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1993.1 | [신귀백의 영화엿보기]
주제의식 희석시킨 이중구조의 혼란스러움 박호태 감독의 「소녀경」
장세진․방송평론가 (2004-02-03 10:25:50)
방중술의 중국 원전 이름을 영화제목으로 사용한 「소녀경」(박호태감독)은 굳이 말하면 고전판 「애마부인」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7편까지 상영된 「애마부인」시리즈 가운데 제3편의 카메라 앵글과 「소녀경」이 맞닿아 있다는 사실이다. 즉 섹스를 그리되 부부사이의 원만한 ‘침대’를 위한 도구라는 핀트가 역력한 것이다. 「소녀경」의 그 점은, 우선 에로영화 및 그 아류를 뛰어넘는 단연 독보적인 가치를 지니게 한다. 제법 괜찮은 우리영화들이 만들어지고 관객동원에도 그런대로 성공을 거두고 있지만 단순히 벗기기만을 위해 벗기는, 영화같지 않은 영화들이 여지껏 기승을 부리고 있는 현실이기에 그런 생각이 든다. 새삼스런 이야기지만 예술과 외설의 차이는 벗기고 벗기지 않음에 있는게 아니다. 벗기되 설득력과 공감대가 관객들에게 주어져야 한다. 요컨대 왜 벗을 수밖에 없는가 하는 진지하고 절실한 심리배경이나 사회환경 등이 그려져야 하며 또한 중심사상 즉(ism)이 스며있어야 한다. 「즐거운 사라」를 같잖게 보며 문학으로 대접하지 않으려는 이유가 거기에 있거니와 「차털리 부인의 사랑」이 거둔 승리를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되어 진다. 영화 「차털리 부인의 사랑」은 원작 같지않게 의도의 오류가 범해져 있지만 빈번한 섹스장면과 불륜이라는 씻을 길 없는 틀을 갖추고 있는 소설을 ‘명작’이라 부르는 것은 바이탈리즘이라는 사상적 배경이 끈끈하게 묻어 있기 때문이다. 「애마부인3」의 카메라 앵글을 높이 평가하는 것도 그런 까닭에서이거니와 「소녀경」역시 대략 그 지점에서 볼 수 있는 영화로 생각된다. 섹스를 인생의 중요한 일부로 인식하는 감독의 투명한 의식이 장저인 「소녀경」을 보러 온 관객들이 중․장년층인 것만으로도 그 점은 그럴 듯하다. 「소녀경」은 한때 떵떵거렸던 세도가 홍대감(남궁원)의 회춘을 위한 갖가지 방법이 화면 대부분을 메우고 있는 영화이다. 각종 보약은 물론이고 방중술에 뛰어난 비법을 가지고 있다는 기생 오월(김규화)과 16살 소녀(전혜성) 등 회춘을 위해서라면 양반의 프리미엄적 세도와 돈을 동원함으로써 ‘섹스지상주의’를 보여주고 있다. 물론 그것은 부인과의 원만한 성생활을 위해서이다. 그것이 원만하게 되지 않는 한 음식도 맛이 없고, 시조 읊는 것 또한 일없다. 오로지 인생의 즐거움은 운우지락(雲雨之樂)에 있을 뿐이다. 또한 홍대감의 회춘을 위한 지극정성은 어느정도 성공을 거두기도 한다. 오월이 가르쳐준 비법과 소녀에게 불어넣은 인위적 기술 덕분이다. 홍대감은 날아갈 듯이 기쁘고 뛸 듯이 즐겁다. 따라서 섹스장면들이 추해보이지 않는다. 특히 오월이 집에서 체험하는 관음(觀淫)으로 인한 성욕은 분명 추잡한 성유희일 수 있음에도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또한 오월의 혀 액션을 잡아낸 카메라 워크 역시 보다 ‘사실적’ 영상처리여서 부둥켜 안자마자 교성부터 지르는 무릇 아류영화에 비하면 튼실한 성적 분위기로 보여진다. 이는 ‘그림을 통하여 관객을 자극하는 표면적 구도가 아니라 그림들 속에 내재하는 본질적인 휴머니즘을 만들려고 노력’한 박호태 감독의 승리이자 우리 영화의 조그마한 개가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반가운 것은 “영화는 이미지가 묻어 있는 영상을 통해 보여지는 영상예술이라는 평소의 영화적 소신”을 말잔치로 끝내지 않고 「소녀경」에 담아낸 점이다. 서사구조 역시 극적 요소를 갖추고 있다. 양반의 횡포(소녀는 강제적으로 잡혀 홍대감의 회춘 ‘약’으로 바쳐진다)와 인권이 주어지지 않은 민초의 삶을 얼개로 짜맞춤으로써 조선조 당대의 사회현실을 풍자하는 힘도 갖추고 있는 것이다. 특히 마님(이미지)과 소녀의 죽음, 길에서까지의 상․하층 대비화면이나 바우(김국현)의 홍대감 명에 의한 죽음으로 라스트씬이 처리된 것은 찡한 ‘역사적’ 감동을 체험시켜주고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것은 「소녀경」의 주제의식을 상당량 희석시킨 이중구조의 혼란스러움이기도 하다. 즉 회춘을 통한 인간본연의 섹스인지 그것의 제물이 된 민초들의 한인지 주제전달에 안개가 끼어버린 것이다. 원전 「소녀경」대로라면 오히려 전자쪽의 주제의식이 더 돋보이지 않았을까. 왜냐하면 「소녀경」이 양반들에게 짓밟혀도 끈질긴 생명력으로 잡초처럼 살아가는 민초들의 삶의 애환을 핀트로 하려고 한 영화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아쉬운 점은 있다. 요즘이야 인생은 60부터라는 말도 있지만 이미 노인이 다된 그 시대 그 나이에 회춘이 가당키나 한 말인가? 섹스가 인간본연의 아름다운 성정이라면 그 정도 나이쯤엔 생각마저 하지 말아야함 역시 자연의 이치 아닐까? 말하자면 인물설정에 무리가 있는 것이다. 마님의 바우와의 ‘이층집’ 역시 곁가지로 보였다. 홍대감에 비해 너무 젊고 그 독수공방을 위해서 회춘작업이 시작되었는데 마님의 섹스를 삽입함으로써 너무 많은 것들을 담아내려한 느낌이 들기에 하는 말이다. 그것은 우리 영화의 완성도에 치명적 흠집을 남기는 연출력 부재이기도 한데, 크게 아쉬운 점이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