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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1 | [문화저널]
선생님 가신 길에 수선화 눈부시게 필겁니다
김은정․전북일보문화부기자․편집위원(2004-02-03 10:30:26)
이광운 선생의 영결 미사가 있던 날, 12월 24일. 전주에서 군산으로 뻗어있는 4차선 아스팔트 도로는 엊그저께부터 쏟아져 쌓인 눈이 녹아내려 자동차 매연과 흙 찌꺼기를 쉬임없이 뱉어 내고 있었다. 질주하는 차와 차사이에는 단절된 언어들이 흙탕물로 번져 나오고. 전군도로를 달리는 1시간여동안 내내 우리 일행은 괜한 너스레로 웃고 떠들고 황망해 했다. 그러다가 잠시라도 침묵의 시간이 흐를라치면 누군가가 앞서 침묵을 다시 낚아 올렸다. 그랬다. 차에 오르면서부터 우리는 마음 깊숙이에 자리 잡은 착잡함을 털어내기 위해 이 과장된 시간들을 약속해두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끝내 우리는 이광웅 선생을 밀쳐두지는 못했다. 선생의 죽음이 우리에게 안겨준 슬픔과 착잡함은 우리들의 과장된 몸짓속에서 더욱 큰 파장으로 웅ㄹ려졌던 때문이었다. 어렵게 찾아간 군산 오룡동 성당에서는 마악 미사가 시작되고 있었다. 성당 뜰을 빼곡히 채운 사람들, 그 익숙한 얼굴들 사이사이에 이광웅 선생의 맑은 웃음이 있었다. -------------------- 선생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22일 늦은 오후였다. 담담했다. 내가 알고 있는 이광웅 선생이 아닌 다른 사람의 죽음으로 느껴졌던 때문이었다. 지난 10월. 위암 선고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어쩐지 죽음은 그의 것이 아니라는 막연한 생각을 가졌었다. 그리고 얼마되지 않아 나는 이곳 오룡동 성당에서 그의 죽음을 확인하는 절차를 갖고 있는 것이다. 영결 미사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 걸개그림으로 그려져 있는 선생의 얼굴은 여전히 쓸쓸하다. 그러나 그 쓸쓸함은 우리의 일상적인 그 쓸쓸함이 아니라 삶의 어느 한편에 정착해있지 않고 어둡고 버려진 삶들에 따뜻하고 지극한 사랑을 갖고 있었던, 그래서 늘상 고요했으나 철저했던 쓸쓸함이었다. 선생을 처음 만났을때의 쓸쓸함을 기억해냈다. 그가 82년, 간첩조작사건으로 판명된 <오송회>사건에 연루되어 국가보안법위반이라는 혐의로 4년 8개월 동안 억울한 옥살이를 치르고 나온 그해 겨울이었다. 왜소하나 몸집의 그는 웃음도 표정도 작았다. 그런 그런 작은 몸짓들에서 쓸쓸함이 쉬임없이 묻어났다. 그는 그즈음 복직 투쟁을 하고 있었다. 그는 출감한지 1년 2개월이 지난후 복직이 되어 군산 서흥 중학교 교단에 섰다. 시도 열심히 쓰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도 재미있다고 했다. 제자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보면서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새롭게 깨닫는다고 했다. 그런지 얼마되지 않아 그는 다시 교단에서 내몰렸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에 가입해 참교육을 열망했던 그는 6년만에 찾은 소중한 자리를 다시 잃은 것이다. 그래도 그는 불행하지 않다고 했다. 교육민주화 운동이 이 땅위에 반드시 바로 설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 한 자신은 불행해야할 이유가 어디에도 없다고 말했다. 그 어둡고 답답한 투쟁의 나날을 보내면서 그는 두 번째 시집 『목숨을 걸고』를 펴냈다. 그의 말에 의하면 감옥에서 나온 직후 해갈하고 돌아 다닐 때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쏟아졌던, 가슴으로 끓어올랐던 수많은 언어들의 물결이었다. 감옥에 있었던 85년, 그의 문우들과 후배들이 정성으로 펴내주었던 첫시집 『대밭』에 이어진 두 번째 시집 『목숨을 걸고』는 출옥직후 1년반 남짓 동안 씌어진 시들과 감옥안에서 우유곽에 촘촘히 써냈던 시편들, 그리고 습작기시절의 시편까지를 묶어낸 것이었다. 그의 시는 자신의 웃음처럼 맑다. 그 맑음은 참으로 투명해서 세상의 온갖 더러움과 바르지 못한 것들을 끌어안고 비춰내면서도 여전히 아름답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데 또 한편으로는 고통과 분노와 절망을 그 락은 서정성으로 닦아냄으로써 진정한 생명력과 감동을 불러 일으킨다. ------------------- 1945년 이리에서 태어난 그는 문학소년시절, 해방직후 대표적 전위시인이었던 유진오(그는 후에 남부군에서 문예부장으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전주교도소에서 사형당한 것으로 알려져있다)의 현실에 투철한 시적세계를 흠모하며 시대를 올바로 보고 담아내는 시인이 되고자 했다. 일찍부터 문학이 갖는 진실한 힘에 눈을 뜨고 역사를 직시하며 살아가는 자세를 견지해왔던 그는 그 대가로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용공주의자로 몰려 40대의 중요하나 시기를 차가운 벽속에 갇혀 보내야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군산 제일고등학교 교사로 있던 어느날 영장도 없이 끌려가 꼬박 42일동안 벼라별 고문을 다 당하며 숨을 한번씩 내쉬는 일로 자신이 살아 있음을 확인해야 하는 치욕적이고 굴욕적인 생활을 보냈다. 그동안 철창 밖에서는 「이광웅」이 용공주의자의 우두머리가 되어 신문과 방송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하고 있었다. 이른바 「오송회」 사건이었다. 80년 5월, 광주의 봄을 무참히 짓밟고 서슬퍼렇게 섰던 5공이용공조작품을 만들어내면서 이름을 붙인 「오송회」는 이제는 터무니 없는 간첩조작사건으로 80년대의 암울한 사회사에 끼어 있다. 그 오송회 사건의 전모는 이렇다. 76년부터 군산제일고등학교에 재직하고 있던 이광웅시인은 80년 광주항쟁을 겪으면서 이땅의 민주화에 더욱 절실하나 인식을 갖게 됐다. 당시 같은 학교에는 몇몇 교사들이 뜻이 맞아 당시의 사회현실을 비판하기도 하고 교육현실의 문제점을 나누면서 고통을 나누기도 했다. 81년 3월 광주미문화원이 불타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반미의식이 심화되는 분위기가 일었다. 이광웅시인은 고등학교때 감동깊게 읽었던 오장환(월북시인)의 「병든서울」을 떠올렸다. 해방직후 미군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오자 그들을 환영하는 노래로 시작하고 있는 이 시는 한달 정도가 지나면서 미국의 본질을 꿰뚫어본 시인이 이제 그만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는데 시인의 예언자적 탁월한 혜안에 감동을 받았던 이광웅시인은 그 시집을 주위 사람들과 나누어 읽고 싶어 몇몇 후배들에게 복사를 해주었다. 이 시집의 복사판 돌려 읽기는 같은해 4월 19일, 우리나라에서 민중의 힘이 최초로 승리한 4&#8228;29가 아직도 기념일이 되지 못하는 현실이 아쉬워 뜻이 맞는 교사들과 「우리끼리라도 4&#8228;19 영령제를 지내자」며 뒷산 소나무 아래서 소주잔을 나누었던 결과 한고리가 되어 <오송회> 사건을 만들어 내는 빌미가 됐다. 이광웅시인의 제자가 버스안에 그 복사판 시집을 놓고 내린 것이 화근이 되어 그렇지 않아도 눈총을 받아 왔던 교사들은 「북과를 예찬했다」는 죄명의로 용공주의자가 되어야 했던 것이다. --------------------- 오송회사람들 중에서도 주동인물로 꼽혔던 이광웅시인은 7년형을 받아 사상범들을 수감한 광주 특사 독방에서 감옥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87년 6&#8228;29선언에 의한 특별사면으로 풀려나기 까지 광주와 전주교도소에서 4년 8개월의 고통스러운 감옥생활을 지켜냈다. 그의 말대로라면 감옥에서의 생활은 그에게 삶에 대한 새로운 눈을 뜨게 했다. 삶에 대한 가치, 인간의 신념, 분단민족의 아픔에 대한 보다 절박한 인식을 그는 안게 됐던 것이다. 그곳에서 그의 가슴속 응어리를 풀어 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시를 쓰는 일이었다. 그의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는 언어들은 운동을 하며 주워온 못으로 우유곽에 눌러 써 남긴 기록으로 어렵게 생명을 얻었다. 그렇게 어려운 고통속에서 씌여진 그의 시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문학가의 평처럼 5년여 동안 생징역을 살아야 했던 사람의 시로써는 ‘터무니없이’ 맑고 그곳에 극도로 절제되거나 감추어진 분노와 절망은 그럼으로써 오히려 더욱 진한 생명력으로 발휘되고 있다. -------------------- 교단에서 물러나 그는 후배 제자뻘 되는 동료 해직교사들과 언제나 참교육 운동의 현장에 있었다. 암담한 현실 좌절과 고통, 끓어 오르는 분노의 투쟁현장에서도 그는 늘상 맑은 낯빛으로 희망을 이야기 했으며 일상적이지 않은 쓸쓸함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치열한 현실인식을 들여다보게 했다. 그가 최근에 펴낸 세 번째 시집 『수선화』는 이러한 시인의 그리움과 사랑의 시편들, 교사로서 안아야 했던 애환들, 아직도 끝날 줄 모르고 지속되는 해직교사들의 싸움의 현장에서 거두어들인 분노와 슬픔의 낙수들, 그리고 그의 비망록속에서 잠자고 있던 시편들이 모여진 시집이다. 그의 유고시집이 되어버린 『수선화』 후기에서 그는 이렇게 이야기 했다. “선병질인채 내던져진 것으로써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여기저기 스스로도 낯을 붉히게 하는 뗏장 무너진 무덤의 토흙처럼 드러나 보이는 이 허술하고 뒤지는 시집은 떠나기 위해 한 이정표 삼아두고 EJ나 또 가야 할길 착실히 가기 위해 엮는다.” 일전에 인터뷰를 위해 만났던 자리에서 그는 진정한 시인은 진정한 혁명가일 수 있다고 말했었다. 위대한 혁명가는 위대한 예술가일 수 있고 삶의 한 중간에 바르게 서있는 서정성이라면 아름다운 서정으로도 혁명을 할 수 있다고 믿는 그에게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은 혁명가이십니까.” “나는 혁명가가 못되지요. 아직 진정하나 시인이 못되었으니까요.” 그러나 선생은 진정한 시인으로 지금, 우리 가슴에 남아 있다. '뭐든지 진짜가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하라‘던 진짜 술꾼이 되려거든, 참된 연애를 하려거든, 좋은 선생이 되려거든, 뭐든지 진짜 하려거든 목숨을 걸으라던 우리의 시인은 갔지만 이미 버림받은 자들, 이땅의 질곡과 모순을 투명하게 여과시킴으로써 진실된 시적 세계를 그 맑게 닦여진 정신으로 성취해낸 시인의 맑은 웃음과 시인의 그 푸른 ’대밭‘과 ’수선화‘피인 그 갠날은 영원히 우리 가슴속에 살아있음을 우리는 서로의 침묵으로 확인하고 있다. ‘고인이 가신 l길에 수선화 눈부시게 피어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 이글의 일부 내용은 문화저널 1990년 11월호에 필자가 기고했던 「작가를 찾아서-시인 이광웅, ‘절제된 언어속의 맑은 서정과 혁명정신’」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것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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