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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8 | [특집]
문민시대와 신공안정국 민족주의를 다시 생각한다. 한국민족주의와 통일운동의 의미
글/이삼성 한림대교수 정치외교학과 (2004-02-03 10:41:28)
김영삼 정권이 출범한지 1년 반이 넘어가는 시점에서 핵문제와 관련한 자주적 외교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노동문제에 관련한 진취적 개혁도 찾아보기 힘든 가운데 군사정권 시절의 힘으로 밀어붙이는 정부의 행태에 변화를 느끼기 어렵다. 이념적으로는 국제화 또는 국제공조라는 말들이 우리의 경제 및 외교의 기본원칙처럼 자리 잡아 가고 있다. 그런 가운데 진보적 사상이 숨쉴 공간이 축소되어 가고 있다. 특히 민족주의의 의미가 혼미해지거나 폄하되고 있다. 우리사회 진보운동은 현재의 문제점을 조망하면서 힘찬 미래를 열어갈 비전을 제시해야 되는 상황이지만 역시 방황하고 있고 힘이 결집되지 못하고 있는 듯 보인다. 이런 어려운 시절에 사상적으로도 우리가 풀고 세워갈 과제들이 많지만 여기에서는 민족주의의 의미를 되새겨 보고 그것이 통일운동과 함께 노동운동 등 한반도의 역사적 진보에 갖는 뜻을 반추해 보고자 한다. 지금 역사적 단계에서 우리의 민족주의가 안고 있는 중추적인 과제는 물론 분단의 극복과 통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민족주의의 의미는 외세의 힘까지 빌어가면서 북한에 대해 힘으로 밀어붙여 흡수통일을 해야 한다는 우익적인 통일 논리들이 판치면서 왜곡되고 훼손되어 왔다. 이러한 왜곡과 훼손으로부터 민족주의의 정당한 의미를 다시 세울 필요가 있다. 민족주의를 민족적 모순을 극복하는 사상과 운동이라고 할 때, 이 민족모순은 크게 민족내부의 갈등과 민족과 외세의 갈등에서 비롯되는 문제로 나눌 수 있다. 민족주의는 이 같은 두 가지 차원의 민족적 모순들을 극복하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민족 내부의 갈등이라는 대내적 민족모순을 민족 전체가 보다 높은 수준에서 하나의 공동체로 만남으로써 해소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민족과 다른 외세들 사이의 비대칭적이며 왜곡된 관계에서 파생하는 대외적 민족모순을 극복하려는 지향인 것이다. 통일이라는 문제는 이 두 가지 차원의 민족적 모순들을 극복하는 것과 불가분한 관계에 있다. 한반도에서 분단을 유지하는 세력의 중요한 한부분이 한반도에 대한 비대칭적 지배력을 행사하면서 한민족 내부의 하나됨을 저해하는 외세라고 할 수 있으며, 우리 현대사에 있어서 이 외세는 미국으로 집약된다. 결국 우리 민족이 민족 내부의 갈등을 해소하고 대외적인 자주와 자존을 확보하는 것은 하나의 통일된 과제이다. 그런데 문제는 누구나 민족이 내부의 갈등을 극복하고 하나의 공동체로 되어야 한다는 것에는 공감하되, 어떤 공동체로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하나로 되어야 하는가에 대하여 의견이 다르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의 차이는 현재 한민족 안팎의 정치․경제․사회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외세인 미국을 어떻게 보느냐, 즉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존재의 의미를 어떻게 파악하느냐 하는 문제와 불가분환 관계에 있다. 이러한 분열된 비전과 인식 가운데에서 진정한 민족주의의 길은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분별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 해방 직후 우익 정치인들은 사회주의에 대칭되는 의미로 스스로 민족주의자로 자칭하였다. 한편 사회주의자들은 소련이 주도하는 프롤레타리아트 국제주의의 관점에서 민족주의를 편협한 사상으로 이해함으로써 우익들이 스스로를 민족 우선의 정치세력으로 치장하는 행태를 방치하고 말았다. 이것은 북한이 민족주의적 성격이 강한 주체사상을 주장하면서도 민족주의의 사전적 의미를 매우 부정적으로 규정해 온 데에서도 잘 드러난다. 우리는 여기에서 민족주의를 내건 정치세력들의 여러 사상들을 분별하는 기준의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민족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나가야 한다는 주장을 하더라도, 민족내부의 지배와 착취를 은폐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민족을 들먹이는 주장들이 있다. 이와 달리 민족내부가 진정으로 하나 되기 위하여 민족 내부의 지배와 착취가 제거되어야 한다는 사상이 있다. 전자의 주장은 민족 내부의 억압과 지배의 비대칭적 모순을 유지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외세에 의존하거나, 또는 다른 민족에 대한 감정적인 증오를 동원하는 왜곡된 민족주의를 낳는다. 흔히 우익 민족주의론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민족내부의 갈등을 극복하고 진정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민족 내부의 지배와 착취를 근절해야 하며, 그러한 민족 내부의 지배와 착취관계를 지원하고 정당화하는 외세에 대한 저항을 불가결한 과제로 받아들이는 사상이 곧 진보적 민족주의 또는 비판적 민족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민족주의를 옹호하든, 비판하든 이 차이점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 우리가 민족주의를 진보적 관점에서 이해한다면, 한반도 역사의 진보에 있어서 남북 민족문제 해결이 우선인가 또는 남한 내부 계급모순의 해결이 우선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논란은 상당부분 핵심을 벗어난 논란이라고 할 수 있다. 민족내부의 갈등을 극복하고 민족 내부의 갈등을 조장하고 유지하는 외세에 대한 저항은 곧 민족내부의 지배와 착취를 옹호하고 정당화하는 세력과의 부단한 싸움과 뗄 수 없다. 오늘 우리 한국의 현실에서 이 두 문제가 결국 하나의 통일된 문제임을 역설적으로 잘 웅변해 주는 것은 바로 국가보안법이다. 국가보안법은 남북 민족의 이질성을 극복하고 하나됨을 추구하는 통일운동에 대해서도, 그리고 민족 내부의 지배와 착취관계를 변혁 또는 개혁하려는 노동운동에 대해서도 동시에 활용되어온 양날검이었다. 지배세력이 국가보안법이라는 하나의 통일된 무기로 두 개의 진보세력의 도전에 대처하고 있다면, 진보적 정치세력도 반통일 세력과 반노동세력을 하나의 통일된 극복개념으로 파악하고 대응하는 것이 필요하다. 통일운동이 우선이냐 노동운동이 우선이냐 하는 논란은 국면마다에서 전술․전략의 차원에서 논의될 수는 있다. 그러나 한반도 역사의 진보라는 차원에서는 이 두 운동은 결코 질적으로 다른 과제로서 경직되게 규정되어서는 안 된다. 수구세력은 통일되어 있으나 진보진영은 의식분열상태라면 그렇지 않아도 힘겨운 싸움을 더 어렵게 만들 뿐이다. 과거 군사독재시절에 진보진영에서는 한국의 민주화문제가 먼저인가 통일이 먼저인가라는 논란이 벌어진 일이 있고, 이런 논란은 형태는 다르지만 오늘날에도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 먼저 통일운동이 우선이라고 하는 논리를 보자. 이런 인식은 분단이 극복되지 않는 한 민주화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판단에 기초했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과 운동은 두 가지 면에서 모순된 것이었다. 첫째, 통일운동은 민주화가 안 된 마당에서 관변이 아닌 진보적 통일운동은 한치 앞을 나서는 것이 어려웠다. 우선 국가보안법이 앞을 막았다. 둘째, 통일운동은 다른 한편으로 민주화가 안 된, 즉 국가보안법체제 하에서 운동을 전개함으로써 노동탄압과 통일논리 독점에 기초한 독재정권에 도전하는 운동이었다. 그런 점에서 통일운동은 통일을 위한 운동이었다기보다는 진보적 민간 통일운동을 막는 정부의 독재에 항거하는 일종의 민주화운동이었다는 측면을 부인할 수 없다. 결국, 민주화보다 통일이 우선이라는 논리는 두 가지 측면 모두에서 자기모순적이었다. 통일운동보다 남한 내 민주화 및 노동운동이 우선이라는 논리 역시 그것이 경직적으로 극단화될 때 비생산적인 자기모순에 빠지는 것이었다. 첫째, 분단체제와 부가분한 관계에 있는 국가보안법이 온존된 상황에서 그리고 그러한 국가보안법을 우산으로 삼아 각종의 진보적 노동운동사상과 행동을 국가안보를 위태롭게 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각종의 법적․제도적 장애물이 많은 환경 속에서 “노동운동”의 질적인 진보는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오직 부단한 투쟁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통일운동진영이 지나치게 앞서감으로써 공안정국이 조성되고 그래서 노동운동이 이룰 수 있는 진보를 제약했다는 논리는 크게 보면 책임과 원인의 소재를 지나치게 축소시켜 보는 시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지난 6월 미국이 북한 제제를 추진하다가 중국과 러시아가 강하게 제동을 검에 따라 미국 내 강경파가 주춤하고 온건론이 재등장했다. 이에 미국은 카터방북을 계기로 유화국면으로 들어섰고, 카터는 남북간 정상회담을 중재한 꼴이 되었다. 그러자 노동운동 진영 안에서는 이 국면을 김영삼정권이 노도운동 탄압에 활용하고 있다는 지적이 있었다. 이것은 일면의 진실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정상회담 국면이 전개되지 않고 계속 전쟁불사론이 지속되었다고 하자. 이런 상황에서 노동쟁의가 확산되었을 때에 김영삼정권이 가만있었겠는가? 똑같은 또는 그 이상의 탄압이 가해졌을 것이다. 즉 정상회담이 있든 없든 노동운동이 확산되면 김영삼정권의 정치적 성격상 탄압을 본격화하게 마련이었다. 핵심적인 문제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본과 국가의 억압에 저항할 수 있는 노동운동의 비전과 결집된 힘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노동운동의 상황은 남북관계 개선과 반비례해서 나빠지는 것이 아니다. 중단기적으로 보면 별 상관없이 진행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장기적으로 볼 때는 남북관계가 남북 기본합의서의 취지대로 화해, 군축, 교류․협력이 본격화되는 단계에 들어서면 국가보안법의 근거가 약화됨으로써 결국 노동운동환경의 개선에도 근본적으로 기여하게 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요컨대, 노동운동환경에 통일운동이 부정적으로 작용한다는 생각은 일면적인 평가이다. 실제 노동운동 환경과 통일운동 환경은 단기적으로 보면 때로는 갈등하기도 하고 때로는 같이 맞물려 진척되기도 하는 등 그 상호관계가 유동적이지만, 적어도 중장기적으로는 상호보완적 관계에 있다고 생각된다. 둘째, 올바른 노동운동이 발전할수록 자주적 통일운동 환경은 개선될 수밖에 없다. 올바른 노동운동은 노동자들의 개인적인 임금인상 투쟁에 그치지 않고 국가보안법의 폐지와 같은 광범한 정치적 변화를 몰고 올 것이다. 그만큼 통일운동 환경 조성에 이바지하는 것이다. 따라서 올바른 노동운동은 자신의 의지가 어떠했든 통일운동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이기도 하였다. 이런 의미에서도 노동운동과 통일운동을, 즉 민족모순극복운동과 계급모순 극복운동을 상호 부정적이고 대립적인 성격으로 보는 관점은 그릇된 것으로 보인다. 그 두 운동은 상호보완적인 것이며 통일된 과제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노동운동과 통일운동이 각자 저마다의 위치에서 어떻게 올바르게 전개할 것 인가하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구면마다에서 전략․전술의 차원에서 그 두 운동이 어떻게 서로를 뒷받침해주고 연계시켜주며 상호보완적으로 될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실용적인 대화”라고 하겠다. 두 운동진영이 서로를 이념상 근본적으로 다른 우선순위를 내포한 사상체계로 규정하는 “이념적 논쟁”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이 문제를 최근의 한반도 통일정세와 관련시켜 살펴보기로 한다. 그간 한국외교는 기본적으로 대미추종외교였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미관계에 존재한 어느 정도의 상오작용측면을 볼 필요가 있다. 미국정부의 입장이 온건이든 강경이든 하나로 통일되어 있을 경우는 한국외교는 미국의 대북정책을 추종했다. 그러나 미국정치권과 정부 안의 강온파간에 이견이 심하고 그래서 미국의 대북정책이 협상과 강경노선 사이에서 난조에 빠졌을 때는 한국의 언론 등이 집중적으로 강경공세를 펴는 가운데 한국외교는 미국 내 강경파를 지원하는 외교를 폈다. 그러면서 미국 내 군부를 중심한 강경파와 한국의 언론이 부추기는 강경파들은 상호지원사격을 아끼지 않으면서 한반도에서 전쟁불사분위기를 조장했다. 지난 5월 말 이후 6월 중순까지 한국의 언론과 정부가 취한 태도가 바로 그 전형적인 경우였다. 중국과 러시아는 처음에 언뜻 보기에는 미국의 대북한 강경제재논의를 묵인하거나 거기에 끌려갈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정작 미국이 대북 결의안 초안을 안보리에 제출하자 중국과 러시아는 이를 견제하면서 끝까지 대화로 해결할 것을 주장했다. 이에 미국 내 강경파는 벽에 부딪치면서 온건론이 재등장했고, 이런 환경에서 카터의 방북은 미국이 유화국면으로 옮아가는데 적절히 활용되었다. 그러자 한국정부도 갑자기 남북 정상회담을 수용하는 등 신속하게 미국 내 분위기 반전에 부응했다. 이렇게 조성된 정상회담 국면은 김일성 주석 사망으로 종결되었다. 카터방북이후 미국외교가 주도해온 대북 협상 국면에 대하여 불만을 느끼던 한국 내 수구 세력은 일제히 “봉기”하였다. 김일성 주석 사망과 마침 같은 시기에 터진 전국지하철노조의 파업쟁의를 계기로 한국 내 반통일 및 반노동 세력은 하나로 단결하여 수구 이데올로기의 잔치를 벌였다. 물론 그 잔치마당은 언론이었다. 이들 수구세력은 한국사회와 국제사회에서 꾸준히 성장해온 탈냉전인 사고와 외교 그리고 민주적인 노동운동에 대하여 그간 대단한 반감과 한을 품어왔다고 볼 소 있다. 이들은 김일성 사망을 계기로 김일성의 과거와 그 유산을 이어받은 북한의 김정일체제에 그간 응축되어온 반감과 한을 쏟아놓았다. 이것은 일종의 수구적 이념의 감정적 폭발이었다. 그들의 집단 히스테리 내지는 집단적인 카타르시스의 잔치가 벌어진 것이다. 한국 내 수구세력의 이 같은 단합된 이데올로기적인 잔치는 만일 미국이 현재의 대북한 협상노선을 지속시킨다면 곧 진정될 일시적인 히스테리나 카타르시스로 끝날 터이다. 한국 언론도 곧 재빠른 상황판단하에 미국의 대북한 정책을 뒤따라가면서 작은 투정들을 부리는 것으로 자신의 역할을 한정할 것이다. 한국 내 수구세력이 그간 보여온 기본적인 대미의존성을 고려할 때 그렇게 판단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수구세력의 잔치가 카타르시스에 끝나지 않고 미국 내 강경파들을 직간접으로 자극하고 지원함으로써 미국의 대북한 정책이 난조에 빠지는데 기여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협상이 아닌 힘으로 북한을 미국의 조건에 굴복시키려는 강경파들은 미국 정부 안팎에 엄존해 있다. 그만큼 미 국무부가 이끌어가고 있는 대북한 협상기조는 취약하며 불안정하다. 만일 한국 내 수구파의 신매카시즘 준동이 미국 내 취약한 협상론 우위의 기조를 흔들어버릴 경우 북미협상은 교착에 빠지고 그런 가운데 미국 군산복합체가 주도하는 한반도 전쟁불사론이 재등장할 수 있다. 그로 인해 한국과 미국내 수구세력이 다같이 원하는 한반도 긴장국면이 조성되면 한반도내 평화통일 환경은 물론 한국 내 노동운동환경도 악화된다. 북한 역시 정권이동의 과도기에서 지도부 내부에 올바른 대응을 둘러싼 이견과 긴장이 발생할 것이다. 이것은 한반도 긴장을 심화시키는 악순환을 가져올 수 있다. 이번에 김일성주석의 사망을 계기로 수구세력이 벌이고 있는 집단적 히스테리 양상 즉, 비이성적인 신매카시즘 양상은 반통일세력과 반노동세력은 하나로 통일되어 움직인다는 사실을 재확인해 주었다. 이에 대한 진보진영의 사상적 ․운동적 대응 역시 통일운동과 노동운동의 과제를 통일적으로 파악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된다. 남북관계가 개선되면 북한의 노동을 활용하는 재벌들만 이득을 보고, 한국의 노동자들은 북한의 노동과의 경쟁 때문에 오히려 손해를 볼 것이라는 분석이 제시되기도 한 것으로 안다. 그러나 우리는 한반도에서 반통일 및 반노동의 수구세력이 통일되어 있는 만큼이나 우리가 극복해야 할 과제들 즉 평화적 분단 극복과 노동정의실현이 통일된 과제라는 점을 확인하면서, 문제를 장기적으로 보아야 한다. 한반도에서 전쟁위기를 조성항고 이를 활용하는 자들이 곧 한국의 노동운동 억압의 선봉에 있는 자들이다. 재벌들은 남북관계 개선이 되면 그 상황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돈버는 기회로 활용하려 하지만,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운동하는 사람들은 분명 아니다. 남북관계 경색과 그로인한 한국정치의 경색은 남북 대화가 진행될 때 못지않게 한국의 재벌들에게 이점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노동운동이 발전할수록 재벌들은 앞장서서 남북관계를 경색시킬 준비가 되어있는 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 남북관계가 개선되면 궁극적으로 국가보안법의 기초를 흔들면서 진보운동이 한반도 전체에서 노동정의를 확보해낼 환경이 개선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재벌들에겐 남북관계 개선에 따른 남북 경협은 북한의 노동력 활용이라는 새로운 기회를 제공해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서 재벌이 몸이 달아 조바심하지는 않는다. 재벌들은 오히려 그 같은 남북간 긴장완화가 한국 내 국가보안법 및 비민주적 노동법 체계에 제기할 도전을 동시에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에 있다. 이와 달리 진보진영 전체에게 있어서 남북관계 개선은 남북간 화해와 평화체제 실현을 통한 한반도내 민족공동체 회복의 기초가 된다. 이것은 또한 민족내부 지배와 착취의 모순과 함께 우리민족과 외세 사이에 존재하는 군사․경제적 모순을 극복해 나가는 데 있어 불가결한 과정이다. 따라서 남북관계 개선을 통한 평화적 민족공동체 회복과 건설이라는 통일운동의 목표와 작업을 재벌들의 대북투자이익이라는 측면에 한정해 봄으로써 그 의의를 폄하시키는 단기적이고 소극적인 인식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대내적 노동관계와 대외적 국제관계가 외세에 의하여 장기간 지배당하고 왜곡된 우리와 같은 약소민족 사회에서는 대내적인 사회적 모순은 민족의 대내외적 모순의 일부로서 서로 간에 긴밀하게 얽혀 있다. 김영삼정권이 핵문제로 미국에 끌려 다니는 한편 노동운동에 대하여 부단히 폭력을 행사해온 지난 1년 반의 세월을 되돌이켜보면서 이 점을 새삼 절실하게 생각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 진보적이며 비판적인 민족주의 사상과 운동이 통일운동 뿐만 아니라 우리 노동운동의 발전을 포함한 역사의 진보에 갖는 여전한 중요성을 재확인하게 된다. 그럴수록 우리는 앞서 지적한 진보적 민족주의가 추구하는 민족 모순 극복의 두 가지 복합적 의미를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그래서 우익적인 민족통합과 통일논리가 민족주의적 가치를 둘러싼 세계관의 싸움터를 지배하도록 방치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김영삼 정권이 출범한지 1년 반이 넘어가는 시점에서 핵문제와 관련한 자주적 외교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노동문제에 관련한 진취적 개혁도 찾아보기 힘든 가운데 군사정권 시절의 힘으로 밀어붙이는 정부의 행태에 변화를 느끼기 어렵다. 이념적으로는 국제화 또는 국제공조라는 말들이 우리의 경제 및 외교의 기본원칙처럼 자리 잡아 가고 있다. 그런 가운데 진보적 사상이 숨쉴 공간이 축소되어 가고 있다. 특히 민족주의의 의미가 혼미해지거나 폄하되고 있다. 우리사회 진보운동은 현재의 문제점을 조망하면서 힘찬 미래를 열어갈 비전을 제시해야 되는 상황이지만 역시 방황하고 있고 힘이 결집되지 못하고 있는 듯 보인다. 이런 어려운 시절에 사상적으로도 우리가 풀고 세워갈 과제들이 많지만 여기에서는 민족주의의 의미를 되새겨 보고 그것이 통일운동과 함께 노동운동 등 한반도의 역사적 진보에 갖는 뜻을 반추해 보고자 한다. 지금 역사적 단계에서 우리의 민족주의가 안고 있는 중추적인 과제는 물론 분단의 극복과 통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민족주의의 의미는 외세의 힘까지 빌어가면서 북한에 대해 힘으로 밀어붙여 흡수통일을 해야 한다는 우익적인 통일 논리들이 판치면서 왜곡되고 훼손되어 왔다. 이러한 왜곡과 훼손으로부터 민족주의의 정당한 의미를 다시 세울 필요가 있다. 민족주의를 민족적 모순을 극복하는 사상과 운동이라고 할 때, 이 민족모순은 크게 민족내부의 갈등과 민족과 외세의 갈등에서 비롯되는 문제로 나눌 수 있다. 민족주의는 이 같은 두 가지 차원의 민족적 모순들을 극복하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민족 내부의 갈등이라는 대내적 민족모순을 민족 전체가 보다 높은 수준에서 하나의 공동체로 만남으로써 해소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민족과 다른 외세들 사이의 비대칭적이며 왜곡된 관계에서 파생하는 대외적 민족모순을 극복하려는 지향인 것이다. 통일이라는 문제는 이 두 가지 차원의 민족적 모순들을 극복하는 것과 불가분한 관계에 있다. 한반도에서 분단을 유지하는 세력의 중요한 한부분이 한반도에 대한 비대칭적 지배력을 행사하면서 한민족 내부의 하나됨을 저해하는 외세라고 할 수 있으며, 우리 현대사에 있어서 이 외세는 미국으로 집약된다. 결국 우리 민족이 민족 내부의 갈등을 해소하고 대외적인 자주와 자존을 확보하는 것은 하나의 통일된 과제이다. 그런데 문제는 누구나 민족이 내부의 갈등을 극복하고 하나의 공동체로 되어야 한다는 것에는 공감하되, 어떤 공동체로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하나로 되어야 하는가에 대하여 의견이 다르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의 차이는 현재 한민족 안팎의 정치․경제․사회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외세인 미국을 어떻게 보느냐, 즉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존재의 의미를 어떻게 파악하느냐 하는 문제와 불가분환 관계에 있다. 이러한 분열된 비전과 인식 가운데에서 진정한 민족주의의 길은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분별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 해방 직후 우익 정치인들은 사회주의에 대칭되는 의미로 스스로 민족주의자로 자칭하였다. 한편 사회주의자들은 소련이 주도하는 프롤레타리아트 국제주의의 관점에서 민족주의를 편협한 사상으로 이해함으로써 우익들이 스스로를 민족 우선의 정치세력으로 치장하는 행태를 방치하고 말았다. 이것은 북한이 민족주의적 성격이 강한 주체사상을 주장하면서도 민족주의의 사전적 의미를 매우 부정적으로 규정해 온 데에서도 잘 드러난다. 우리는 여기에서 민족주의를 내건 정치세력들의 여러 사상들을 분별하는 기준의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민족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나가야 한다는 주장을 하더라도, 민족내부의 지배와 착취를 은폐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민족을 들먹이는 주장들이 있다. 이와 달리 민족내부가 진정으로 하나 되기 위하여 민족 내부의 지배와 착취가 제거되어야 한다는 사상이 있다. 전자의 주장은 민족 내부의 억압과 지배의 비대칭적 모순을 유지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외세에 의존하거나, 또는 다른 민족에 대한 감정적인 증오를 동원하는 왜곡된 민족주의를 낳는다. 흔히 우익 민족주의론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민족내부의 갈등을 극복하고 진정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민족 내부의 지배와 착취를 근절해야 하며, 그러한 민족 내부의 지배와 착취관계를 지원하고 정당화하는 외세에 대한 저항을 불가결한 과제로 받아들이는 사상이 곧 진보적 민족주의 또는 비판적 민족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민족주의를 옹호하든, 비판하든 이 차이점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 우리가 민족주의를 진보적 관점에서 이해한다면, 한반도 역사의 진보에 있어서 남북 민족문제 해결이 우선인가 또는 남한 내부 계급모순의 해결이 우선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논란은 상당부분 핵심을 벗어난 논란이라고 할 수 있다. 민족내부의 갈등을 극복하고 민족 내부의 갈등을 조장하고 유지하는 외세에 대한 저항은 곧 민족내부의 지배와 착취를 옹호하고 정당화하는 세력과의 부단한 싸움과 뗄 수 없다. 오늘 우리 한국의 현실에서 이 두 문제가 결국 하나의 통일된 문제임을 역설적으로 잘 웅변해 주는 것은 바로 국가보안법이다. 국가보안법은 남북 민족의 이질성을 극복하고 하나됨을 추구하는 통일운동에 대해서도, 그리고 민족 내부의 지배와 착취관계를 변혁 또는 개혁하려는 노동운동에 대해서도 동시에 활용되어온 양날검이었다. 지배세력이 국가보안법이라는 하나의 통일된 무기로 두 개의 진보세력의 도전에 대처하고 있다면, 진보적 정치세력도 반통일 세력과 반노동세력을 하나의 통일된 극복개념으로 파악하고 대응하는 것이 필요하다. 통일운동이 우선이냐 노동운동이 우선이냐 하는 논란은 국면마다에서 전술․전략의 차원에서 논의될 수는 있다. 그러나 한반도 역사의 진보라는 차원에서는 이 두 운동은 결코 질적으로 다른 과제로서 경직되게 규정되어서는 안 된다. 수구세력은 통일되어 있으나 진보진영은 의식분열상태라면 그렇지 않아도 힘겨운 싸움을 더 어렵게 만들 뿐이다. 과거 군사독재시절에 진보진영에서는 한국의 민주화문제가 먼저인가 통일이 먼저인가라는 논란이 벌어진 일이 있고, 이런 논란은 형태는 다르지만 오늘날에도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 먼저 통일운동이 우선이라고 하는 논리를 보자. 이런 인식은 분단이 극복되지 않는 한 민주화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판단에 기초했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과 운동은 두 가지 면에서 모순된 것이었다. 첫째, 통일운동은 민주화가 안 된 마당에서 관변이 아닌 진보적 통일운동은 한치 앞을 나서는 것이 어려웠다. 우선 국가보안법이 앞을 막았다. 둘째, 통일운동은 다른 한편으로 민주화가 안 된, 즉 국가보안법체제 하에서 운동을 전개함으로써 노동탄압과 통일논리 독점에 기초한 독재정권에 도전하는 운동이었다. 그런 점에서 통일운동은 통일을 위한 운동이었다기보다는 진보적 민간 통일운동을 막는 정부의 독재에 항거하는 일종의 민주화운동이었다는 측면을 부인할 수 없다. 결국, 민주화보다 통일이 우선이라는 논리는 두 가지 측면 모두에서 자기모순적이었다. 통일운동보다 남한 내 민주화 및 노동운동이 우선이라는 논리 역시 그것이 경직적으로 극단화될 때 비생산적인 자기모순에 빠지는 것이었다. 첫째, 분단체제와 부가분한 관계에 있는 국가보안법이 온존된 상황에서 그리고 그러한 국가보안법을 우산으로 삼아 각종의 진보적 노동운동사상과 행동을 국가안보를 위태롭게 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각종의 법적․제도적 장애물이 많은 환경 속에서 “노동운동”의 질적인 진보는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오직 부단한 투쟁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통일운동진영이 지나치게 앞서감으로써 공안정국이 조성되고 그래서 노동운동이 이룰 수 있는 진보를 제약했다는 논리는 크게 보면 책임과 원인의 소재를 지나치게 축소시켜 보는 시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지난 6월 미국이 북한 제제를 추진하다가 중국과 러시아가 강하게 제동을 검에 따라 미국 내 강경파가 주춤하고 온건론이 재등장했다. 이에 미국은 카터방북을 계기로 유화국면으로 들어섰고, 카터는 남북간 정상회담을 중재한 꼴이 되었다. 그러자 노동운동 진영 안에서는 이 국면을 김영삼정권이 노도운동 탄압에 활용하고 있다는 지적이 있었다. 이것은 일면의 진실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정상회담 국면이 전개되지 않고 계속 전쟁불사론이 지속되었다고 하자. 이런 상황에서 노동쟁의가 확산되었을 때에 김영삼정권이 가만있었겠는가? 똑같은 또는 그 이상의 탄압이 가해졌을 것이다. 즉 정상회담이 있든 없든 노동운동이 확산되면 김영삼정권의 정치적 성격상 탄압을 본격화하게 마련이었다. 핵심적인 문제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본과 국가의 억압에 저항할 수 있는 노동운동의 비전과 결집된 힘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노동운동의 상황은 남북관계 개선과 반비례해서 나빠지는 것이 아니다. 중단기적으로 보면 별 상관없이 진행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장기적으로 볼 때는 남북관계가 남북 기본합의서의 취지대로 화해, 군축, 교류․협력이 본격화되는 단계에 들어서면 국가보안법의 근거가 약화됨으로써 결국 노동운동환경의 개선에도 근본적으로 기여하게 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요컨대, 노동운동환경에 통일운동이 부정적으로 작용한다는 생각은 일면적인 평가이다. 실제 노동운동 환경과 통일운동 환경은 단기적으로 보면 때로는 갈등하기도 하고 때로는 같이 맞물려 진척되기도 하는 등 그 상호관계가 유동적이지만, 적어도 중장기적으로는 상호보완적 관계에 있다고 생각된다. 둘째, 올바른 노동운동이 발전할수록 자주적 통일운동 환경은 개선될 수밖에 없다. 올바른 노동운동은 노동자들의 개인적인 임금인상 투쟁에 그치지 않고 국가보안법의 폐지와 같은 광범한 정치적 변화를 몰고 올 것이다. 그만큼 통일운동 환경 조성에 이바지하는 것이다. 따라서 올바른 노동운동은 자신의 의지가 어떠했든 통일운동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이기도 하였다. 이런 의미에서도 노동운동과 통일운동을, 즉 민족모순극복운동과 계급모순 극복운동을 상호 부정적이고 대립적인 성격으로 보는 관점은 그릇된 것으로 보인다. 그 두 운동은 상호보완적인 것이며 통일된 과제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노동운동과 통일운동이 각자 저마다의 위치에서 어떻게 올바르게 전개할 것 인가하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구면마다에서 전략․전술의 차원에서 그 두 운동이 어떻게 서로를 뒷받침해주고 연계시켜주며 상호보완적으로 될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실용적인 대화”라고 하겠다. 두 운동진영이 서로를 이념상 근본적으로 다른 우선순위를 내포한 사상체계로 규정하는 “이념적 논쟁”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이 문제를 최근의 한반도 통일정세와 관련시켜 살펴보기로 한다. 그간 한국외교는 기본적으로 대미추종외교였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미관계에 존재한 어느 정도의 상오작용측면을 볼 필요가 있다. 미국정부의 입장이 온건이든 강경이든 하나로 통일되어 있을 경우는 한국외교는 미국의 대북정책을 추종했다. 그러나 미국정치권과 정부 안의 강온파간에 이견이 심하고 그래서 미국의 대북정책이 협상과 강경노선 사이에서 난조에 빠졌을 때는 한국의 언론 등이 집중적으로 강경공세를 펴는 가운데 한국외교는 미국 내 강경파를 지원하는 외교를 폈다. 그러면서 미국 내 군부를 중심한 강경파와 한국의 언론이 부추기는 강경파들은 상호지원사격을 아끼지 않으면서 한반도에서 전쟁불사분위기를 조장했다. 지난 5월 말 이후 6월 중순까지 한국의 언론과 정부가 취한 태도가 바로 그 전형적인 경우였다. 중국과 러시아는 처음에 언뜻 보기에는 미국의 대북한 강경제재논의를 묵인하거나 거기에 끌려갈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정작 미국이 대북 결의안 초안을 안보리에 제출하자 중국과 러시아는 이를 견제하면서 끝까지 대화로 해결할 것을 주장했다. 이에 미국 내 강경파는 벽에 부딪치면서 온건론이 재등장했고, 이런 환경에서 카터의 방북은 미국이 유화국면으로 옮아가는데 적절히 활용되었다. 그러자 한국정부도 갑자기 남북 정상회담을 수용하는 등 신속하게 미국 내 분위기 반전에 부응했다. 이렇게 조성된 정상회담 국면은 김일성 주석 사망으로 종결되었다. 카터방북이후 미국외교가 주도해온 대북 협상 국면에 대하여 불만을 느끼던 한국 내 수구 세력은 일제히 “봉기”하였다. 김일성 주석 사망과 마침 같은 시기에 터진 전국지하철노조의 파업쟁의를 계기로 한국 내 반통일 및 반노동 세력은 하나로 단결하여 수구 이데올로기의 잔치를 벌였다. 물론 그 잔치마당은 언론이었다. 이들 수구세력은 한국사회와 국제사회에서 꾸준히 성장해온 탈냉전인 사고와 외교 그리고 민주적인 노동운동에 대하여 그간 대단한 반감과 한을 품어왔다고 볼 소 있다. 이들은 김일성 사망을 계기로 김일성의 과거와 그 유산을 이어받은 북한의 김정일체제에 그간 응축되어온 반감과 한을 쏟아놓았다. 이것은 일종의 수구적 이념의 감정적 폭발이었다. 그들의 집단 히스테리 내지는 집단적인 카타르시스의 잔치가 벌어진 것이다. 한국 내 수구세력의 이 같은 단합된 이데올로기적인 잔치는 만일 미국이 현재의 대북한 협상노선을 지속시킨다면 곧 진정될 일시적인 히스테리나 카타르시스로 끝날 터이다. 한국 언론도 곧 재빠른 상황판단하에 미국의 대북한 정책을 뒤따라가면서 작은 투정들을 부리는 것으로 자신의 역할을 한정할 것이다. 한국 내 수구세력이 그간 보여온 기본적인 대미의존성을 고려할 때 그렇게 판단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수구세력의 잔치가 카타르시스에 끝나지 않고 미국 내 강경파들을 직간접으로 자극하고 지원함으로써 미국의 대북한 정책이 난조에 빠지는데 기여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협상이 아닌 힘으로 북한을 미국의 조건에 굴복시키려는 강경파들은 미국 정부 안팎에 엄존해 있다. 그만큼 미 국무부가 이끌어가고 있는 대북한 협상기조는 취약하며 불안정하다. 만일 한국 내 수구파의 신매카시즘 준동이 미국 내 취약한 협상론 우위의 기조를 흔들어버릴 경우 북미협상은 교착에 빠지고 그런 가운데 미국 군산복합체가 주도하는 한반도 전쟁불사론이 재등장할 수 있다. 그로 인해 한국과 미국내 수구세력이 다같이 원하는 한반도 긴장국면이 조성되면 한반도내 평화통일 환경은 물론 한국 내 노동운동환경도 악화된다. 북한 역시 정권이동의 과도기에서 지도부 내부에 올바른 대응을 둘러싼 이견과 긴장이 발생할 것이다. 이것은 한반도 긴장을 심화시키는 악순환을 가져올 수 있다. 이번에 김일성주석의 사망을 계기로 수구세력이 벌이고 있는 집단적 히스테리 양상 즉, 비이성적인 신매카시즘 양상은 반통일세력과 반노동세력은 하나로 통일되어 움직인다는 사실을 재확인해 주었다. 이에 대한 진보진영의 사상적 ․운동적 대응 역시 통일운동과 노동운동의 과제를 통일적으로 파악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된다. 남북관계가 개선되면 북한의 노동을 활용하는 재벌들만 이득을 보고, 한국의 노동자들은 북한의 노동과의 경쟁 때문에 오히려 손해를 볼 것이라는 분석이 제시되기도 한 것으로 안다. 그러나 우리는 한반도에서 반통일 및 반노동의 수구세력이 통일되어 있는 만큼이나 우리가 극복해야 할 과제들 즉 평화적 분단 극복과 노동정의실현이 통일된 과제라는 점을 확인하면서, 문제를 장기적으로 보아야 한다. 한반도에서 전쟁위기를 조성항고 이를 활용하는 자들이 곧 한국의 노동운동 억압의 선봉에 있는 자들이다. 재벌들은 남북관계 개선이 되면 그 상황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돈버는 기회로 활용하려 하지만,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운동하는 사람들은 분명 아니다. 남북관계 경색과 그로인한 한국정치의 경색은 남북 대화가 진행될 때 못지않게 한국의 재벌들에게 이점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노동운동이 발전할수록 재벌들은 앞장서서 남북관계를 경색시킬 준비가 되어있는 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 남북관계가 개선되면 궁극적으로 국가보안법의 기초를 흔들면서 진보운동이 한반도 전체에서 노동정의를 확보해낼 환경이 개선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재벌들에겐 남북관계 개선에 따른 남북 경협은 북한의 노동력 활용이라는 새로운 기회를 제공해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서 재벌이 몸이 달아 조바심하지는 않는다. 재벌들은 오히려 그 같은 남북간 긴장완화가 한국 내 국가보안법 및 비민주적 노동법 체계에 제기할 도전을 동시에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에 있다. 이와 달리 진보진영 전체에게 있어서 남북관계 개선은 남북간 화해와 평화체제 실현을 통한 한반도내 민족공동체 회복의 기초가 된다. 이것은 또한 민족내부 지배와 착취의 모순과 함께 우리민족과 외세 사이에 존재하는 군사․경제적 모순을 극복해 나가는 데 있어 불가결한 과정이다. 따라서 남북관계 개선을 통한 평화적 민족공동체 회복과 건설이라는 통일운동의 목표와 작업을 재벌들의 대북투자이익이라는 측면에 한정해 봄으로써 그 의의를 폄하시키는 단기적이고 소극적인 인식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대내적 노동관계와 대외적 국제관계가 외세에 의하여 장기간 지배당하고 왜곡된 우리와 같은 약소민족 사회에서는 대내적인 사회적 모순은 민족의 대내외적 모순의 일부로서 서로 간에 긴밀하게 얽혀 있다. 김영삼정권이 핵문제로 미국에 끌려 다니는 한편 노동운동에 대하여 부단히 폭력을 행사해온 지난 1년 반의 세월을 되돌이켜보면서 이 점을 새삼 절실하게 생각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 진보적이며 비판적인 민족주의 사상과 운동이 통일운동 뿐만 아니라 우리 노동운동의 발전을 포함한 역사의 진보에 갖는 여전한 중요성을 재확인하게 된다. 그럴수록 우리는 앞서 지적한 진보적 민족주의가 추구하는 민족 모순 극복의 두 가지 복합적 의미를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그래서 우익적인 민족통합과 통일논리가 민족주의적 가치를 둘러싼 세계관의 싸움터를 지배하도록 방치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김영삼 정권이 출범한지 1년 반이 넘어가는 시점에서 핵문제와 관련한 자주적 외교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노동문제에 관련한 진취적 개혁도 찾아보기 힘든 가운데 군사정권 시절의 힘으로 밀어붙이는 정부의 행태에 변화를 느끼기 어렵다. 이념적으로는 국제화 또는 국제공조라는 말들이 우리의 경제 및 외교의 기본원칙처럼 자리 잡아 가고 있다. 그런 가운데 진보적 사상이 숨쉴 공간이 축소되어 가고 있다. 특히 민족주의의 의미가 혼미해지거나 폄하되고 있다. 우리사회 진보운동은 현재의 문제점을 조망하면서 힘찬 미래를 열어갈 비전을 제시해야 되는 상황이지만 역시 방황하고 있고 힘이 결집되지 못하고 있는 듯 보인다. 이런 어려운 시절에 사상적으로도 우리가 풀고 세워갈 과제들이 많지만 여기에서는 민족주의의 의미를 되새겨 보고 그것이 통일운동과 함께 노동운동 등 한반도의 역사적 진보에 갖는 뜻을 반추해 보고자 한다. 지금 역사적 단계에서 우리의 민족주의가 안고 있는 중추적인 과제는 물론 분단의 극복과 통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민족주의의 의미는 외세의 힘까지 빌어가면서 북한에 대해 힘으로 밀어붙여 흡수통일을 해야 한다는 우익적인 통일 논리들이 판치면서 왜곡되고 훼손되어 왔다. 이러한 왜곡과 훼손으로부터 민족주의의 정당한 의미를 다시 세울 필요가 있다. 민족주의를 민족적 모순을 극복하는 사상과 운동이라고 할 때, 이 민족모순은 크게 민족내부의 갈등과 민족과 외세의 갈등에서 비롯되는 문제로 나눌 수 있다. 민족주의는 이 같은 두 가지 차원의 민족적 모순들을 극복하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민족 내부의 갈등이라는 대내적 민족모순을 민족 전체가 보다 높은 수준에서 하나의 공동체로 만남으로써 해소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민족과 다른 외세들 사이의 비대칭적이며 왜곡된 관계에서 파생하는 대외적 민족모순을 극복하려는 지향인 것이다. 통일이라는 문제는 이 두 가지 차원의 민족적 모순들을 극복하는 것과 불가분한 관계에 있다. 한반도에서 분단을 유지하는 세력의 중요한 한부분이 한반도에 대한 비대칭적 지배력을 행사하면서 한민족 내부의 하나됨을 저해하는 외세라고 할 수 있으며, 우리 현대사에 있어서 이 외세는 미국으로 집약된다. 결국 우리 민족이 민족 내부의 갈등을 해소하고 대외적인 자주와 자존을 확보하는 것은 하나의 통일된 과제이다. 그런데 문제는 누구나 민족이 내부의 갈등을 극복하고 하나의 공동체로 되어야 한다는 것에는 공감하되, 어떤 공동체로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하나로 되어야 하는가에 대하여 의견이 다르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의 차이는 현재 한민족 안팎의 정치․경제․사회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외세인 미국을 어떻게 보느냐, 즉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존재의 의미를 어떻게 파악하느냐 하는 문제와 불가분환 관계에 있다. 이러한 분열된 비전과 인식 가운데에서 진정한 민족주의의 길은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분별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 해방 직후 우익 정치인들은 사회주의에 대칭되는 의미로 스스로 민족주의자로 자칭하였다. 한편 사회주의자들은 소련이 주도하는 프롤레타리아트 국제주의의 관점에서 민족주의를 편협한 사상으로 이해함으로써 우익들이 스스로를 민족 우선의 정치세력으로 치장하는 행태를 방치하고 말았다. 이것은 북한이 민족주의적 성격이 강한 주체사상을 주장하면서도 민족주의의 사전적 의미를 매우 부정적으로 규정해 온 데에서도 잘 드러난다. 우리는 여기에서 민족주의를 내건 정치세력들의 여러 사상들을 분별하는 기준의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민족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나가야 한다는 주장을 하더라도, 민족내부의 지배와 착취를 은폐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민족을 들먹이는 주장들이 있다. 이와 달리 민족내부가 진정으로 하나 되기 위하여 민족 내부의 지배와 착취가 제거되어야 한다는 사상이 있다. 전자의 주장은 민족 내부의 억압과 지배의 비대칭적 모순을 유지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외세에 의존하거나, 또는 다른 민족에 대한 감정적인 증오를 동원하는 왜곡된 민족주의를 낳는다. 흔히 우익 민족주의론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민족내부의 갈등을 극복하고 진정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민족 내부의 지배와 착취를 근절해야 하며, 그러한 민족 내부의 지배와 착취관계를 지원하고 정당화하는 외세에 대한 저항을 불가결한 과제로 받아들이는 사상이 곧 진보적 민족주의 또는 비판적 민족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민족주의를 옹호하든, 비판하든 이 차이점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 우리가 민족주의를 진보적 관점에서 이해한다면, 한반도 역사의 진보에 있어서 남북 민족문제 해결이 우선인가 또는 남한 내부 계급모순의 해결이 우선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논란은 상당부분 핵심을 벗어난 논란이라고 할 수 있다. 민족내부의 갈등을 극복하고 민족 내부의 갈등을 조장하고 유지하는 외세에 대한 저항은 곧 민족내부의 지배와 착취를 옹호하고 정당화하는 세력과의 부단한 싸움과 뗄 수 없다. 오늘 우리 한국의 현실에서 이 두 문제가 결국 하나의 통일된 문제임을 역설적으로 잘 웅변해 주는 것은 바로 국가보안법이다. 국가보안법은 남북 민족의 이질성을 극복하고 하나됨을 추구하는 통일운동에 대해서도, 그리고 민족 내부의 지배와 착취관계를 변혁 또는 개혁하려는 노동운동에 대해서도 동시에 활용되어온 양날검이었다. 지배세력이 국가보안법이라는 하나의 통일된 무기로 두 개의 진보세력의 도전에 대처하고 있다면, 진보적 정치세력도 반통일 세력과 반노동세력을 하나의 통일된 극복개념으로 파악하고 대응하는 것이 필요하다. 통일운동이 우선이냐 노동운동이 우선이냐 하는 논란은 국면마다에서 전술․전략의 차원에서 논의될 수는 있다. 그러나 한반도 역사의 진보라는 차원에서는 이 두 운동은 결코 질적으로 다른 과제로서 경직되게 규정되어서는 안 된다. 수구세력은 통일되어 있으나 진보진영은 의식분열상태라면 그렇지 않아도 힘겨운 싸움을 더 어렵게 만들 뿐이다. 과거 군사독재시절에 진보진영에서는 한국의 민주화문제가 먼저인가 통일이 먼저인가라는 논란이 벌어진 일이 있고, 이런 논란은 형태는 다르지만 오늘날에도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 먼저 통일운동이 우선이라고 하는 논리를 보자. 이런 인식은 분단이 극복되지 않는 한 민주화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판단에 기초했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과 운동은 두 가지 면에서 모순된 것이었다. 첫째, 통일운동은 민주화가 안 된 마당에서 관변이 아닌 진보적 통일운동은 한치 앞을 나서는 것이 어려웠다. 우선 국가보안법이 앞을 막았다. 둘째, 통일운동은 다른 한편으로 민주화가 안 된, 즉 국가보안법체제 하에서 운동을 전개함으로써 노동탄압과 통일논리 독점에 기초한 독재정권에 도전하는 운동이었다. 그런 점에서 통일운동은 통일을 위한 운동이었다기보다는 진보적 민간 통일운동을 막는 정부의 독재에 항거하는 일종의 민주화운동이었다는 측면을 부인할 수 없다. 결국, 민주화보다 통일이 우선이라는 논리는 두 가지 측면 모두에서 자기모순적이었다. 통일운동보다 남한 내 민주화 및 노동운동이 우선이라는 논리 역시 그것이 경직적으로 극단화될 때 비생산적인 자기모순에 빠지는 것이었다. 첫째, 분단체제와 부가분한 관계에 있는 국가보안법이 온존된 상황에서 그리고 그러한 국가보안법을 우산으로 삼아 각종의 진보적 노동운동사상과 행동을 국가안보를 위태롭게 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각종의 법적․제도적 장애물이 많은 환경 속에서 “노동운동”의 질적인 진보는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오직 부단한 투쟁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통일운동진영이 지나치게 앞서감으로써 공안정국이 조성되고 그래서 노동운동이 이룰 수 있는 진보를 제약했다는 논리는 크게 보면 책임과 원인의 소재를 지나치게 축소시켜 보는 시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지난 6월 미국이 북한 제제를 추진하다가 중국과 러시아가 강하게 제동을 검에 따라 미국 내 강경파가 주춤하고 온건론이 재등장했다. 이에 미국은 카터방북을 계기로 유화국면으로 들어섰고, 카터는 남북간 정상회담을 중재한 꼴이 되었다. 그러자 노동운동 진영 안에서는 이 국면을 김영삼정권이 노도운동 탄압에 활용하고 있다는 지적이 있었다. 이것은 일면의 진실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정상회담 국면이 전개되지 않고 계속 전쟁불사론이 지속되었다고 하자. 이런 상황에서 노동쟁의가 확산되었을 때에 김영삼정권이 가만있었겠는가? 똑같은 또는 그 이상의 탄압이 가해졌을 것이다. 즉 정상회담이 있든 없든 노동운동이 확산되면 김영삼정권의 정치적 성격상 탄압을 본격화하게 마련이었다. 핵심적인 문제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본과 국가의 억압에 저항할 수 있는 노동운동의 비전과 결집된 힘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노동운동의 상황은 남북관계 개선과 반비례해서 나빠지는 것이 아니다. 중단기적으로 보면 별 상관없이 진행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장기적으로 볼 때는 남북관계가 남북 기본합의서의 취지대로 화해, 군축, 교류․협력이 본격화되는 단계에 들어서면 국가보안법의 근거가 약화됨으로써 결국 노동운동환경의 개선에도 근본적으로 기여하게 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요컨대, 노동운동환경에 통일운동이 부정적으로 작용한다는 생각은 일면적인 평가이다. 실제 노동운동 환경과 통일운동 환경은 단기적으로 보면 때로는 갈등하기도 하고 때로는 같이 맞물려 진척되기도 하는 등 그 상호관계가 유동적이지만, 적어도 중장기적으로는 상호보완적 관계에 있다고 생각된다. 둘째, 올바른 노동운동이 발전할수록 자주적 통일운동 환경은 개선될 수밖에 없다. 올바른 노동운동은 노동자들의 개인적인 임금인상 투쟁에 그치지 않고 국가보안법의 폐지와 같은 광범한 정치적 변화를 몰고 올 것이다. 그만큼 통일운동 환경 조성에 이바지하는 것이다. 따라서 올바른 노동운동은 자신의 의지가 어떠했든 통일운동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이기도 하였다. 이런 의미에서도 노동운동과 통일운동을, 즉 민족모순극복운동과 계급모순 극복운동을 상호 부정적이고 대립적인 성격으로 보는 관점은 그릇된 것으로 보인다. 그 두 운동은 상호보완적인 것이며 통일된 과제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노동운동과 통일운동이 각자 저마다의 위치에서 어떻게 올바르게 전개할 것 인가하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구면마다에서 전략․전술의 차원에서 그 두 운동이 어떻게 서로를 뒷받침해주고 연계시켜주며 상호보완적으로 될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실용적인 대화”라고 하겠다. 두 운동진영이 서로를 이념상 근본적으로 다른 우선순위를 내포한 사상체계로 규정하는 “이념적 논쟁”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이 문제를 최근의 한반도 통일정세와 관련시켜 살펴보기로 한다. 그간 한국외교는 기본적으로 대미추종외교였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미관계에 존재한 어느 정도의 상오작용측면을 볼 필요가 있다. 미국정부의 입장이 온건이든 강경이든 하나로 통일되어 있을 경우는 한국외교는 미국의 대북정책을 추종했다. 그러나 미국정치권과 정부 안의 강온파간에 이견이 심하고 그래서 미국의 대북정책이 협상과 강경노선 사이에서 난조에 빠졌을 때는 한국의 언론 등이 집중적으로 강경공세를 펴는 가운데 한국외교는 미국 내 강경파를 지원하는 외교를 폈다. 그러면서 미국 내 군부를 중심한 강경파와 한국의 언론이 부추기는 강경파들은 상호지원사격을 아끼지 않으면서 한반도에서 전쟁불사분위기를 조장했다. 지난 5월 말 이후 6월 중순까지 한국의 언론과 정부가 취한 태도가 바로 그 전형적인 경우였다. 중국과 러시아는 처음에 언뜻 보기에는 미국의 대북한 강경제재논의를 묵인하거나 거기에 끌려갈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정작 미국이 대북 결의안 초안을 안보리에 제출하자 중국과 러시아는 이를 견제하면서 끝까지 대화로 해결할 것을 주장했다. 이에 미국 내 강경파는 벽에 부딪치면서 온건론이 재등장했고, 이런 환경에서 카터의 방북은 미국이 유화국면으로 옮아가는데 적절히 활용되었다. 그러자 한국정부도 갑자기 남북 정상회담을 수용하는 등 신속하게 미국 내 분위기 반전에 부응했다. 이렇게 조성된 정상회담 국면은 김일성 주석 사망으로 종결되었다. 카터방북이후 미국외교가 주도해온 대북 협상 국면에 대하여 불만을 느끼던 한국 내 수구 세력은 일제히 “봉기”하였다. 김일성 주석 사망과 마침 같은 시기에 터진 전국지하철노조의 파업쟁의를 계기로 한국 내 반통일 및 반노동 세력은 하나로 단결하여 수구 이데올로기의 잔치를 벌였다. 물론 그 잔치마당은 언론이었다. 이들 수구세력은 한국사회와 국제사회에서 꾸준히 성장해온 탈냉전인 사고와 외교 그리고 민주적인 노동운동에 대하여 그간 대단한 반감과 한을 품어왔다고 볼 소 있다. 이들은 김일성 사망을 계기로 김일성의 과거와 그 유산을 이어받은 북한의 김정일체제에 그간 응축되어온 반감과 한을 쏟아놓았다. 이것은 일종의 수구적 이념의 감정적 폭발이었다. 그들의 집단 히스테리 내지는 집단적인 카타르시스의 잔치가 벌어진 것이다. 한국 내 수구세력의 이 같은 단합된 이데올로기적인 잔치는 만일 미국이 현재의 대북한 협상노선을 지속시킨다면 곧 진정될 일시적인 히스테리나 카타르시스로 끝날 터이다. 한국 언론도 곧 재빠른 상황판단하에 미국의 대북한 정책을 뒤따라가면서 작은 투정들을 부리는 것으로 자신의 역할을 한정할 것이다. 한국 내 수구세력이 그간 보여온 기본적인 대미의존성을 고려할 때 그렇게 판단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수구세력의 잔치가 카타르시스에 끝나지 않고 미국 내 강경파들을 직간접으로 자극하고 지원함으로써 미국의 대북한 정책이 난조에 빠지는데 기여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협상이 아닌 힘으로 북한을 미국의 조건에 굴복시키려는 강경파들은 미국 정부 안팎에 엄존해 있다. 그만큼 미 국무부가 이끌어가고 있는 대북한 협상기조는 취약하며 불안정하다. 만일 한국 내 수구파의 신매카시즘 준동이 미국 내 취약한 협상론 우위의 기조를 흔들어버릴 경우 북미협상은 교착에 빠지고 그런 가운데 미국 군산복합체가 주도하는 한반도 전쟁불사론이 재등장할 수 있다. 그로 인해 한국과 미국내 수구세력이 다같이 원하는 한반도 긴장국면이 조성되면 한반도내 평화통일 환경은 물론 한국 내 노동운동환경도 악화된다. 북한 역시 정권이동의 과도기에서 지도부 내부에 올바른 대응을 둘러싼 이견과 긴장이 발생할 것이다. 이것은 한반도 긴장을 심화시키는 악순환을 가져올 수 있다. 이번에 김일성주석의 사망을 계기로 수구세력이 벌이고 있는 집단적 히스테리 양상 즉, 비이성적인 신매카시즘 양상은 반통일세력과 반노동세력은 하나로 통일되어 움직인다는 사실을 재확인해 주었다. 이에 대한 진보진영의 사상적 ․운동적 대응 역시 통일운동과 노동운동의 과제를 통일적으로 파악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된다. 남북관계가 개선되면 북한의 노동을 활용하는 재벌들만 이득을 보고, 한국의 노동자들은 북한의 노동과의 경쟁 때문에 오히려 손해를 볼 것이라는 분석이 제시되기도 한 것으로 안다. 그러나 우리는 한반도에서 반통일 및 반노동의 수구세력이 통일되어 있는 만큼이나 우리가 극복해야 할 과제들 즉 평화적 분단 극복과 노동정의실현이 통일된 과제라는 점을 확인하면서, 문제를 장기적으로 보아야 한다. 한반도에서 전쟁위기를 조성항고 이를 활용하는 자들이 곧 한국의 노동운동 억압의 선봉에 있는 자들이다. 재벌들은 남북관계 개선이 되면 그 상황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돈버는 기회로 활용하려 하지만,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운동하는 사람들은 분명 아니다. 남북관계 경색과 그로인한 한국정치의 경색은 남북 대화가 진행될 때 못지않게 한국의 재벌들에게 이점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노동운동이 발전할수록 재벌들은 앞장서서 남북관계를 경색시킬 준비가 되어있는 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 남북관계가 개선되면 궁극적으로 국가보안법의 기초를 흔들면서 진보운동이 한반도 전체에서 노동정의를 확보해낼 환경이 개선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재벌들에겐 남북관계 개선에 따른 남북 경협은 북한의 노동력 활용이라는 새로운 기회를 제공해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서 재벌이 몸이 달아 조바심하지는 않는다. 재벌들은 오히려 그 같은 남북간 긴장완화가 한국 내 국가보안법 및 비민주적 노동법 체계에 제기할 도전을 동시에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에 있다. 이와 달리 진보진영 전체에게 있어서 남북관계 개선은 남북간 화해와 평화체제 실현을 통한 한반도내 민족공동체 회복의 기초가 된다. 이것은 또한 민족내부 지배와 착취의 모순과 함께 우리민족과 외세 사이에 존재하는 군사․경제적 모순을 극복해 나가는 데 있어 불가결한 과정이다. 따라서 남북관계 개선을 통한 평화적 민족공동체 회복과 건설이라는 통일운동의 목표와 작업을 재벌들의 대북투자이익이라는 측면에 한정해 봄으로써 그 의의를 폄하시키는 단기적이고 소극적인 인식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대내적 노동관계와 대외적 국제관계가 외세에 의하여 장기간 지배당하고 왜곡된 우리와 같은 약소민족 사회에서는 대내적인 사회적 모순은 민족의 대내외적 모순의 일부로서 서로 간에 긴밀하게 얽혀 있다. 김영삼정권이 핵문제로 미국에 끌려 다니는 한편 노동운동에 대하여 부단히 폭력을 행사해온 지난 1년 반의 세월을 되돌이켜보면서 이 점을 새삼 절실하게 생각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 진보적이며 비판적인 민족주의 사상과 운동이 통일운동 뿐만 아니라 우리 노동운동의 발전을 포함한 역사의 진보에 갖는 여전한 중요성을 재확인하게 된다. 그럴수록 우리는 앞서 지적한 진보적 민족주의가 추구하는 민족 모순 극복의 두 가지 복합적 의미를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그래서 우익적인 민족통합과 통일논리가 민족주의적 가치를 둘러싼 세계관의 싸움터를 지배하도록 방치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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