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2 | [문화시평]
디딤 예술단 “상자속의 사랑 이야기”
겨울을 이겨내게하는 잔잔한 동화
김정수 / 연극인․편집위원(2004-02-03 11:20:44)
극적 긴장을 고조시키다가 느닷없이 한 순간 폭소로 전환시키며, 또 그 웃음들
사이에서도 잔잔히 인간의 삶과 역사를 이야기하는 작가의 능란한 화법은 그의 자유자재한
상상력과 함께 “상자속의 사랑이야기”를 끌어가는 두 개의 수레바퀴가 되고 있다.
현대를 [상실의 시대]를, 현대인을 ‘내면적 고향의 상실자’로 규정한 작가가 인간적
애정과 꿈, 희망의 상실의 원인을 찾아보고 그 대안을 생각해보는 풍자극으로서 가장
적절할 철학적 동화를 택했다는 생각이든다.
예보된 한파였지만 막상 들이 닥치니 생각보다 더한 추위가 섭섭하고 야속했다. 찬바람과 폭설로 한 해를 시작한 사람들의 표정에서 흥겨움이란 왠지 찾아보기 힘들다. 인상되어야할 물가의 품목과 분담해야할 고통도 미리 예보된 상태다.
추위 탓인지 숙취 탓인지, 여하간 상기된 얼굴과 헛헛한 가슴으로 눈발을 헤치고 찾아간 “창작소극장”에서 추위를 녹여주는 따뜻한 연극 한 편을 만날 수 있었다.
<상자속의 사랑이야기> 93년들어 전북연극의 첫 징소리를 낸 작품이다. 지난해 여름 창단되어 뮤지컬 <파랑새>를 창단 공연으로 선보였던 “디딤예술단”이 두 번째 공연으로 선보였던 줄리 파이퍼 작, 안상철 연출의 이 작품을 1월 9일부터 18일까지 “창작소극장”무대 올렸다.
다소 우리에게는 생경한 이름의 작가는 미국의 만화가겸 극작가로 현대사회의 공허난 삶의 양상을 풍자적 기법으로 그리는데 탁월한 작가로 알려져 있다. 70년대 중반 초연된 이 작품은 그의 대표작의 하나로서 자유분망한 동화적 상상력을 바타으로 무미건조한 현대를 사는 우리들이 흔히 망각하는 꿈과 사랑을 경쾌한 리듬으로 일깨워준다. 은퇴한 증권중개사 에이브와 삶의 염증을 가진 음악가 코흔은 사람들이 오지않는 외딴 오두막집에서 살아간다. 그들에게 있어 삶이란 무의미 그 자체이며 그들이 바라보는 세상은 결코 희망적인 모습일 수가 없다. 패배와 나태, 좌절과 자기혐오의 돌이켜 보고 싶지 않은 옛날의 기억일 뿐이다.
그 두남자의 일상은 끝없는 게으름과 의미없는 말장난, 적당히 서로를 상처내는 등 맹목적인 적개심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그러한 그들에게 어느날 예기치 않았던 사건이 발생한다. 우연히 요정을 소재로 말씨름을 하던 중 잘못 중얼거린 소원이 이루어지는 특이한 상황을 맞게 되고, 당황하여 정신을 차릴 수 없는 뒤틀린 현상들 속에서 쟌다크가 나타난다.
쟌다크는 동화적 상상과 역사적 사실이 혼합된 인물로 에이브와 코혼을 하늘로 데려가기 위한 사명을 띠고 왔다고 주장한다. 그녀가 그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오두막에서 함께 기거하면서, 에이브와 코혼은 스스로 삶의 변화를 경험하게 되고 결국은 쟌다크의 숭고한 희생을 발판으로 두 사내는 힘찬 삶을 위해 다시 달려나간다는 것이 이 <상자속의 사랑이야기>의 대략의 줄거리이다.
이 작품 안에는 현실적 인물과 환상적 인물이 공존하고 있다. 에이브와 코혼이 현실속의 인물이라면 쟌다크와 와이즈맨은 신비스러울 수 밖에 없는 상상 속의 인물이다. 신데렐라가 환생한 아름다운 쟌다크와 좌충우돌 긴장과 웃음을 몰고다니는 와이즈맨은 작가 파이퍼의 반짝이는 만화가적 기질을 무대 위에 잘 반영시키는 인물로서 나른한 분위기의 현실에 입체적인 생동감을 불어넣어주고 있다.
극적 긴장을 고조시키다가 느닷없이 한 순간 폭소로 전환시키며, 또 그 웃음들 사이에서도 잔잔히 인간의 삶과 역사를 이야기하는 작가의 능란한 화볍은 그의 자유자재한 상상력과 함께 “상자속의 사랑이야기”를 끌어가는 두 개의 수레바퀴가 되고 있다. 현대를 “상실의 시대”로, 현대인을 ‘내면적 고향의 상실자’로 규정한 작가가 인간적 애정과 꿈, 희망의 상실의 원인을 찾아보고 그 대안을 생각해보는 풍자극으로서 가장 적절한 철학적 동화를 택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 “디딤예술단”의 공연은 깔끔한 조명처리와 신선한 음악이 무엇보다 먼저 가슴에 와 닿았다. 특히 현장에서의 기타반주와 노래는 작품과 독립시켜놓고 감상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아기자기한 감동을 주었으며 뮤지컬 전문극단다운 발전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전체를 통해 무리없이 흘렀던 조명도 마지막 쟌다크의 승천 장면에서는 소극장의 좁은 무대라는 사실을 잊게할 정도로 화사한 절정을 느끼게했다.
전반적으로 짜임새 있는 전형적 소극장 소품으로 관극의 즐거움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공연이었지만 전반부의 두 사내의 일상이 확연히 관객에게 전달되지 않은 점과, 쟌다크를 통해 결정적 전환을 맞는 의식이 구체화되어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 아쉬웠다. 또 대부분 다른 극단에서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는 부족한 인적 자원탓에 적절할 배역선정을 하지 못했다는 점이 눈에 띄었다.
일례로 에이브 역을 맡은 정상식씨의 경우, 오랜 무대 경험으로 연기경력을 쌓아온 배우지만 외관상 적역을 연기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반면에 신인급 연기자들의 빠른 적응과 성장은 돋보였다. 특히 와이즈맨 역의 소조영은 과장되기 쉬운 배역을 적절히 다스려 소화시킴으로써 나이를 의심할 만큼 천연덕스럽게 안정된 연기를 보여 주었다.
그러나 이러저러한 부족함을 상쇄하고도 남을. 작품 전체에 깔린 젊은 패기와 열정은 단연 <상자속의 사랑이야기>를 성공적으로 완성시켰다. 다시 찬바람 속에 몸을 내맡겼을지라도 가슴속에 훈훈함이 남아 있음은 이를 우회적으로 증명하는 증거가 분명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