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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9 | [특집]
떠나는 절망, 그러나 지키는 희망이 있다 -올해 서른다섯, 농민 김배수-
글/원도연 문화저널 편집장 (2004-02-03 11:08:25)
고창군 성송면 하고리 남창마을. 올해 서른다섯의 농민 김배수 씨의 하루는 6시에 시작된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그는 곧장 집 앞의 우사로 달려간다. 그곳 우사에는 그의 꿈이자 희망이며 그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젖소 열세마리가 그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의 집은 남창마을의 남쪽 끝 외진 곳에 조립식으로 지어져 있다. 본래 두마지기가 조금 넘는 논이었던 이곳에 터를 잡고 입식 주방에 방 세 칸을 들이고 수세식 화장실까지 꾸며 조립(?)해 놓은 것은 작년의 일이었다. 같은 마을에 나이 드신 노모가 살고 계시고 그 노모로부터 떨어져 나와 이렇게 딴 살림을 차림에는 그만한 사연이 있다. 그 집 바로 앞에 우사가 있다. 우사의 슬레트 지붕이 너끈히 4-5미터쯤은 되보일 정도로 높고 그 뒤로 젖소가 뛰어놀만한 널찍한 공터가 있고 또 그 뒤에는 50평짜리 하우스 골조가 뭔가 주인의 쓰임새를 기다리고 있다. 우사와 하우스 골조를 마주보면서 한창 생기 넘치게 자라나는 논들과 야트막한 야산들이 보이고 또 그 뒤로는 13호 태풍 브렌든의 영향권에 있다는 하늘이 잔뜩 찌푸려 있다. 우사 바로 옆은 그 젖소의 사료로 쓴다는 나이가라스가 잡초처럼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그 어느 것 하나도 이유 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고 그 하나하나가 모두 치열한 삶의 현장들이다. 악몽 같았던 가뭄 태풍과 함께 비가 쏟아지기 전에 이곳 고창을 찾아온 몇 십 년만의 극심한 가뭄은 지독한 것이었다. 수리시설이 극히 빈약한 전형적인 천수답지역인 고창은 다른 지역보다도 가뭄의 피해가 더욱 컸다. 7월 한 달 동안 그는 거의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하루 한 시간을 채 방바닥에 누워보지 못하고 논바닥을 들여다보아야 했고 동네를 흐르는 개울바닥은 포크레인으로 샅샅이 파헤쳐졌다. 모터를 들이밀고 논에 물을 대놓고는 잠시 숨을 돌리다가도 혹시 물이 바닥나서 모터가 타버릴까 다시 논으로 달려가곤 하는 악몽 같은 시간들이었다. 개울바닥을 파고 또 파고 이제 그 물도 거의 말라버릴 즈음에 딱 한 달 만에 비가 쏟아졌다. 지독한 무더위였지만 좋았던 일조량 덕분에 그 고비를 넘긴 논들을 그 여느 해보다도 좋은 작황이 예상되고 또 다들 대풍이라고 말하지만 그의 더 큰 기쁨은 논농사보다는 이 더위를 옹케 이겨낸 젖소들이었다. 본래 젖소는 추위에 강하고 더위에 약한 것으로 정평 나 있고 실제로 이번 더위에 많은 젖소들이 폐사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젖소들이 그나마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아직 젖을 짜내지 않은 처녀소들이었기 때문이지만 그 더위 동안 그의 가슴 졸임은 누구도 모르는 것이었다. 젖소들을 꼼꼼히 살펴보고서 늦은 아침을 먹은 그는 논으로 나간다. 트럭을 몰고 10여분 정도 남쪽으로 달리면 그의 논이 나온다. 그가 올해 짓는 농사는 모두 47마지기다. 그중에 자기 논은 모두 13마지기고 나머지는 형님들의 논이다. 그의 형님들은 모두가 도시로 나가 큰 성공을 했다. 8남매 중에 일곱째인 그만이 이곳에 남아 농사를 짓고 있지만 그에게 후회는 없다. 남들은 형님들이 다들 도시에서 큰 성공을 했으니 그토록 어렵게 살 필요가 있느냐고 말들 하지만 그는 그만의 길이 다르고 해야 할 일이 따로 있다고 믿는 것이다. 한 달간의 서울생활 그가 처음 농사를 짓고 살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두 달이 지난 후였다. 그에게도 서울 생활은 있었다. 인근의 인문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는 한 달 동안 서울에 올라가 있었다. 공부를 좀더 해보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는 서울에서의 한 달 동안 밤마다 신사동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서울이라는 곳을 유심히 관찰했다. 그러나 서울은 사람이 살기에는 너무 냉정한 곳이었다. 한 달간의 서울 관찰을 마치고 그는 이곳으로 돌아왔다. 돌아와서 곧바로 농사일을 배우고 4H활동을 시작하면서 전국 곳곳의 농민교육을 부지런히 받으러 다녔다. 이때의 4H경험과 교육경력은 그가 농사를 짓는데 커다란 밑바탕이 되었고, 87년 농어민 후계자로 선정될 때는 직접적인 도움이 되었다. 이곳저곳 품을 팔고 농사를 지으면서 3년 만에 그는 자기 이름 앞으로 된 소를 한 마리 마련했다. 아침저녁으로 커가는 소를 바라보며 사는 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커다란 기쁨이었다. 논농사만으로는 살 수 없다. 올해 그가 선택한 벼는 조생종이다. 남들 보다 조금 먼저 수확을 내고 다른 논에 논일이 한창일 때 기계로 또 한철을 뛰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트랙터 두 대와 콤바인 한대로 벌어들이는 돈은 일년에 천만원가량이다. 그의 일년 수입 2천만원의 거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셈이다. 후계자가 되면서 그도 농협에서 영농자금 칠백만원을 얻어 썼다. 그 이후에도 기계자금으로 천사백만 원을 농협에서 얻어 썼고 그 빚이 그럭저럭 2천만원이 넘어간다. 그도 이제 농촌이 논농사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주변의 몇 안 되는 후배나 친구들도 이제는 논농사를 주업으로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거의가 기계를 직접 다루면서 돈벌이를 하거나 아니면 특별한 기술을 배우거나 특작에 눈을 돌리고 있다. 이제 농사를 짓겠다고 맘먹는 사람이라면 농기계는 필수적으로 다룰 줄 알아야 할뿐만 아니라 반은 기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농사를 지으면서 한마지기 당 기계로 들어가는 비용이 수월찮기 때문이다. 로타리 칠 때 만 삼천 원, 콤바인으로 벼를 벨 때 이만 삼천 원, 쟁기질할 때 만원, 모심을 때 만 삼천 원, 거기에 품삯에 농약 값을 더하면 마지기당 세가마니가 겨우 떨어진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 상황에서 논농사만으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이제 거의 불가능하다. 더구나 우루과이 라운드로 불어 닥칠 변화를 생각하면 농촌은 더욱 더 크게 변해야 한다. 낙농에의 신념을 세우고 배수씨도 이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길이 낙농이었다. 처음 농사일을 시작하고 2년 만에 그는 낙농을 결심했다. 유통기간이 가장 짧고 유통체계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되어있는 것이 낙농이기 때문이다. 물론 소에 대한 남다른 애정도 그 결심에 한몫했다. 그렇데 맘먹고 그는 인근 곳곳에 낮이건 밤이건 낙농을 배우러 다녔다. 젖소가 새끼 낳는다는 소식을 듣고 그것을 보기 위해 한겨울 눈길을 4시간 동안 헤매다 밤 12시가 넘어서 결국 직접 새끼를 받아보았던 일은 그에게 낙농에의 신념을 더욱 확고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가 세운 경제개발 계획은 딱 2년씩 늦어지긴 했지만 목표는 거의 이루어져 가고 있다. 그도 한때는 특작에 손댄 적도 있었다. 농사를 시작하고 처음 내 것으로 만들었던 소를 팔고 89년 하우스에 시금치를 했었다. 옆 동네에 살던 성택이형과 용호형과 그렇게 셋이서 시작한 시금치 작목은 그에게 커다란 교훈을 남겨주었다. 세 사람의 호흡이 맞지 않아 결국 혼자서 하다시피 했던 작목은 겨우 본전을 건지는 정도에 그쳤고 자금은 몽땅 빚으로 남았던 것이다. 떠나는 농촌과 지키는 농촌 농사일을 시작한 이래 많은 그의 친구와 후배들이 농촌을 떠나갔다. 안타깝고 답답했지만 떠나는 발길을 붙들 수는 없었다. 모두 다 성공하고 내려오겠다고 말하지만 그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님은 그도 잘 알고 있다. 정읍농고를 졸업한 종환이라는 후배는 고창에서 정읍까지 근 일년여를 자전거로 통학하면서도 소 한 마리는 너끈히 키워낸 끈기 있는 후배였다. 그랬던 그가 땅이 없어서 농촌을 떠난다고 할 때 그는 너무 견디기 힘들었고 할말이 없었다. 서울로 올라가 오천만원만 만들어서 내려오겠다던 그는 이제 그 목표가 거의 달성됐다고 한다. 내년 봄쯤이면 그 종환이 부부가 내려올 것이라고 그는 믿고 있다. 또 같이 낙농의 꿈을 키우던 송파농장의 후배는 마누라의 꼬드김에 넘어가 서울로 올라가 버렸다. 몇 년 전에 같이 수박특작을 했던 후배는 농사짓는 어머니와 마음이 안맞고 장가를 못가서 서울로 올라갔다. 일 좀 할만한 젊은 사람들은 그렇게 저렇게 이곳을 떠나가지만 그래도 그는 단 한번 흔들린 적이 없었다. 그는 농촌에 더 많은 젊은이들이 남아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것은 농사가 대규모화해야 하고 그러기에 농촌은 너무 좁기 때문이다. 다만 형제처럼 마음붙이고 마을을 일으킬 수 있는 세 명만 있으면 좋겠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조생종 벼가 벌써 이삭을 패고 있다. 다들 괜찮아 보인다. 논에서 나와 보니 벌써 점심 먹을 때가 되었다. 다시 마음은 젖소에게로 간다. 지금쯤 그의 아내가 젖소에게 점심을 주고 있을 것이다. 그는 87년에 결혼을 했다. 10년 넘게 서울서 직장생활을 하던 그녀가 여름 휴가 때 고향에 내려왔다가 그의 눈에 붙잡혔다. 그도 결혼할 때는 조금 거짓말을 해야만 했다. 3년만 농사짓고 도시로 나가자고 했던 것이다. 약속했던 3년이 지나자 틈만 나면 아내는 도시로 나가자고 졸라댔지만 그는 끄떡도 하지 않고 한귀로 흘려버렸다. 젖소를 들여놓고 본격적으로 낙농이 시작되면서 이제는 그의 아내도 마음 한구석에 농사일에 대하나 애정이 생겨난 듯 하다. 다만 걱정이라면 한창 자라나는 두 아들이다. 두 아들이 국민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 이제 교육문제가 심각해지는 것이다 . 그의 꿈은 젖소 100마리 집으로 들어와서 두 아들을 한번 안아주고 다시 소를 보러 나갔다. 내년 봄이면 10마리의 소들로부터 젖을 짜기 시작할 것이다. 젖을 짜게 되면 소키우는 일만도 엄청 바빠질 것이다. 내년부터는 기계일을 거의 놓아야 한다. 소키우는 일도 만만한 것은 아니지만 기계일 보다는 조금 편해질 것이다. 한창 기계일을 할 때면 점심먹을때와 화장실갈때를 빼곤 하루 15시간 이상을 꼬박 기계위에서 살곤 했다. 농약이라도 할 때면 하루 종일 기계위로 날아드는 분재로 숨이 턱턱 막히고 밤엔 잠을 거의 잘 수가 없게 된다. 하루 종일 쪼그려 앉은 무릎은 관절염이 생겨 지금도 찬바람이 불면 무릎이 시어온다. 돈을 버는 것이, 버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 기계일을 조금 접어두고 이제 낙농에 전념해야 하는 것이다. 부부가 할 수 있는 최대두수는 젖소 약 50두 가량이다. 그의 꿈은 젖소 100두까지다. 100두가 되면 목부 한사람을 두고 본격적으로 농장을 해보는 것이다. 그 일에 그는 일생을 걸고 있다. 그의 지론은 농사가 더욱 세분화, 전문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시금치 작목에서 실패를 본 후에 그는 특작을 두 번 더 했다. 후배가 자기 땅을 자꾸 남들에게 내주는 것이 안타까워서 그가 제안을 했었다. 그렇게 해서 해봤던 특작이 바로 수박이었다. 두 차례의 수박특작은 한번은 실패했고 한번은 성공했다. 본래 특작이라는 것이 다분히 투기적인 성격이 있어서 그도 무척 조심스럽게 시작했었다. 첫해에 수박이 성공하고 땅을 바꿔서 했던 두 번째 특작에서는 그만 큰 낭패를 보았다. 토양검정을 거치지 않았던 땅이 수박에 맞지 않았던 것이다. 뿌리부터 차근차근 말라 들어가야 하는 수박이 줄기부터 말라 들어가 수박이 영 자라질 못했던 것이다 그 일이 있고나서 특작은 특작 하는 사람이 해야 한다고 그는 마음을 정했다. 내 갈 길은 낙농이라는 신념도 더욱 굳어졌다. 특작이 더 이상 투기적인 사업이 되지 않고 고정된 작목과 안정된 시장으로 뒷받침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교훈으로 남았다 . 정부의 할일은 그것이었다. 고창항공학교 사건 농사를 짓기로 맘먹고 한번도 후회 없이 한길을 걸어왔지만 그에게도 고통스러웠던 세월이 있었다. 바로 고창항공학교 사건이 그것이었다. 그 일은 아마도 동네가 생긴 이래로 가장 커다란 사건이었을 것이다. 89년에 그의 마을에 낯설은 군일들이 몇 명 왔다 갔다 하면서 항공학교 사건이 시작되었다. 본래 조치원에 있었던 항공학교가 바로 그의 마을로 이전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마을 사람들의 의견이 곧 양분화되었다. 한쪽은 땅을 팔고 도시로 나가자는 사람들이었고, 한쪽은 마을을 지켜야 한다는 쪽이었다 .땅 가진 사람과 갖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생겨났다. 어느 쪽이든 하나로 의견이 모아져야 했다. 그때 새마을 지도자를 맡고 있었던 그는 마을의 의견을 하나로 모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을회의가 열렸고 사람들은 모여서 마을을 지키자고 결의했다. 고창군과 성송면에서 대책위원회가 만들어졌고 남창마을에서도 대책위원회를 만들었다. 그때 자연스럽게 젊고 정의파였던 그가 대책위원장이 되었다. 사람들은 하나로 뭉쳤고 매일 반대 데모가 벌어졌다. 그와 마을 사람들은 그때 조치원으로 현장방문을 갔다. 조치원에는 이미 항공학교가 이전할 경우에 생겨나는 땅값 상승으로 주민들이 똘똘 뭉쳐있었다. 국민학교에 다니는 꼬마들까지 미리 교육받은 대로 대답을 하는 듯 했다. 조치원을 다녀와서 그는 항공학교가 절대로 들어와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굳혔다. 성송면 전체로 봐서도 결코 발전의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마을사람들이 모두 반대투쟁에 나서고 고창군이 들썩거릴 때 즈음에 안면도 사건이 터졌다. 그리고 나서 국회위원 다섯 명이 남창마을을 방문했고 항공학교 이전문제는 결국 없던 일로 되버렸다. 결과적으로 안면도 사건의 덕을 톡톡히 본 셈이었다. 그러나 항공학교 사건은 지금까지도 사람들 기억 속에 남아 그를 괴롭히고 있다. 그 사건 이후에 사람들은 비가 안와도 항공학교 타령이고 장마가 나거나 쌀값이 떨어지거나 농사일이 조금만 힘들어도 항공학교를 떠올렸다. 그때 팔고 나갔어야 했다는 것이다. 항공학교 사건은 동네를 크게 바꿔놓았다. 사람들은 그때일 만 생각하면서 후회와 미련 속에 살고 있고 동네 인심은 사나워져 갔다.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항공학교 사건이 그를 괴롭히고 UR문제가 사람들 사이에 한숨거리가 될 때에도 그는 농사일을 후회하지 않는다. 농사가 정말 괜찮은 직업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한낮의 무더위에 사람도 소도 지칠 무렵이면 그도 무더위를 피해 잠깐 집 앞 그늘에 앉는다. 5살,4살 된 두 아들이 아빠 곁으로 뛰어온다. 부쩍 자라난 두 아들을 보면서 역시 아이들의 교육문제가 화제가 되었다. 그는 두 아들 가운데 하나는 원하기만 한다면 자신의 일을 물려주고 한번 크게 밀어줄 생각이다 자신의 하는 일이 스스로 대견스럽고 아들이 이어받기만 한다면 더 크게 성공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 때문이다. 동네 노인들은 대부분 자식들에게 농사일을 물려준다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한다. 이 지긋지긋한 농사일에 대를 이어 고생시키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다르다 . 그는 이제 농사도 가능한 한 편하게 지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계가 뒷받침되고 자신의 전문영역이 확고해지면 농사일도 전처럼 그렇게 지긋지긋한 것만은 아닌 것이다. 그는 두 아들을 국민학교까지는 이곳에서 보내겠다고 생각한다. 도시에서 배울 수 있는 것보다 여기서 배울 수 있는 것도 있기 때문이다. 큰아들은 벌써 포크레인 기사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나 둘째는 조금 다르다. 둘째는 아빠랑 소를 키우겠다고 말한다 어린 가슴이지만 그는 그런 그의 아들들이 대견하다. 국민학교를 다닐 동안 그는 두 아들을 유심히 관찰할 것이다. 아이들의 적성을 찾아 하고 싶어 하는 일을 시키겠다고 마음먹는다. 만일에 아들들 둘 다 낙농을 이어받지 않겠다면 그는 인근 농고에 다니는 뜻있는 젊은 후배에게 자신의 일을 물려줄 생각도 갖고 있다. 그는 UR도 무섭지 않다. 어차피 올 거라면 맞서 싸워야 하고 그는 그 싸움에서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죽기 아니면 살기인 것이다. 그가 아쉬워하는 것은 농촌의 40대다. 그들의 절망은 생각보다 깊고 넓다. 동네일을 맡아서 이장도 하고 지도자도 해야 하는 그들이지만 40대는 움직이지 않는다. 어쩌면 그들이 20대를 지나왔던 새마을운동 시대가 그들을 절망시켜 버려놓았는지 모른다. 그들도 20대에는 살려고 갖은 노력을 했고 한때는 투지 넘치는 농촌 총각들이었다. 떠나가는 농촌의 20대 뒤에는 그렇듯 절망하고 있는 40대와 농사로부터 어떤 희망도 발견하지 못하는 노인들이 있다. 남창마을의 80%가 바로 60이상의 노인들이다. 40대와 함께 그들이 젊은이들의 등을 떠밀고 있다. 왜 새파랗게 젊은 놈이 이곳 농촌에서 비실거리느냐고. 4년 전 항공학교 사건에 대한 사회조사를 나가서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끝까지 농사를 짓고 살겠노라고 당당하게 말했었다. 그리고 4년이 흘렀고 세상은 변했다. UR이 곧 닥쳐오고 항공학교 후유증으로 동네에서 벼라별 소리를 다 들어야 했던 그에게 도전적으로 물었다. 정말 끝까지 농사를 짓겠느냐고. 그는 우리 밀 이야기를 했다. 쌀이라고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부업이기는 하지만 논농사를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목숨을 건 낙농이 실패해서 우유값이 폭락하면 그는 그 우유를 이웃과 나눠 먹겠다고 말한다. 그에게는 그 흔한 도시생활의 왕년이 없다. UR의 시대. 기로에 선 농촌에서 배수씨는 지금 그 왕년의 때를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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