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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8 | [문화저널]
1990년대, 변화하는 중산층과 지친 지식인 최영미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에 부쳐
이성호/전북대 강사 사회학과 (2004-02-03 10:15:53)
1. 이미 그 초입에서부터 예견되었던 90년대의 포스트주의는 80년대의 신념과 과학을 압도하면서 단단한 실체로 자리 잡고 있다. 우리 현대사에서 하나의 분기점이자 어쩌면 많은 이들에게 희망 자체이기도 했던 80년대는 새롭게 등장하는 포스트주의의 위력 앞에서 잊혀져 가는 과거가 되고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 한국사회의 80년대에 부여되던 적극적, 능동적 의미들은 망각을 넘어 부정되고 있으며, 80년대의 신념을 실현해 줄 것으로 믿었던 과학과 조직은 90년대의 변화 앞에서 무장해제 되고 있다. 치열하게 불붙을 것으로 기대되던 논쟁은 서둘러 마무리되어 버렸으며, 90년대는 신한국, 신경제, 신세대 등 소위 새로움의 홍수 속에서 전혀 새로운 시대로 정리되고 있다. 그러나 대체 무엇이 90년대를 새롭게 하는가. 답답하게도 누구도 시원스런 해답을 제시해주지 못한다. 변화는 매우 광범하게 관찰되지만 어떤 이는 경제구조의 변화를 지적하고, 다른 이는 정치구조의 변화를 얘기한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된 상황에서 집단의 열망은 개인의 욕구에 의해 대체된다는 말도 들린다. 혼란과 방황을 동반하는 90년대의 변화는 80년대의 “잔치는 끝났다”고 은근히 속삭인다. 현재는 결코 영원하지 않지만 과거는 이미 흘러갔으며 미래는 불확실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 사이 위기론은 점차 보편화되어 간다. 대안은 제시되지만 80년대의 과학을 대체하지는 못한다. 2. 변화는 우선 중산층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80년대적 열망의 중심에서 목소리를 합치던 중산층은 이제 더 이상 집단으로 남아 있으려 하지 않는다. 이들은 소리 없이 개인으로 돌아가 개성의 발견에 열중하려 한다. 따라서 중산층은 추상적 범주로 남게 될 뿐이다. 80년대가 건강한 집단의식으로 채워진 시절이었다면 90년대에는 개인의 자아실현이 훨씬 권장되는 이념이다. 90년대의 중산층은 과거를 돌아보려 하지 않으며, 과거로 돌아갈 생각은 더더욱 없다. 자신의 젊은 시절이 한껏 배어 있는 80년대의 잔칫상을 물리고 스스로 신세대, 미시(Missy)족이 되어 새로운 노래를 부르려 한다. 여전히 변하지 않은 현실, 조금도 나아진 것 없는 자신의 처지에 설득 당하려 하지 않는다. 90년대의 시점에서 80년대는 이들에게 진한 아쉬움으로 남는, 그러나 애써 부인하고픈“마지막 섹스의 추억”으로 기억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들은 언젠가 누군가가 새로운 잔칫상을 다시 차리고, 자신들은 그 자리에 초대되어 자세를 고쳐 앉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과거는 잊혀졌으며 미래는 불확실한 것을. 무엇이 이들에게 80년대를, 자신의 젊은 시절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게 하는가. 눈을 잠시 돌려보면 다양성과 개성을 특징으로 한다는 포스트 모던한 상황은 우리에게 더 많은, 더 화려한 소비를 강요하고 있다. 90년대의 새로움이라는 것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느 것 하나 새로운 소비와 관련 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렇다면 적어도 문화적 측면에 관한 한 과거를 낡은 것이 되게 하고 90년대를 새롭게 하는 주체는 자본 그 자체가 아닌가. 냉혹함으로 살아온 자본이 이제 ‘인간의 모습으로’ 포장한 채 과거를 대체하려는 것, 그것이 90년대적 새로움의 실체는 아닌가. 자본의 위기가 확장되고 그 위기의 돌파를 포스트 모던하게 모색하려는 동안, 우리네 중산층은 자신의 발견에 골몰하면서 역설적이게도 자신을 상실해가고 있다 전지구적(global)으로 동시에 국지적(local)으로 상품 소비의 논리가 인간적인 모습으로 확대되는 동안, 우리는 신세대가 되고 신여성이 되며 신인류가 되어 과거를 부정하고 거듭나고자 한다. 이념재판이 오히려 강화되고 있는 상황에서도 보수 대 진보의 대립은 끝났다는 탈이데올로기 선언은 한층 괴력을 발휘하고 있다. 자본의 위기는 이제 노동의 위기로 일반화된다. 임금 가이드라인은 여전하고, 억압은 이념의 이름으로 강화되며, 거기에 외국인 고용은 추가부담을 요구한다. 90년대에 망해가는 건 자본이 아니라 노동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생상영역은 그 의미가 축소되고 소비가 자아실현의 주요 영역으로 간주되고 있다. 오늘의 중산층은 자신도 모르게 자본의 위기를 해소하고 노동의 위기를 강화하는 새로운 시대의 주체가 되고 있다. 누가 이들로 하여금 다시 잡단 성원으로 돌아와, 한 목소리로 새로운 노래를 부르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새로운 전망은 어디에서 발견해야 하는가. 3. 그리하여 90년대가 우리에게 남긴 화두는 “다시 무엇을 할 것인가”일 수밖에 없다. 80년대는 우리사회의 지식인들에게, 그들의 소부르주아적 근성을 우려하면서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날 것”을 기대하면서, 과학을 맡겼었다. 그러나 학술운동을 독점했던 지식인들은 이제 “사랑이... 혁명이 시작되기도 전에... 진부해졌다”고 느낀다. 그러나 비판과학의 역할이 종결된 것이라 볼 수는 없다. 적어도 그런 합리적 근거는 발견되지 않는다. 90년대의 지식인들은 그것을 빼앗겼을 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얼마간 지치고 혼란스러워한다. 그들 중 일부는 지난 과거를 잊지 못하고, 다른 일부는 변화를 받아들일 것을 권한다. 그러나 90년대의 변화는 우리에게 지난 과거를 붙잡고 안타까워 할 여유를 주지 않는 다. 그러나 변화를 과장, 유포하는 역할을 지식인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물론 우리에게 주어진 해답은 아직 없다. 어쩌면 그것은 90년대의 변화를 얼마간 지켜본 다음에나 가능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럴수록 변화를 읽고 해석하는 작업은 소중한 것일 수 있다. 변화하는 중산층과 지쳐버린 지식인들이 운동의 위기, 과학의 위기를 장기적이고 일상적인 것으로 만들어 가는 엄연한 현실 앞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시 개인에서 집단으로 돌아가는 일이라 여겨진다. 매우 상투적이지만 포기할 수 없는 과제는 역사의 연속성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것, 변화의 뿌리를 발견하나는 과학적 작업으로 돌아가는 것, 그리고 변화한 지형에서 새로운 전망을 부단히 찾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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