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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9 | [문화저널]
일하며 배우며 내일은 본다. -야학의 현장을 찾아- 야학을 아십니까?
김영례 문화저널 간사 (2004-02-03 10:49:05)
야학(?)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60년대 대도시의 빈민층을 대상으로 산동네에 설치한 천막학교를 연상하거나, 한국의 자본주의화가 급격히 진행된 70년대 소위 운동권 학생들의 노동자층을 겨냥한 의식화 교육의 장으로서의 야학을 인식한다. 그것은 야학이 현실과는 동떨어진 특별한 사람들의 모임체처럼 아직 많은 사람들에겐 낯선 이름으로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현 사회에서 그 필요성과 존재론적 의미를 제기하며 서서히 많은 사람들에게 잊혀져가고 있는 오늘의 야학은, 그러나 분명 제도교육의 그늘에 가리워진 또 다른 교육의 현장이다. 80년대, 가난 때문에 학업을 중도에 포기해야만 했던 학생들이 검정고시를 목표로 찾던 야학은, 근래 들어 그때의 상황과는 다르게 서서히 변하고 있다. 야학을 찾는 학생들은 현행 입시위주의 교육에 상처입고, 빈부격차에 의한 사회 불평등 의식이 심화되어 나타나는 소외감, 외로움, 고독 등 사회의 고질적인 병을 안고 야학을 찾는데 이제 그들에게 야학은 교육을 통해 이루어지는 학생들의 자기 성취감만이 아니라 그들의 사회 속에서 왜 그런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현실의 자각 및 실천의지의 각성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여기에서는 이러한 야학의 이해를 돕고자 야학사를 개괄적으로 정리하고 전북지역에 실제로 어떤 형태로 야학교육이 진행되고 있는지와 앞으로 야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성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현재 야학은 그 성격에 많은 변화가 예상되고 있다. 검정고시가 현실의 모순을 해결해 주기 못한다는 사실의 인식에서 야학의 성격이 검시야학, 생활야학, 노동야학으로 면화했던 70년대식의 구분으로 지금의 야학을 분류할 수는 없다. 그것은 야학이 명백히 사회운동의 형태로 진보야학과 보수야학으로 끊임없이 재정립되며 더욱 발전해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야학의 역사 민중을 자각시키고 민족의 힘을 기르기 위해 애국지사와 청년들이 맨 처음 설립했던 야학은 근대 선교사들이 천주교 전파와 함께 문명을 깨치는 일에 치중한 서구식 교육기관과는 그 성격을 달리한다. 1907년 마산 노동야학을 시초로 민족적, 민중적 성격을 표명한 야학운동은 식민지 지배하에서도 꺼지지 않는 민족정신을 명백히 증거하고 있다. 그러나 8.15와 분단의 과정 속에서 60년대를 거치면서 검정고시 교육을 담당하는 검시야학의 모습으로 다시 등장하게 된다. 몰락 이농민과 도시빈민층을 대상으로 그들의 교육적 문화적 소외를 인식한 지식청년과 사회사업가들에 의해, 농촌에서는 농촌봉사활동과 연관되는 농촌계몽운동의 형태로 도시에서는 대도시의 빈민촌, 소공장 밀집지구 등에서 천막학교, 교회부설학교 등의 형태로 교육이 이루어진 것이다. 70년대 야학은 이전보다 더욱 분화, 발전된 형태로 나타난다. 그것은 검시 위주의 야학이 생활지식이나 교양교육을 주로 하는 ꡒ생활야학ꡓ과 노동법교육, 주체적 생활교육을 하는 ꡒ노동야학ꡓ등으로 그 모습이 변모하였음을 말한다. 그 직접적 원인은 야학생(노동자, 도시빈민)의 빈곤의 원인을 교육을 못 받은 때문으로 보고 검시합격만을 목표로 하던 야학들이 현실에서 극히 저조한 검시합격률과 합격해도 경제적 이유로 진학하지 못한다는 사실의 깨달음 때문이었다. 특히, 이 시기 야학의 대표적 특징은 야학이론에 있어서 프레이리의 민중교육이론을 시발로 한 ꡐ의식과 교육이론ꡑ의 도입과 유신말기의 사회적 경색에 의한 공간적 제약에 따른 ꡐ자취방 야학ꡑ의 발생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노동대중에 대한 이해결여 및 교사진의 미숙한 현장경험과 실천력 등으로 가장 진보적 형태인 노동야학의 경우에도 노동교육을 행한다기보다 단지 노동자 대상의 교육에 지나지 않는 문제점을 발생시켰다. 80년대는 특히 성장한 노동자층을 기반으로 한 노동운동의 부각이 두드러지는 시기이다. 야학운동도 사회 운동적 성격을 분명히 함과 동시에 나아가 그 성격을 명확히 하기 위한 여러 가지 갈등과 대립의 과정을 겪게 된다. 그 하나가 80년 2월 5일 전국 17개 야학 40여명의 대표가 참석하여 최초로 [전국야학협의회](이하 야협)를 결성하게 된 것이고 하나는 소위 ꡐ야학연합회사건(83년8월-84년6월)ꡑ이라 하여 야협에 참여한 야학들이 별 근거 없이 지하좌경조직으로 몰려 야학의 대학생교사들이 치안본부에 강제 연행되어 수사를 받은 사건이다. 이후 야학연합회사건은 정부당국의 무리한 탄압이었음이 판명되었으나, 노동운동활성화를 두려워하는 소수 이익집단의 영향으로 해서 야학은 계속적인 탄압을 받게 되었다. 5.18이후 심한 외적 규제 속에 [야협]은 이전까지 고립분산적이어던 야학이 연합활동을 통해 운동성을 갖게 되는 중요한 계기를 맞이한다. 하지만 야학의 성격이나 이념규정이 미흡하고 방향서이 설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당시의 상황을 고려할 때 야협은 야학노동자들의 주체적 참여가 보장되지 않은 협의체 수준에 머물렀다. 노동야학의 교사인 대학생 운동권의 노선문제 등 야학 비판으로 인해 [야협]은 그 해체과정이 5.18이후의 탄압에 의해서라기보다 야학 자체 내의 분열과 힘의 한계로 해체되었다고 보아진다. 90년대 야학은 이전까지 구분이 애매한 검시, 생활, 노동야학에서 탈피하여 교과내용과 운영형식에 따른 외적 구분이 무의미해지고, 자체 야학의 목표와 방향성에 따른 질적 구분인 진보야학과 보수야학의 내적구분이 나타나는 시기이다 .이 둘을 나누는 기준과 성격을 야학이 교육기회를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검시위주 체제로 수업이 이루어지는 보수야학과 민중의 자각과 의식화 교육을 통한 실천의지를 갖게 하는 면과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는 두 가지 측면의 목적을 가진 진보야학이 그것이다. 또한 이시기는 야학의 학생층도 다양해지는 특성이 있다. 기존에 공장의 연소 노동자와 도시의 영세민 자녀층, 경제적 여유가 있는 주부, 장년층과 일반학교에서 적응치 못한 학생이 야학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였다. 앞으로 이러한 현상은 더욱 두드러질 것으로 생각되고 따라서 야학은 교육기회의 제공뿐만 아니라 다른 부분에서도 실생활과 연관되는 새로운 교육과정을 갖추어 나가야 한다고 보여진다. 전북지역 야학 모습 현재 전북지역에서 운영되는 야학은 모두 10개다. 전주에는 운장야학, 한솥야학, 백학야학, 샛별야학, 향토야학, 밀알야학의 6개야학이 운영되고 있었으나, 올해 4월 YWCA에서 운영하던 밀알야학이 학생2명, 교사1명밖에 남지 않아 재정형편상 폐교를 맞아 현재는 5개야학이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이리에서도 90년대 초 4개의 야학이 운영되었으나, 만 2년 만에 2개의 야학이 폐교되고 현재는 무궁화야학과 삼동야학만이 남아있다. 이밖에 정주에 울림야학, 군산에 청소년야학, 또 올해 초에 개교를 한 남원의 햇살야학이 운영되고 있다. 지금의 야학은 학생과 교사간의 열의와 노력으로 서로에 대한 신뢰는 강하나 개인 하나하나의 자기의식과 실천력은 결여된 느낌이 있다. 매년 4월과 8월에 두 번 실시하는 검시는 전북지역에서 총 천여 명이 넘게 응시하고 있지만 합격률은 저조하며 그들이 처한 현실에는 도움이 되지 못하고 상급학교 진학은 상상할 수 없으며 학력취득이라는 자기만족밖에는 얻을 수 없다. 거의 80년대에 생겨나 대부분 검시를 위주로 하는 이들 야학은 현실의 구조적 모순을 자각하고 의식화 교육을 실천해야 한다는 방향성에 대해서는 거의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실제로 한 야학에서는 검시과목외에 매일 한 시간씩 교양을 위주로 한 생활과목(컴퓨터, 일반상식)과 역사의식고취를 위한 현대사 수업을 실시한다. 이러한 시도는 검시야학 일반의 형태에 진보야학으로서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한 예로 볼 수 있다. 이전부터 전북지역에서는 야학의 공동성 회복을 위한 노력들이 펼쳐지고 있었다. 각 야학의 활동이 개별화, 고립화되어 가면서 각 야학 사정이 점점 더 어려워지게 된 야학 내부에서는 서로간의 연대에 필요성을 느끼고 산발적으로 계속해서 모임을 가졌던 것이다. 모임의 형태는 주로 각 야학 전체대표가 모이는 교무주임회의와 매년 열리는 야학연합체육대회로 이루어졌으며 이것을 결국 93년11월, 각 야학 대표자들이 모요 만든 [전북 야학 협의회](이하 야협)로 결실을 보게 되었다. ꡒ야학간 모임체의 결성과 활동에는 교사의 역할이 주도적임을 절감하면서 전북지역 야학교사들 모두가 참여하는 모악산 등반대회를 가졌으나 3개야학만이 참가하는 소수의 행사로 그치고 말았습니다. [야협]의 결성당시 열의는 높았으나 그간의 활동은 각 야학의 현실적인 문제들로 부진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ꡓ 현재[야협]의 의장야학을 맞고 있는 전주 한솔야학 교무주임 박태진(전북대 의예과2)씨의 말이다. 이처럼 아직 [야협]은 성립초기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각 야학을 하나의 힘으로 엮어내는 결집체로서는 많이 부족한 게 사실이다. 그것은 개별야학이 갖는 성격과 활동, 설립자의 특수성(종교단체에서 설립했을 경우), 구성원 등에 따른 현실적인 제약들과 [야협]에 대한 필요와 요구만 있을 뿐 야학내부적인 교사확보의 문제와 관련한, [야협]에 전담할 교사의 절대적 부족에 기인한다. 사실상 교사들은 학생들과의 수업 외에도 야학행사, 소식지 발간, 신입교사교육 등 야학내 일처리들로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고, 하루하루 부딪치는 학생 문제에도 과도한 소모를 하기 때문이다. [야협]은 그러한 현실을 딛고 만들어낸 야학 공동의 시도이기에 각 야학의 교사들이 주체적 참여를 이루고 결속을 다질 수 있도록 토론을 통해 공동으로 해결점을 모색해 나가야 하리란 생각이다. 그리고 그 준비모임의 역할을 현 [야협]이 꾸준히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 활동 전반에 대한 체계조차 이루어내지 못하고 구속력조차 미비한 단계로 학생 250여명(현재 기준)의 거대한 하나의 통일체(연합)로서 사회구조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야학 스스로의 주체적인 참여 속에 움직이는 [야협]의 발전상을 기대해 본다. 전북지역 야학이 전국으로, 전국이 다시 지역으로 상호 공동성을 이룩하는 야학연합은 앞으로 각 야학의 준비모임격인 [야협]의 기초위에 넓게 바라보아야 하는 과제로 남아있다. ● 한솔야학 교사 신형우씨 ꡒ당시 전북지역 야학의 형태는 종교단체나 사회단체에서 운영하는 거시야학이 대부분이였고 그런 야학의 모습은 실질적으로 야학의 발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학생이나 교사가 자주성을 가지고 있어야만이 보다 더 발전된 야학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서입니다.ꡓ 현재 한솔야학교사로 활동하고 있는 신형우(37세)씨는 대학 4학년 때 노동운동을 하기로 결심하면서, 친구 노경훈(한솔1기 교사)씨의 제의로 야학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동부시장의 허름한 2층 공간에서 칸막이 하나로 교실과 교무실을 분리해, 89년 문을 연 한솔야간학교는 한마음, 한뜻, 한 가족이라는 교훈을 그대로 실천하며 어느덧 4년째로 접어들고 있다. 개교당시 1명의 학생으로 시작한 야학이, 지금은 30명이 훨씬 넘고 초, 중, 고 과정의 4개 반이 모두 수료되는 명실상부한 야간 학교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이다. 벌써 몇 년째 야학에서 매주 월요일 1시간씩 현대사 수업을 하는 그는 학생들에게 올바른 역사의식을 심어주는 것이야말로 현재 자신의 존재에 대한 정체성을 회복시켜주는 행위라고 말한다. ꡒ논리나 판단, 경험, 그 밖의 모든 것이 부족한 우리지만 다만 성실하게 실천해 왔던 작은 경험들이 우리 자신 뿐 아니라 열심히 살아가는 다른 이들에게 용기를 주고 희망이 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겠지요ꡓ 한솔야학 1기교사로 같이 고생했던 동기와 결혼 해 딸 하나를 두고 있는 그는 딸의 이름이 ꡐ나라ꡑ이기 때문에 가끔 ꡒ우리 ꡐ나라ꡑ 잘 있어요?ꡓ ꡒ나라가 많이 아프다면서요?ꡓ하는 농담을 곧잘 들으며 웃음 짓곤 한다. 4년여를 지나는 동안 신형우씨는 한솔야학이 보다 발전된 모습으로 여러 대중사업의 장속에서 함께 할 수 있는 계획을 세워두고 있다. 야간 뿐 아니라 주간학교 개설, 강좌, 야학내의 노래패 활동, 무엇보다도 야학의 독서공간을 글방형태로 운영해 더욱 많은 사람들이 함께하는 공간으로서 야학을 확대할 계획을 그는 지금 조심스레 시도하려 한다. ● 삼송야학 학생 송정주씨 ꡒ어렸을 때부터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참 많이 했었어요. 주위에서 공부하는 친구들을 보면 너무너무 부러워 집에서 몰래 울기도 했구요ꡓ 송정주(23세)는 국민학교 4학년 때 학교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고 이 세상에는 여동생과 자신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야학에서 항상 밝은 미소를 잃지 않는 정주는 여전히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었다. 벌써 1년이 넘은 야학생활이 정주에게는 가장 큰 기쁨이여서 일요일도 야학행사라면 빠지지 않고 꼭 참석하는 열성을 보인다고 한다. ꡒ공장 기숙사에 들어가려고 해도 시간이 맞지가 않아요. 기숙사 문 닫는 시간이 10시 30분이라 야학 마치고 가려면 힘들거든요ꡓ 올해 3년째 이리 쌍방울에서 일하고 있는 정주는 머지않아 대입검정고시(고등과정)를 합격할 날을 생각하면 지금 하는 일들이 전혀 고되거나 힘들지 않다. 힘들더라도 자기가 노력하면 꼭 이룰 수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 19살인 정주의 동생도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이리여고 야간을 다니며 어렵게 공부하고 있다. 이리 평화동에서의 자취 생활을 얘기하며 동생을 말을 듣지 않아 속상하다고 하는 정주의 모습에서 동생을 걱정하는 어른스러움이 엿보였다. ꡒ야학은 사회 속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인간적인 정이 있어서 좋아요. 회사에서 속상한 일이 있어도 야학에만 오면 마음이 편해지고 아줌마들이랑 동생들이랑 같이 얘기하면 금세 속상했던 일도 까맣게 잊어버려요ꡓ 지난 8월. 중등과정 검시를 합격하고 지금은 고등학교 과정을 공부하고 있는 정주는 어려운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장래의 꿈을 키우며 이리 삼송야학에서 부학생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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