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10 | [교사일기]
학교가 살면 농촌이 산다
농촌학교 폐교의 실태
글/장위현 순창동계국민학교 교사
(2004-02-03 11:21:06)
나는 69년 교직을 시작한 뒤 25년간을 농촌지역 학교에 줄곧 근무하고 있다. 읍소지에서 1년, 면소재지 지역에서 5년 근무한 것을 빼면 19년간을 면소재지 이하인 오지학교에서 근무한 셈이다. 그 동안 근무한 학교가 일곱 곳인데 그 중에서 다섯 개 학교가 몇 년 사이 폐교 되었다. 내가 이렇게 농촌학교에만 줄곧 근무하게 된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거나 어떤 사명감 같은 것 때문만은 아니며 형편상 다들 도시로 전출하는 틈에 끼지 못하였다. 그러다 보니 70년대 초부터 지금까지 시골 학교의 변해가는 모습들을 빼놓지 않고 볼 수 있는 기회가 된 셈이다.
70년대 초만 해도 시골 마을마다 사람들이 북적이고 조금만 큰 마을이면 새로운 국민학교가 생길 정도로 농촌의 인구가 많았으나 불과 10여년이 지나면서부터 농촌 사람들의 도시 진출이 늘어나 학생들의 감소도 해가 지날수록 급격히 심해져 해마다 많은 국민학교들이 문을 닫고 있다. 이대로 간다면 얼마가지 않아 농촌에 있는 학교들은 거의 문을 닫아 학교는 도시에만 있을 것이고 농촌은 농사만을 짓는 농장의 구실만을 하는 곳으로 변하게 될 것만 같다. 우리나라의 대부분 사람들이 농촌에서 태어났지만 젊은이들은 거의 도시로 떠나다 보니 농촌에 남은 학교까지도 젊은이들을 따라 도시로 가게 된 셈이다. 농촌에 젊은 사람들이 살지 않고 젊은이들이 없으니 아이들이 없고 아이들이 없으니 학교의 존재가치가 없어져 버렸다.
농촌 학교들이 문을 닫게 되는 것은 농업 위주의 경제 구조에서 산업 사회로의 전환에서 오는 필연적이고 당연한 결과라는 생각과 함께 농촌의 인구가 부족한 산업인력으로 메꾸어지는 과정에서 발생되는 바람직한 변화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점점 사라져가는 학교들의 모습을 보면 왠지 서글퍼지는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농촌학교 소인수학교의 통폐합은 국가재정의 낭비를 막고 복식학급으로 인한 학습의 결손을 막기 위한 것이 그 목적이다.
농촌지역 소인수 학교의 통폐합의 과정을 보면 교육청에서 정한 통폐합 기준에 근거하여 그 대상교를 선정하고 선정된 학교는 그 학교의 주민들과 학부모들의 동의를 거쳐 통폐합을 결정하는 절차를 밟는다.
내가 근무했던 학교도 작년에 통폐합 되었다. 통폐합이 되기 2년 전에 학생수의 감소로 분교장(分敎場)으로 격하되어 교장 교감이 없고 본교의 지시를 받게 되었다. 분교가 되고 보니 학교 운영은 자연히 교사들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학교의 교육방향은 학생위주로 전개되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대외행사가 대폭 줄어들고 많은 공문서의 처리가 본교에서 이루어지다 보니 결국 학생들과의 학습 시간이 자연히 늘어나기 때문이다. 그때 학생수라야 불과 50여명으로 2개 학년이 함께하는 복식학급으로 운영되었다. 학급 운영의 목표와 방향은 복식학급으로 인하여 부족 되기 쉬운 학력을 일반학급수준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학습시간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종소리도 없애고 교과 시간은 신축성 있게 운영하였으며 능력에 맞는 학습과제와 함께 학습의 개별화가 실천되었다. 잡다한 잡무에서 벗어나 학생들과의 많은 시간을 가질 수 있다보니 그렇게 바라던 교육 본연의 임무에만 몰두할 수 있는 값진 기회를 가진 셈이다.
그러던 차에 그해 가을 본교와의 통폐합 대상교가 되어 학부모들의 통폐합동의를 묻는 학부모 회의가 열렸다. 중대한 문제임을 인식했던 탓인지 한사람도 빠짐없이 37세대 전원이 참석하였다. 본교 학교장으로부터 통폐합 대상교의 선정 배경과 그 당위성을 듣고 주민들의 의견과 토론을 거쳤다. 통폐합을 찬성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의 의견들이 제시되고 나름대로의 타당성 있는 주장들을 맞서다 보니 쉽게 결론이 나지 않아 밤 11시가 되어서야 찬 반 투표를 실시하였다. 투표 결과는 찬성 쪽이 많았으나 반대하는 쪽도 당초 예상보다는 훨씬 많아 통폐합에 전원이 찬성하리라는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결국 당초의 계획보다 1년 늦게 통폐합 쪽으로 매듭지어져 확정되었다.
폐교되기 마지막 학기가 시작되는 9월이 도자 통폐합을 위한 준비가 시작되었다. 가정집 하나만 이사하려 해도 일이 많고 복잡한데 30년간의 역사를 지닌 학교가 문을 닫게 되는데 간단하지 만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을 했으나, 막상 통폐합 준비를 위한 일거리가 구체적으로 제시된 내용을 보니 적은 인원으로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나 자신 3년동안 이 학교에 몸담아 있다가 떠나는 마음이 그토록 섭섭한데 이 학교의 설립을 위해 귀한 논밭을 희사하였으며 큰 동산을 깎아 운동장을 만들고 몇 해에 걸쳐 많은 학부모들이 힘을 합쳐 가꾸고 꾸민 이 학교가 없어진다니 만나는 사람마다 섭섭해 하고 좋은 학교 시설들을 아쉬워했다. 학생들 또한 ꡒ선생님 우리는 어느 학교 졸업생이라고 해야 해요?ꡓ ꡒ그 학교에서 졸업을 하게 되니 당연히 00학교 졸업생이지ꡓ ꡒ선생님! 5년간이나 우리 학교에 다녔는데 난 싫어요, 나는 우리학교 졸업장을 받고 싶어요ꡓ ꡒ여기에 있는 이 나무들은 어떻게 되나요?ꡓ ꡒ연못에 있는 붕어들을 그대로 두면 죽고 말텐데…ꡓ ꡒ학생들이 없어도 학교 운동장은 풀이나지 않게 관리 되나요?ꡓ
겨울이 가까워 오자 폐교에 대한 느낌이 실감 있게 다가오는지 폐교 후에 대해 지역 주민들과 학생들의 궁금증이 부쩍 늘어만 갔다. 폐교 후 학교관리에 대한 소문 또한 무성하였다. 누군가가 이 곳에 우사를 짓고 목장을 만든다는 말이 있는가 하면, 운동장을 놀릴 수 없으니 부락사람들이 공동으로 고추를 심는다는 이야기. 이곳에 농산물 가공공장을 지어 운영한다는 이야기. 어느 단체에서 매입하여 연수원으로 사용한다는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폐교는 되지만 관리인이 있어 학교 관리는 잘 될 것이라는 이야기들이 심심치 않게 돌고 있었다.
서리가 내리고 하얀 국화만이 화단을 외롭게 지키고 있을 때, 전교 어린이 회에서는 교내 정리 작업을 계획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정리 작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이 겨울이 나면 없어질 학교를 무엇 때문에 더 애정을 기울이느냐는 말들에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는 참이었는데 어른들보다도 더 깊고 의젓한 생각을 한 아이들이 대견스럽고 어른들의 이기심이 부끄러웠다.
오전 수업으로 끝나는 수요일 오후를 잡아 대대적인 정리 작업이 시작되었다. 1,2학년은 운동장가에 있는 잡초를 캐고 3,4학년은 화단 정리, 5,6학년은 배수로 정리와 양어장에 물갈아 넣기를 맡았다. 운동장에서 풀 뽑기를 하는 꼬맹이들의 작업이 그날따라 더디기만 했다. 가까이 가보니 서늘한 바람이 불었지만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채 풀을 캐느라 여념이 없었다. 평소 야무지기로 소문난 1학년 경옥이는 ꡒ울 엄마가 그랬는데 풀을 뽑을 때는 뜯지 말고 뿌리까지 뽑아야 다음해에 나지 않는다ꡓ고 하면서 대강 뽑고 있는 친구들을 핀잔하며 고사리 손이 열심이었다. 그러자 경옥이 짝꿍 혜정이도 덧붙인다. ꡒ경옥이 말이 맞다. 내년에 우리들이 학교에 다니지 않으면 운동장에 얼마나 풀이 많겠니?ꡓ 연못을 맡은 6학년 수용이는 이미 연못을 다 품고 새 물을 넣고 있는 중이었다. 세숫대야에는 붉은 빛이 나는 대장 붕어며 손바닥만큼 자란 자라, 통통하게 살이 오른 미꾸라지들이 그득하였다. 왜 넣어주지 않느냐고 했더니 ꡒ선생님 이곳에 넣으면 고기들이 죽을 거예요 그래서 냇물에 놓아줄까 하는데요ꡓ 수용이는 두 달에 한번씩 양어장의 물을 빼고 청소를 한 다음 새 물을 갈아주는 일을 스스로 맡아 벌써 2년째 하고 있다.
ꡒ좋은 생각을 했구나. 그런데 그렇게 되면 대장 붕어와 다시는 못 만날 텐데ꡓ 야! 대장 붕어! 너 운 좋은 줄 알아라. 이게 다 우리학교가 벗어지기 때문에 네 집으로 돌려보낸 거야, 은혜를 안다면 너 대장이 되어 금도끼라도 나에게 줄지 모르겠구나. 인자하신 우리 선생님께 감사해야 돼 이마ꡓ 어둑어둑 해서야 작업이 끝났다. 어찌나 열심이더니 끝내자는 말을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이 아이들의 이제까지의 배움터를 두고 떠난다는 게 그렇게 아쉽고 절실했나 보다, 이렇게 따뜻한 가슴들 속에 묻혀 사는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 몰랐다.
겨울방학이 끝나자 통폐합을 위한 일들이 쏟아졌다. 도서를 정리하고 비품을 챙겨 하나씩 박스에 넣어 이삿짐을 싸야 했다. 교육청에서도 물품의 손실과 관리를 보기위해 관심을 보였고 공공 재산의 관리 소홀을 염려하여 폐기된 물품을 낱낱이 점검하여 처분의 적정성을 따졌다.
이러한 작업들을 일주일 이상을 야간작업을 해도 끝이 나지 않았다. 직원들은 이미 2월 26일자로 발령이 나 있었지만 3월 1일까지도 출근하여 작업을 하고 어둑어둑해져서야 겨우 모든 일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쓰레기장의 불씨를 확인한 다음 현관의 배전판을 내리니 칠흑 같은 어둠 속에 학교는 순식간에 묻혀 버렸다. 30년간 수많은 이 고장 어린이들의 꿈을 키우던 이 곳, 유난히도 학부모들과 지역 주민들이 하나 되어 학교 가꾸기에 열심이었던 사람들의 아쉬움을 생각하며 까만 운동장을 지나 급경사진 교문을 나섰다.
시골에서의 학교는 도시의 학교와는 다른 여러 가지의 의미가 있는 곳이다.
들에서 일하다 손만 베어도 학교로 찾아왔고, 한참 일이 바쁠 때면 언니 아기를 딸려 보내면 선생님은 아이에게 놀 거리를 주고 잠이 들면 교실 한 구석에 높여 재워주곤 했다. 설이나 추석명절이 되면 고향집에 내려오는데 오자마자 학교로 달려왔다. 학교에 오면 그동안 헤어졌던 친구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며 서로 만나면 밤 싶은 줄 모르고 이 교정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곳이기도 했다. 백중날엔 온 동네 사람들이 운동장에 모여 뽈차고 씨름하며 부락별 달리기와 줄다리기가 열려 지역축제가 벌어지던 곳, 생일만 돌아와도 담근 술과 별난 음식을 아껴 선생님을 찾던 사람들이고 보니 학교는 이 지역의 문화의 공간이며 누구의 것이 아는 모두의 것이었다.
농촌에 학생들이 줄어가고 있는 것은 산업화된 경제구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열악한 교육여건 때문에 도시로 진출을 하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복식학급이 되거나 분교로 격하되면 갑자기 전학생이 많이 생기는 까닭을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려운 농촌 생활은 감수한다해도 열악한 교육 환경에다 내 자식을 보낼 수 없다는 생각이 절실한 것 같다.
이에 대한 것은 행정대학원 석사학위 논문(전남대 장태기) ꡐ농촌사람들이 줄을 이어 도시로 떠나는 이유는 무엇일까?ꡑ(9월13일자 동아일보)에 의하면 60년대라면 당연히 ꡐ일자리를 찾기 위해ꡑ라는 경제적 이유를 제1의 이농 요인으로 꼽았겠지만 기본 생계가 해결된 오늘날에는 아무래도 설득력이 부족하다고 하였으며, 지역발전의 저해, 즉 농어촌 사람들을 도시로 떠나게 하는 가장 큰 요인은 열악한 교육여건이며 국가와 지방자치 단체는 교육기회 불균형 해소에 농어촌 정책의 최우선 순위를 두어야 한다고 했다. 논문에 밝힌 자료에 의하면 농촌 이주를 원하는 주민들은 그 이유에 대해 전체의 56.6%가 자녀교육이라고 응답했으며, 경제적 이유는 22/9%에 그쳤다. 또한 자녀들의 도시 유학의 적정 시기는 중학교에 입학하기 전인 국민학교 6학년이 47.7%였고 자녀 유학 시 가족의 이주 형태는 취학자녀와 가족의 일부가 약 50%로 가장 많았고 가족 전체는 불과 24%에 그쳤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 논문은 교육여건에 대한 불만은 궁극적으로 농촌인구 감소 및 농촌 공동체 붕괴로 이어지는 근본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며 이 같은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사회구조 변화 차원의 교육정책 개선과 장기적 투자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대로 학생수가 계속 줄어들고 줄어드는 대로 폐교를 강행 한다면 얼마가지 않아 우리 군의 경우 잘해야 한두 개의 학교만 남게 될 것이다. 많은 농촌 사람들은 이점은 우려하고 있으며 최소한 한 면에 한 학교라도 남아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단순히 교육문제를 떠나 농촌의 존립문제ㅡ 인구의 분산 문제, 경제의 고른 발전의 문제이며, 계층간 지역간의 갈등문제와도 관계된 중요한 문제로 생각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농촌의 학교를 단순히 경제 논리나 다인수 우선의 차원으로 봐서는 안 될 것이다. 어떤 형태로든 면 단위에 1개 학교만은 유지하여 농촌 사람들의 자녀교육에 대한 부담을 줄여주고 정부가 농촌을 살리려는 확고한 의지를 믿게 해줘야만 한다. 이것은 단순히 농촌 사람들을 위함만은 아니며 우리 모두가 함께 하기 위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