품을 선정하게 되었는가로부터 질문이 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원작 자체가 통속적인 내용으로 인물간의 갈등이 상투적이고 사건의 개연성도 부족한 한계를 지니고 있기에 우리에게 재해석의 여지와 실험정신의 개입을 허용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기구한 운명의 사슬과 그에 맞서 살아야만 했던 전통적인 한국적 여인상인 ‘바우할멈’을 통해 지난날 우리네 여인들의 암울한 삶과 강인한 인내의 의지를 전해주는 이 작품은 세 작품 중 가장 성실한 사실적 무대장치와 조명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돋보였던 ‘바우할멈’의 연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어색했던 ‘동이’, ‘동오’ 두 아들의 연기와 느슨한 연출이 아쉬움을 주었다.
이근삼의 대표적인 세태풍자극 <국물 있사옵니다>를 공연한 전주우석대학교의 『무제』는 연극의 이해에 관한 기본적인 문제조차도 부실함을 그대로 드러내었다. 그런대로 재미있는 작품을 선정했으면서도 무리한 무대 장치에 조명과 효과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으며 연기와 대사처리도 미숙했다. 더구나 30대 후반의 배역에 갑자기 10대 소년같은 차림이 등장 관객들의 웃음을 사는 것 등으 비록 학생극이라 할지라도 불성실이라는 오명을 벗지 못할 것 같다.
전반적으로 아쉬움이 많은 연극제였지만 참가 작품 모두가 창작극이라는 고무적인 측면도 있었다. 대학극 운동이 기본적으로 학업의 연장이며 기성에 반한 강한 실험의식을 그 핵심으로 이끄는 담당층은 보다 절실함을 달아야 한다고 생각된다.
대학에도 3D현상이 불어닥쳐 연극반은 이제 그 인기순위가 하락해 가고 있다 하지만 연극의 힘을 믿는 투철함이 있다면 보다 능동적으로 주변상황을 수용해 나가야 할 것이다. 자체 창작능력의 배양과 번역극의 다변화, 연극 장르의 확대와 유사 장르와의 연대 모색, 연극사와 연극이론의 학문적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잠재력은 바로 대학에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