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1 | [저널초점]
낚시꾼의 공인된 거짓말과 대통령의 공약
윤덕향(2004-02-03 10:45:28)
낚시꾼이 놓친 고기의 크기는 공인된 거짓말일 수 있다. 한발이 넘는다는 붕어는 기실 한뼘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낚시꾼의 과장은 밉지가 않고 본인도 싫증나지 않게 써먹을 수 있는 허풍이다. 그 과장과 허풍에는 간절한 소망과 염원이 바탕하기 때문이다. 한해를 또 넘기는 노처녀의 시집가지 않겠다는 말도 들어줄 수 있는 거짓말이다. 갈 수가 없어서가 아니라 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지 않았다는 노처녀의 말은 듣는 사람마다가 그 속 내막을 어림짐작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눈 밑에 늘어가는 잔주름을 알면서도 태연한 척하는 자존심은 속내를 털어놓은 것보다도 더한 진실로 전해진다.
이런 류의 거짓말을 탓하는 사람은 없다. 그저 의미 있게 웃음을 입가에 머금고 긍정하듯 고개를 주억거릴 뿐이다. 때로 더불어 맞장구를 쳐서 얼마간의 고소함을 주변의 삭막함에 더해줄 수도 있는 일이다. 정색을 하고 고기가 그렇게 크지 않다는 사람이나, 그 같은 붕어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입에 게거품을 무는 사람이 오히려 이상하게 여겨진다. 시집을 안가는 것이 아니라 못가는 것이라고 공박하며 철없는 대거리를 하는 사람도 없다. 그저 그러련하는 기분으로 들어 넘기며 중매를 서줄까 하는 따위로 한 두 마디를 농하는 것이 보통이다.
한해가 저물어간다. 해마다 세밑이면 이런저런 일로 바쁜 한편으로 뭔가 허전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 인간사인가 보다. 특히 금년 세밑에는 온나라를 떠들썩하게 한 대통령선거가 있어 한동안은 그 열풍속에서 지난 느낌이다. 대통령선거가 끝난 지금, 느끼는 기분이야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선거열기가 있기 이전과 비교하여 보다 쓸쓸한 느낌이 드는 사람도 있고 일종의 깊은 무력감에 사로잡힌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특정후보를 지지하였음에도 그가 당선되지 못하였음에서 비롯되는 부분도 없지않을 것이다. 또는 자신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이 너무나도 많은데 따른 것일 수도 있다. 더구나 특정후보에게 지나치다 할만큼 많은 몰표를 주었음에도 낙선한 데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각자의 입장과 동기가 어떠하건 선거이전보다 더한 허전함을 느끼는 것은 세밑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세밑에 허전함이 더해지는 것은 귀 동냥으로 몇 억, 몇 십억, 몇 백억의 단위가 소시민들의 만원처럼 흔하게 들려온 탓인지도 모른다. 몇 조원인지를 모른다는 재산을 두고 그 같은 돈이 얼마나 되는지를 도무지 실감나게 어림할 수 없는 무능함에서 기인하는 것만은 아니다. 아파트 값을 반으로 내리고 물가를 잡고 국민소득을 몇 만 불로 올려놓겠다는 사람이 낙선되었기 때문만도 아니다. 농가의 부채를 탕감하고 U.R. 협상에서도 쌀만은 개방하지 않겠다는 공약이 물건너 가서만이 아니다. 편협한 지역주의에 바탕하여 우리 지역의 사람이 낙선하였기 때문에 그런 것만도 아니다. 물론 부분적으로 그 같은 것들이 아쉬움으로 남아서 가슴 한구석에 개운하지 못한 감정의 찌꺼기로 앙금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느끼는 쓸쓸함은 그런 것에서 연유하는 것만은 아니다. 보다 근본적으로 끝없을 것처럼 보였던 말의 성찬이 끝나고 또다시 5년을 기다려야만 된다는 데에서 비롯되는 것이. 선거과정에서 제시된 모든 공약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저 그러련 하는 기분으로 듣고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일 뿐이다. 그럼에도 그같은 말의 성찬속에서는 내일의 장밋빛 세상을 그릴 수라도 있었다. 자신만이 이 나라, 이 민족공동체의 번영을 이룰 수 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그토록 낮은 자세로 호소하는 후보들에게서 그들중 누구라도 우리나라를 더할 수 없는 복지국가로 발전시킬 초인적 힘을 가진 것처럼 착각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결과가 드러난 지금 그같은 착각에서 깨어날 수 밖에 없으며 5년뒤에나 다시 그같은 말의 성찬속에서 잠시간의 착각을 즐길 수가 있게 된다는 상실감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순수민간인에 의한 문민정치시대가 열리게 된 시점에서, 다시한번 비약하는 한민족을 그려도 시원찮을 때에, 온갖 희망만을 말해도 시원찮을 새해벽두에 이같이 청승을 떠는 것은 비난받아 마땅한 일이다. 밉든 곱든 신혼초에는 깨가 쏟아진다는 판에 정당한 절차를 거쳐 대통령이 선출되고 나름의 경륜을 펼치려는 잔치마당에 소금을 뿌리려는 심술로 치도곤을 맞을 일이다.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으랬다고 눈치코치없이 막말을 해대려는 것이 아니다. 그만한 눈치쯤은 가지고 있다.
참으로 말하려는 것은 현재 우리의 심정이야 어떠하든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와 얼마간의 밀월기간을 가지자는 것이다. 그 기간은 길수록 좋다. 그의 임기가 끝날 때까지 이어진다면 아주 바람직한 일이다. 밀월기분은 결혼한 분이면 짐작하겠지만 한없는 사랑과 믿음이 바탕되어야 한다. 이 기간에는 상대방의 실상이 낱낱이 드러나면 결혼전 그처럼 멋있었던 보조개가 곰보임을 확인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곰보까지를 이해하고 사랑으로 받아들여야 하며 무조건적이라 할만큼 믿음이 바탕하여야한다. 속았다는 기분이 드는 순간 밀월은 끝날 수밖에 없다. 비판을 하되 사랑에 바탕하고 마음속 깊은 고민을 스스럼없이 털어놓을 수 있는 믿음이 자리하는 한 밀월은 이어지는 것이다.
문민정치의 새시대가 열리고 계유년 새해가 밝아오는 이 때, 5년전 새해벽두에 가졌던 기대와 믿음은 어디로 갔는가? 이제 물에 씻긴 듯 사라져버린 그 기대와 믿음을 되뇌이자는 것이 아니다. 지난 5년과는 다른 5년이 우리앞에 열리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리저리 주절거린 푸념이 속좁은 여편네의 넋두리로 끝나기를 바라는 것이다. 경쟁에 이기기 위하여 제시했던 이런 저런 말의 성찬을 남김없이 이룰 수 있을 것으로는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도자의 약속은 낚시꾼의 허풍일 수만은 없다. 대통령의 자존심은 노처녀의 자존심일 수도 없다. 결혼전 이리저리 늘어놓은 미사여구가 송두리째 허언으로 밝혀지는 순간 밀월이 끝나는 것을 새겨둘 일이다. 결혼전 약속을 모두 믿지는 않지만 송두리째 사기임을 알고서도 사랑과 믿음을 줄 사람은 많지 않은 법이다.
구세군 남비가 거리에 등장한 세밑, 우리 역사의 새로운 시대를 기록할 희망의 새해를 앞두고 미움과 불신, 끝간데 모를 무력감과 절망감만을 가지고 살기에는 너무 추운 겨울이다. 추운 날일수록 마음이라도 따뜻하게 살아야하며 새해는 밝아야만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