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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9 | [문화저널]
낮은 음역의 장중한 음색, 그 텁텁함 -아쟁-
글/심인택 우석대교수 국악과 편집위원 (2004-02-03 11:04:05)
선율을 이끌어가는 악기는 대개가 찰현(擦鉉)악기이다. 흔히 현악기라고 하는데 활을 사용하기 때문에 찰현악기라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라 하겠다. 좋은 선율은 항상 우리의 귀를 맴돌게 되는데 이는 음의 길이를 연주자가 원하는 만큼 길게 또는 짧게 소리를 이어 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율을 표현함에 있어서 찰현악기의 역할이 제일 적격인 듯 하다. 서양에서는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더블 베이스 등 관현악 합주에 이 찰현악기의 편성이 두드러진다. 반면 동양에서는 관악기 중에서도 목관 악기가 선율을 주도하기 때문에 반대로 찰현악기의 역할이 오히려 관악기의 선율을 받쳐주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과거에는 아쟁이나 해금 등의 찰현악기가 관악합주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악기로 간주되어 관악기 편성에 포함되어 있다. 오늘날 동양에서는 찰현악기의 역할이 강조되고 있다. 특히 중국에서는 해금과 비슷한 찰현악기인 ꡐ얼후(二潮)ꡑ가 주 선율을 담당하고 있고 전체적인 악기 편성에서도 ꡐ얼후ꡑ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몽고도 역시 마두금(馬頭琴)이라는 2줄의 찰현악기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에 만들어지는 관현악곡은 아쟁이나 해금의 편성이 많아야 전체적인 음향이나 음량에 조화로움을 느끼게 한다. 이로 보면 악기편성도 시대에 따라 달라짐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아쟁이라는 악기는 동양에 오직 우리나라만 갖고 있는 악기이다. 기록을 보면 고려시대에 들어와 당악계통의 음악에 사용되다가 조선 초기부터는 향악에도 편성되어 제례악, 행악, 연례악 등 두루 사용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 아쟁은 다른 관악기에 비하여 한 옥타브 아래 음을 내고 있는데 저음의 그윽하고 토속적인 음색을 갖고 있어서 친근한 맛을 풍기고 있다. 전통음악에서는 대개가 해금연주자 중에서 아쟁을 연주하였으며 지금도 아쟁은 해금악보와 해금연주가가 연주를 맡고 있다. 그러니까 해금을 연주하는 사람만이 아쟁을 할 수 있고 아쟁만 공부한 사람은 합주에 같이 연주를 할 수 없다. 특히 관악합주에서 아쟁의 소리는 대금 피리의 소리가 끊어지는 부분을 바로 해금과 함께 이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아쟁을 만드는 재료로는 오동나무로 얇게 둥근판을 만들어 위에 대는 북판으로 사용하고 밤나무로 얇게 밑에 대는 등판을 만들어 납작하고 긴 상자모양의 공명통을 짠 다음(풍류가야금보다 조금 더 큼) 북판 위에 명주실 7개를 걸고 기러기 발 모양의 안족을 고여 음을 고른 다음 송진을 바른 개나리 막대기로 줄을 켜서 소리를 낸다. 연주할 때는 악기를 앞에 놓고 앉아 은손으로 개나리 활대를 들고 줄을 켜고 왼손가락으로는 안족의 왼편줄 위를 가야금과 같이 눌러 음을 조절하는데 농현을 하여 음을 떨거나 흘러내리게 한다. 이때 소리는 낮은 음역의 장중한 음색을 내는데 소리는 텁텁한 편이다. 전통음악에서 이 아쟁의 위치는 항상 맨 앞에 홀로 앉아 연주하고, 큰 행사에서는 둘 셋이 한 줄로 앉아 연주하게 되는데 다른 악기보다도 많은 사람의 시선과 조명을 받게 되어 있다. 악기가 크기 때문에 악보를 보기 위하여 보면대를 놓아도 손이 미치지 못하고 부득이 악곡을 외우지 않으면 안 되는 불편이 있으며, 또 연주가 끝난 후 퇴장할 때도 악기가 크고 무겁기 때문에 연주자들은 힘이 든다. 이 아쟁의 특이한 점은 저음 악기이면서도 맨 앞에 자리를 잡게 한 까닭이다. 일반적으로 저음악기는 뒤에 배치하는 것이 통상적인 편성법인데도 오직 이 아쟁을 앞으로 앉게 한 이유는 아마 연주단 악기배치의 그림도 신경을 쓴 듯하고 이 악기가 연주하는 악곡의 선율이 대개가 관악선율을 연주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7줄의 궁중음악에서 연주되던 아쟁에 관한 이야기이다. 우리나라 악기 중 악기 개량에 성공한 것이 바로 아쟁이다 .아쟁은 7줄의 아쟁에서 9줄의 아쟁으로 다음으로는 산조아쟁의 출현으로 오늘날 많은 아쟁 애호가를 낳게 되었다. 입체창이 움직임이 없이 소리를 하지만 창극은 종합예술로서 악가무의 형태를 갖추어 무대에 오르게 되는데 이때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이 반주악기의 음량이었다. 창극무대에 반주악기로 가야금, 대금, 해금 등이 사용되었지만 그 당시 야외무대가 대부분이고 오늘날 같이 음향시설이 안되어 있기에 말이 창극반주이지 음량은 거의 들리지 않는 상태였다. 일제시대 때 박성옥이라는 유명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창극반주를 잘했다고 한다. 그는 창극반주를 통하여 항상 느껴온 음량에 대하여 많은 고민을 하다가 어느 날 우연히 가야금에 바이올린 활을 사용하여 연주해보니 음량이 배 이상 커지는 것을 보고 오늘날의 산조아쟁을 만들게 되었다. 동학농민혁명 이후 민간음악이 두각을 나타내면서 우리 음악은 계면조의 3음 중심으로 흐르고 있었는데 바로 박성옥이 이러한 부분을 과감히 악기 개량과 함께 음계에까지도 적용하여 일제의 한을 산조아쟁에 얹게 되었고 이 악기는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현재는 가장 사랑받는 악기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후 산조아쟁은 창극반주는 물론 무용반주, 민요반주, 시나위, 대풍류 등에 사용되었고 기존의 아쟁은 궁중 음악 중심에서 창작음악으로 산조아쟁은 민간음악 중심으로 반전하게 되고 오늘날은 조율법을 음악에 따라 고쳐 창작음악 중 관현악에 사용되는데 해금은 고음, 산조아쟁은 중간음, 기존의 아쟁은 저음에 맞도록 작곡되어지고 있다. 이로 보면 동양에서 유일하게 우리나라만 찰현악기인 이 세악기(해금, 아쟁, 산조아쟁)가 크게 활용되고 있어서 우리음악의 풍부한 음량과 음색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으며 특히 산조아쟁은 시대적으로 일제의 억압 속에서 만들어진 악기이기에 더욱 일제시대의 우리민족의 아픔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최초의 아쟁산조는 1946년 정철호가 만들었고, 그 후 한일섭도 아쟁산조를 만들고, 장월중선도 만들었으며 최근에는 서용석도 아쟁산조를 만들어 연주하고 있다 . 현재 아쟁산조의 명 연주가로는 윤윤석, 한일섭의 제자 박종선, 장원중선의 제자 김일구가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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