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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9 | [특집]
언론의 김일성 사망 보도ꡐ히스테리ꡑ
글/강준만 전북대교수 신문방송학과 (2004-02-03 11:07:40)
언론의 ꡐ매카시즘ꡑ상술 ꡒ평양 시민들 집단 히스테리ꡓ 『조선일보』의 7월10일치 3면 머리기사의 제목이다 뭐가 잘못돼 다음 판부터는 바꾸었는지 모르지만, 사회면 머리기사 초판 제목은 ꡒ김일성 죽었다 시민 환성ꡓ이었다. 『조선일보』는 사설을 통해서도 북한 주민들을 ꡒ『김일성교』에 최면 되어 울부짖는 광신자들ꡓ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 주민들의 히스테리나 발광보다는 우리 언론의 히스테리와 발광이 훨씬 더 심한 것 같다. 아니 ꡐ우리 언론ꡑ이라고 싸잡아 이야기할 건 아니다. 히스테리와 발광에 있어선 단언『조선일보』의 활약이 돋보인다. 북한 보도에 관한 한, 『조선일보』가 북 치고 장구 치면 다른 신문들은 그 뒤를 졸졸 따르는 게 이젠 아예 공식처럼 자리를 잡았다. 『조선일보』 김일성을 김일성주석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시비를 걸고 있다. 7월 11일치 사설은 김일성에게 ꡐ주석ꡑ이라는 호칭은 가당치 않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한 가지 사례를 더 소개한 뒤 이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일부 민주당 의원들이 국회에서 김일성장례식에 조문 사절을 파견하는 문제를 거론하였던 모양이다. 『조선일보』는 이에 반대 입장을 취하였다. 필자역시 다른 이유에서이지만 그 입장에 동의한다. 그러나 절대로 동의 할 수 없는 건 『조선일보』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이다 . 『조선일보』7월13일치 ꡐ기자수첩ꡑ은 일부 의원들의 ꡐ조문사절론ꡑ을 ꡒ주체사상을 콧잔등에 바르고 다니면서 어른들의 속을 썩이는 일부 철없는 풋내기 학생들과 동열에ꡓ서는 걸로 간주하는 폭언을 하고 있다. 사설의 맞장구도 기가 막히다. 사설은 그 의원들을 심판해야 하며, 그건 ꡒ다음번 선거 때 이들을 선출한 선거구 유권자들의 몫ꡓ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실로 소름끼치는 히스테리요 발광이 아닐 수 없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겠다는 그 독선이『조선일보』가 증오하는 김일성의 독선과 무엇이 아른 건지 도무지 이해할 길이 없다. 하긴 다른 점이 있긴 하다. 『조선일보』는 언어폭력은 쓸망정 물리적인 폭력은 쓰지 않으니까 그 점에 있어선 김일성과는 분명히 구별되어야 할 것이다. 이 두 가지 사례는 결코 예외적인 것이 아니다. 『조선일보』의 김일성 사망에 관한 모든 보도와 논쟁이 그런 시각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그 점에 있어서만큼은 철저한 일관성을 갖고 있다. 그런데 전혀 일관성이 없는 건 ꡐ7.4남북 공동성명ꡑ이래로 계속되어 온 ꡐ남북대화ꡑ에 관한 . 『조선일보』의 태도다. 죽은 김일성에 대해서도 주석이라는 호칭을 써선 안 되고 조문사절을 보내는 것이 . 『조선일보』의 주장대로 ꡒ우리 체제에 대한 모욕ꡓ이라면 남북대화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며, 과거 정부의 모든 남북대화 노력은 반국가적 범죄에 해당된다는 자가당착에 빠지게 된다. 북진동일을 주장한 이승만 대통령을 제외하고, 북한을 대등한 대화 파트너로 인정했던 모든 역대 대통령들은『조선일보』가 못 잡아먹어 안달하는 ꡐ친북 운동권ꡑ에 다름 아닌 것이다. 생각해보자. 대화라는 게 도대체 무언가? . 『조선일보』는 김일성이 ꡒ분단의 장본인이며 동족상잔의 전범ꡓ이기 때문에 ꡐ주석ꡑ이라는 호칭을 붙여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 주장 자체에 시비를 걸 생각은 없다. 문제는 ꡐ전범ꡑ과 대화가 가능하냐 이말이다. ꡐ전범ꡑ은 붙잡아 처벌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그게 가능하냐 이말이다. 우리는 일본의 ꡐ전범ꡑ들을 어떻게 했는가? 또 광주에서 대학살을 저지른 범죄자들은 어떻게 했는가? 누가 국가안보를 위협하는가? 만약『조선일보』가 일관성을 가지려면 일본고의 수교를 중단하고, 광주 학살의 원흉들을 처벌하자는 주장을 해야 옳다. 만약 『조선일보』가 일관성을 가지려면 일체의 남북대화에 무조건 반대하고 북진 통일을 주장해야 옳다. 불구대천의 원수가 어디 김일성 하나뿐인가? 그러나『조선일보』는 그런 주장을 한 적이 없다. 그렇게 했다간 신문 독자들이 모두 떨어져 나갈 것을 염려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조선일보』는 비상한 시기에 대중심리의 부정적인 측면을 발굴해내 부추기고 불을 지름으로써 신문을 한 부라도 더 팔아먹는 데에만 관심이 있는 건지도 모른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50년대 초반 미국에서 매카시즘의 장본인인 상원의원 매카시가 큰 힘을 쓸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언론의 장삿속을 잘 꿰뚫어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돈버는 데에 눈이 먼 상업적인 언론이 가장 좋아하는 4대 주체는 ꡐ섹스ꡑ ꡐ폭력ꡑ ꡐ공포ꡑ ꡐ증오ꡑ다. 매카시즘은 ꡐ공포ꡑ와 ꡐ증오ꡑ라고 하는 먹이를 언론에게 끊임없이 공급해준다. 우리 언론은 김일성 사망 이전엔 주로 ꡐ공포의 드라마ꡑ를 팔아먹었고, 사망 이후엔 ꡐ증오의 드라마ꡑ를 팔아먹고 있다. 정보를 수집하느라 돈을 쓸 필요도 없는데다 위험 보담도 전혀 없으니, 그거야말로 ꡐ꿩 먹고 알 먹는ꡑ 장사다. 남북문제에 관한 한 아무리 악의적인 사실 왜곡과 날조를 일삼더라도, 아무리 히스테리를 부리고 발광을 하는 식의 해설과 논평을 한다 하더라도 책임질 일이 전혀 없다. 주가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하겠는가? 또 북한에 대해선 언론이든 누구든 모르긴 다 마찬가지이니 잘못했다고 지적을 받은 일도 없다. 정말이지 이래선 안 된다. 지금 언론은 국가안보를 돕는 게 아니라 국가 안보를 해치는 암적인 존재가 되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다. 일국의 국회의원이 역대 정권이 추진해 온 남북대화의 연장선상에서, 외교의 차원에서, 북한에 조문사절을 보내자는 말을 했다고, 언론이 온갖 폭언을 퍼붓다니 도대체 그게 말이나 되는가. 지금 언론이 하는 짓은 가장 악랄한 형태의 매카시즘이다. 매카시즘은 결코 반공이 아니다. 미국에서도 매카시에 대해 FBI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ꡒ매카시는 반공의 명분에 해를 입혔으며, 많은 자유주의자들로 하여금 공산주의 활동을 위축시키려고 하는 정당한 노력에 대해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지금 우리 언론이 하는 짓이 꼭 그 짓이다. 우리 사회가 국회의원조차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말할 수 없는 사회이며, 언론이 그런 사회를 만들기 위해 발 벗고 나선다면, 반공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하는 것인가? 지금 우리의 국가안보를 가장 좀먹고 있는 세력은 바로 언론인 것이다. 그 점에 관한 한 언론은 한결같다. 최근 철도 파업, 북한 핵 위기, 남북 정상회담, 김일성 사망, 조문 논란, 한총련의 배후 파문 등으로 이어진 일련의 사태에 관한 언론 보도는 언론에 대해 절망감마저 느끼게 한다. 두말할 필요 없이,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다양한 의견이 존중되어야 하며, 언론은 그 다양한 의견을 공정하게 전해야 한다. 설사 언론이 특정 의견을 부각시킨다해도, 다른 의견을 매도해서는 안 된다. 설사 언론이 다른 의견을 매도한다 해도, 그건 사설이 아닌 기사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우리 언론은 사실과 의견을 구분하는 시늉조차 내지 않은 채 아예 노골적인 캠페인을 전개하고 있다. 박홍총장의 발언에 대해서도 단순한 사실 보도에 머무르지 않고 ꡒ박 총장을 사회가 보호해야 한다ꡓ느니 ꡒ제2의 박 총장이 필요하다ꡓ느니 하는 캠페인을 전개했다. 지금 우리 언론의 문제는 결코 공정성의 문제가 아니다. 근본적인 형식과 틀의 문제인 것이다. 신문인가, 광고지인가? 현재 우리 언론은 어떤 의미에서든 결코 정상이 아니다. 신문 지면에서 광고가 차지하는 비율은 기사량을 압도하고 있다. 광고가 50%를 넘어서는 바람에 철도요금 분류에서 아예 신문 잡지가 대상인 3종 우편물 대상에서 제외되기까지 했다. 이게 도대체 신문인가, 광고지인가? 정말이지 우리 국민은 어지간히 착하고 무던한 사람들이다. 신문들이 그런 뻔뻔한 짓을 일삼는데도 그 어느 지역에서도 무더기로 신문구독을 취소했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광고량 비율이 가장 많은『조선일보』의 경우 지난해에 2천 4백 18억원의 매출액을 기록해 법인세로만 1백 43억 9천7백만 원을 냈다. 세금을 많이 낸 건 칭찬할 만한 일이긴 한데,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언론이 이윤 추구를 절대적인 존립 근거로 삼는 다른 기억들과 무엇이 다른가? 한 가지 다른 것이 있긴 하다. 다른 업종엔 불황이란 것이 있어도 언론 기업에겐 불황이란 것이 없다. 다른 산업에선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의 초고속 성장을 매년 거듭하고 있다. 그것만이 다를 뿐이다. 그러한 초고속 성장에 브레이크가 걸리긴 힘들다. 신문들이 담합하여 사납게 달려들기 때문이다. 지난 4월에 벌어졌던 문화방송과 신문들 사이의 ꡐ전쟁ꡑ도 그래서 일어난 것이다. 방송사들이 광고 시간은 늘리겠다고 했더니 광고시장을 빼앗길 걸 두려워 한 신문들은 일제히 반격에 나서고, 참다못한 문화방송이 ꡒ너희들은 얼마나 깨끗하냐ꡓ며 신문들의 광고 비리를 연 5일에 걸쳐 폭로하고 나선 것이다. 언론, 이대로 좋은가? 오직 돈벌이에만 혈안이 된 신문들이 우리 사회의 여론을 좌지우지하게 내버려 두어도 괜찮은 것인가? 언론이 우리 사회에 대해 보도하고 주장하는 것들이 겉으로는 다 그럴 듯 해 보이지만, 그 이면엔 언론기업의 안전과 번영을 위한 계산이 도사리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그건 참으로 소름끼치는 일이 아닌가. 특히『조선일보』의 경우처럼 상업성과 이념성을 동시에 철저하게 추구하는 신문이 번영을 누리고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의 언론시장이 얼마나 왜곡돼 있는가를 잘 웅변해 주고 있다. 극단적인 이념 공세가 상업적 장치에 의해 은폐되고 미화되며, 그렇게 가공된 이념 자체가 팔아먹을 수 있는 상품이 되는 사회는 그 어떤 특정 이념을 드러내놓고 숭배하는 사회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 그건 대중이 조작당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언론은 개혁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방법에 있어서 모든 언론을 싸잡아 비판하기보다는 가장 비정상적인 언론을 집중적으로 비판해 그 파급효과를 기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 어떤 신문이든 상업성과 이념성중 양자택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게끔 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언론개혁의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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