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1 | [교사일기]
다시 길 위에서
최 소 영․고창 흥덕중교사(2004-02-03 10:47:49)
뿌연 담배연기가 가득 맴도는 좁디좁은 교무실, 난로 위에는 어느덧 구수한 보리물이 끓고 있다. 밖에는 흰눈이 소담스레 내리고 멀리 방장산이 커다랗게 다가온다. 시험에 지친 아이들이 창틈으로 모가지를 빼고 좋아라 소리를 질러댄다. 잠시 후 날카로운 기계음이 귀를 때리고 아이들의 환호성도 이내 사그라든다. 1교시 시험지를 받아든 다는 가볍게 교무실 문을 나선다.
오늘은 기말고사 마지막 날, 갑자기 떨어진 기온 탓에 불을 당긴 난로는 교실 안에서 새빨갛게 달아 오르고 아이들의 나지막한 한숨소리도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며칠 전에 끝난 고입 선발고사 때문인지 이 기말고사를 대하는 아이들의 태도가 아주 느슨해져 있다. 연일 계속되는 시험에 지친 탓에 핼쓱한 얼굴로 인사를 하며 곧장 시험지를 받고는 책상에 넙죽 엎드린 아이들이 대부분이다. 매일 매일 긴장을 주던 고입선발고사 5일 전, 4일 전……하던 정성스런 글씨도 이제는 고사 일정이 칠판 한모퉁이에 아무렇게나 쓰여 있다.
영어……, 연필을 이리 저리 굴리며 애를 쓰지만 아무래도 모르겠다는 표정이 역력한 아이들이 하나둘 고개를 숙이며 잠을 청한다.
어느 새 겨울이라더니…….
훌쩍 커버린 키, 듬성 듬성 난 수염, 어느덧 녀석들의 얼굴엔 제법 총각티가 박혔다. 또한 오늘 아침 정성스레 손질한 머리 밑으로 계집애들의 처녀티 물씬 나는 얼굴도 보인다. 나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어 본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나고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가 되어 교문을 나설 너희들…. 그런 너희들을 보며 나는 이제 우리가 보낸 시간들을 정리해야 함을 느꼈다.
1991년 3월……. 아직은 바람이 매섭게 느껴지던, 그래서 따스한 햇살이 그리운 계절이었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아무런 준비도 없이 맞이한 교사 발령, 첫부임……. 정장차림이 아직은 어색하고 그래서 더 수줍은 나의 모습을 보며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던 너희들의 모습이 지금 내눈에 선하다. 눈이 초롱초롱하다는 나의 말에 그말은 너무 우리에겐 어울리지 않는다며 점잖을 빼던 너희들…. 그리고 그후 수업을 통한 만남…, 만해를 배우며 동주, 육사, 소월, 진이…… 등을 이야기하고 느꼈던 뜨거운 마음들, 김정한의 「수라도」를 읽으며 울분에 차서 붉게 상기된 너희들의 얼굴도 기억에 생생하다. 또한 부족한 선생에게 언뜻 언뜻 던지던 너희들의 순수하고 날카로운 질문들은 언제나 나를 반성하게 했다. 그러기에 너희들은 교단에 서있던 나보다 언제나 한 수 위였다.
국어교사라는 막중한 짐이 내뒤에 언제나 놓여 있었고, 그 때문에 난 언제나 무언가를 말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던 시절, 매번의 실망, 매번의 좌절, 하지만 지금은 어렴풋하게 느낀다. 아이들은 아이들 나름의 모습으로 커간다는 말을…….
고입을 앞둔 한달 간의 보충수업이 생각나는구나. 끊임없는 수업과 보충수업의 연속, 아이들이 우리에겐 무에 그리 보충할 것이 많았단 말인가?? 벌써 진학이 끝나 버린 반수 이상의 상고, 공고 진학 아읻ㄹ은 졸업날짜만 기다리며 매일 도장을 찍듯 빈 책가방을 메고 학교로 왔다. 그러나 그들 모두를 수업의 장에 끌어 들이지 못한 채 몇몇의 인문계 진학 아이들만을 이끌고 진행하던 한달 간의 수업, 참으로 부족한 선생이구나. 이제 그 힘들어 하던 고입의 관문도 끝이 났다. 상급 학교의 진학에 대한 부푼 꿈에 젖어 있기 보다는 ‘두렵다’는 너희들에게 다시 길위에 선 너희들에게 나는 희망을 이야기한다. 상고, 공고 진학해 돈 많이 벌어 부모님과 함께 잘 사는 것이 꿈이라는 어느 녀석의 말에 ‘그래, 암, 그래야지’ 하며 쓴 웃음을 지어 보이고 하늘도 한번 쳐다 본다.
미치도록 흰눈이구나.
운동장에 차곡 차곡 쌓인다. 지난 가을 청소시간마다 너희들이 곧지 않은 눈으로 흘겨보던 교정의 팽나무도 그 잎이 다 떨어져 이상한 가지만 시커멓게 내놓고 있구나. 녀석들아, 엎드린 몸을 일으켜 하늘을 한번 봐라. 하얀 눈 사이로 우리들이 지난 봄, 접어 날린 종이 비행기가 두둥실 하늘을 맴도는 것 같구나. 그래 다시 한번 시작이다. 너희들과 나는 서로 다른 길위에서 서로가 날린 종이비행기의 꿈과 희망을 가지고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녀석들아. 무식하게 내리는 눈을 보며 노래를 부르자. 다시 선 길 위에서 희망의 노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