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색적이고 아름다운 사진이 눈에 익은 요즘, 인간의 삶을 그대로 담아내는 사진가가 있다. 휴먼다큐멘터리 사진가 오준규. 사회복지사이자 사진가인 그는 사진을 일하는 도구로 본다. 그래서 기록적 가치가 있는 사진을 찍는다. 사회복지현장에서 그리고 일상에서 인간의 희로애락이 묻어 있는 장면을 사각틀에 고정시켜 영원히 남긴다. 그와 만나 자리에서 “나보다 훌륭한 작가들이 많은데 어찌 알고 왔느냐”고 대뜸 묻는다. 남에게 사진이야기 하는 것이 영 쑥스럽다고 했다. 이야기가 터지자, 그의 절절했던 삶의 이야기, 사회복지사로써의 갈등, 사진에 대한 자부심이 술술 풀려 나왔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놓지 않았던 사진가의 꿈
그의 일터는 사회복지센터다. 그가 현재 맡고 있는 직책은 권익사례팀장. 인권 권익 성폭력 등 상당히 골치 아픈 문제를 다루고 있다. 특히 5~6세의 정신연령을 지닌 여성의 성폭력 사례들이 많아 이 문제를 다루는 것이 힘들다고 한다. “사회복지사는 휴먼서비스를 하는 사람입니다. 내 삶이 힘들지만 불행한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 살 수 있다고 생각해야만 할 수 있죠. 15년째 사회복지사로 어려운 생활을 하면서도 그만두지 못하는 것은 일하는 자체가 좋기 때문이에요. 그가 사회서비스와 휴먼서비스를 좋아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사회복지사가 돈버는 일이 아닌 삶의 만족을 얻을 수 있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사진에는 현장의 생생함이 묻어있다. 그는 다큐멘터리 사진가과 사회복지사는 잘 어울린다고 했다. 그의 사진에 사회복지사로써 느끼는 감정들이 작업노트와 함께 빼곡하게 적혀 있는 것도 사진이 사회복지 영역 안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노동, 웃음, 추억, 그리움, 연민. 흔히 사람들이 살면서 느끼는 감정들을 다 담습니다. 건물이라 할지라도 삶과 이야기가 담겨 있다면 제 사진이 되는 거죠. 삶의 현장에서 삶의 향을 느끼게 하는, 녹슬어가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겁니다.”
그가 사회복지사가 된 데는 그의 가정사와 관계가 깊다. 그의 나이 10살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이듬해 그는 새어머니를 맞았다. 새어머니와 몇 년을 사신 아버지마저 세상을 떴다. 아픈 새어머니를 모시며 17년 넘게 병원을 들락거렸다. 어머니의 정을 느끼지 못했던 그에게 새어머니를 모시는 일은 스스로를 연단하는 일이었다. 아픈 새어머니를 돌보며 사회복지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했다. “내 부모도 돌보지 못하면서 사회복지 현장에서 장애인을 섬기고, 휴먼리얼리즘 사진을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을 했어요. 내 가족과 부모를 모시지 못하면서 그렇게 하는 것은 위선이죠.” 사회복지학을 배우며 막 사진에 눈뜰 때 그는 그런 생각을 했다.
중학교 때부터 홀로 공부하고 대학을 갔던 그의 형편상 사진을 하는 것은 언감생심이라는 말이 어울렸다. 삼남매의 막내인 그였지만 가족들이 다 어려웠으니 누구 하나 원망할 형편도 아니었다. 그래도 사진을 찍고 싶다는 생각은 접을 수 없었다. 책방을 들러야 하는 일이 생기면 언제나 눈은 사진책들을 훔쳐보고 있었다. 독학으로 사진을 배우며 사진의 매력에 푹 빠졌다. 혼자 몸으로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야 하는 그에게 사진은 팍팍한 삶의 비상구가 됐다.
사진 인생의 멘토
최민식 선생과의 만남
사회복지사로 직장을 잡았지만 첫 월급 48만원으로 월세와 생활비를 대면 필름 한 통 사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가뭄에 콩 나듯 필름을 사서 사진을 찍었다. 그래서일까 사진에 대한 갈망은 더욱 커졌다. 그러다 최민식의 사진집 ‘종이거울 속의 슬픈 얼굴’을 접했다. 민주화의 막바지, 디지털카메라가 보급되기 시작한 1997년 무렵이었다.
그가 만나고 싶고 보고 싶었던 사진을 보기 위해 최민식 선생의 부산 집까지 무작정 찾아가 배움을 청했다. 다섯 시간이 걸리는 거리를 일 년에 서너 번 오가며 선생의 사진 끝자락 하나라도 잡고자 했다. 선생과 교류를 하며 그는 사진뿐만 아니라 선생의 삶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 분은 사상과, 삶과 사진이 삼위일체가 되신 분입니다. 10년전 봤던 옷을 그 계절이 되면 다시 꺼내 입으시고, 장비도 웬만해서는 몇 십 년을 쓰고 있었습니다. 아, 사진이 돈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구나, 선생님을 만나고 알았습니다.”
선생의 삶에 감화된 그는 여유가 없더라도 사진을 계속할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선생과는 ‘사대’가 맞았던 것일까, 선생에게 배우러 오는 사람들이 1년을 채 넘기지 못하는 반면 그와 선생과의 관계는 계속 이어졌다. 선생의 말로는 칙칙하고 리얼리즘만 추구하니 배우려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그게 좋았다. 선생도 그가 어려운 환경에서 사진을 배우려는 열정을 높이 샀다. 그때부터 선생이 세상을 뜨기까지 15년간 선생은 그의 사진세계에 대한 멘토였다.
지금도 가끔 최민식 선생의 제자라며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는 선생의 제자가 아니라고 했다. 아직 더 공부를 더 해야 하는 부족한 그가 선생의 사진을 배운 제자라 하기에는 부끄럽다는 이유다. 단지 어떻게 어려운 가운데에도 이런 사진을 찍게 됐느냐고 묻는다면 그분의 사상과 철학, 사진의 근본이념과 가치가 좋아서 15년간 선생의 정신적 도움을 받아 작업을 했다 답하겠노라고 그는 말한다.
2002년 한일월드컵이 열리던 그 해 선생은 그의 사진을 보자고 했다. “아버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그런지 선생님을 아버지처럼 존경했어요. 그런 분께 내 사진이 좋은지 나쁜지 어떻게 여쭈어요? 쪽팔리기도 하고 감히 선생님 앞에 제 사진을 보여 드릴 수 없었어요.”
선생과 인연을 맺은 지 2년 만에 건넨 그의 사진에 선생은 많이 놀랐다. 선생은 “글이 됐든 사진이 됐든 본인이 체험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데 오군은 사진을 봤을 때나 하고 있는 일도 그렇고 참 적합한 것 같다”며 “이런 사진들이라면 비전이 있으니 사진에 입문해보라”고 권했다. 공모전 준비도 했다. 혼자만의 작품도 좋지만 작품에 대해 누군가가 평가를 해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선생의 조언 때문이었다.
사회복지 현장에서 만난
노부부로
청년작가 10인에 선정
그때부터 취미가 아닌, 구체적이고 심도 깊게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공모전 사진과 사진책들을 쌓아놓고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공모전을 준비하면서도 잘하는 일인지 갈등이 많았다. 그가 하는 휴먼다큐멘터리 사진이 공모전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선생은 웃으면서 “그런 거 신경 쓰지 말고 해라, 때가 되면 사진은 전달이 된다. 조작하려 하지 말고, 예쁘게 보이려고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나타내는 데 더 노력을 하라”고 하셨다. 하지만 낙방은 계속 이어졌다. 2008년 청년작가 10인을 뽑는 공모에 사진을 출품했다. 연작사진 10장과 포트폴리오를 준비해야 하는 ‘청년작가 10인’은 사진 한 장이 아니라 작가의 작품세계를 보는 것이었기 때문에 쉽지 않은 공모였다.
그는 2년여동안 작업했던 임실의 한 노부부 사진을 출품했다. 그에게 노부부는 그저 피사체만이 아니었다. 지적장애인 딸을 사회복지사인 그가 사례관리를 하면서 노부부와 인연을 맺었다. 사례관리 일기를 쓰기 시작하면서 절절한 사연에 가슴이 아팠다. 노부부가 말하는 삶은 뭔지, 죽기 전까지 딸을 걱정하는 것을 무엇때문인지, 이들의 삶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인지, 2년 간 노부부의 일을 도우며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을 사진에 담았다.
사진을 고르고 출품을 하는 것은 단 3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노부부의 사연을 남기고 싶었던 그가 2년동안 찍었던 일상을 골라내면 되는 일이었다. 당당히 10인에 뽑혔다. 다큐멘터리 사진으로 입선하기 쉽지 않은 상황에서 상당히 큰 공모에 뽑힌 것이다. 최민식 선생이 가장 기뻐했다. 노부부도 기꺼워했다. “비록 많은 창작의 테크닉을 요하는 연작 사진은 될 수 없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어느 노부부의 이야기를 통해서 누구나 알고 있지만 알지 못하고, 느끼고 있는 듯하나 느끼지 못하는 시간의 흐름과 아직 경험하지 못했던 미래의 삶의 이야기들을 사진을 통해 느끼게 하고, 경험하게 하여 시대적 인간가치존중에 대한 개념을 사진을 통해 말하고 싶을 뿐이다.” 그가 작업노트에 적었던 내용은 그의 사진을 설명하는 동시에 한 인간의 삶을 기록한 역사이기도 했다.
아마추어와 프로를
가르는 기준
그리고 이를 계기로 그의 외부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1998년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추모전, 2010 휴먼스토리전, 2011년 천안함 침몰 1주기 특별전, 2012년 사라진 갯벌전 등 매년 개인전을 열며 그의 사진을 선보였다. 7번의 전시회와 세 권의 사진책을 내고 1300여점의 사진이 국가기록원에 보관되는 일까지 그동안 숨겨진 재능을 한꺼번에 쏟아냈다.
“하지만 제 사진은 인기가 없어요. 기록사진, 다큐멘터리 사진을 좋아하는 마니아들이 있긴 하지만 어둡고 칙칙한 사진을 좋아하지는 않더군요. 하지만 저에게 사진은 일상이자 삶입니다. 왜곡되고 사진의 본질에서 벗어난 사진이 아닌 우리의 삶을 그래도 담은 것이 사진이기 때문입니다. 그게 다큐멘터리가 됐든, 상품사진, 누드사진, 풍경사진이 됐든 분야에 대해서는 크게 구애받는 게 아니죠.” 그래서 그는 아마추어인지 프로인지, 장비가 좋은지 어떤지에 대해서는 따지지 않는다. 그 사람이 가진 가치, 그 사람의 정신세계, 예술관이 어떠한가가 더 중요하다. 단지 취미생활일지라도 그 확고한 정신에서 나온 사진은 그 가치가 충분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디지털에 대한 생각도 그는 전향적이다. “아날로그는 그 느낌과 맛이 있지만 디지털이 경제적이고 신속하기 때문에 좋았어요. 경제적 어려움이 사라지자, 사진의 의미에 대해 더욱 파고들게 됐고, 조금 더 철학적이게 됐달까, 나에게 메시지를 주는 것을 찾고자 했죠.”그때부터 그는 장비에 구애받지 않고 사진을 찍게 됐다. ‘가족이란 이런 것이다’에 담긴 그의 아내와 아이들의 사진은 휴대전화 카메라도 찍은 사진이다. 사진을 메시지로 보는 그에게 어떤 장비로 메시지를 담느냐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단지 그 순간을 포착할 수 있는 기구면 족하다고 했다. “노출, 흔들리는 것들은 부차적인 것이라고 생각해요. 구도가 조금 틀어지더라도 주제가 명확하다면 사진으로써 가치가 있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그가 지키는 단 한 가지 철칙은 있다. 왜곡된 사진을 찍지 않는 것. 그래서 그는 철저히 연출사진을 피한다. 처음 최민식 선생에게 사진을 배울 때부터 지켰던 이 철칙은 지금도 그에게 유효하다. 그래서 그의 사진은 단 한 장의 사진도 연출사진이 없다. 그는 일부러 그런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사진 봉사를 하며 인물 사진을 찍는데 연출사진은 아무래도 그 맛이 안납니다. 그 사람의 삶이 묻어 있는 사진, 진실한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연출사진으로는 부족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회복지사와 사진가로 살기위해 그는 두 배 새 배의 일을 한다고 한다. 그리고 사진가과 사회복지사로서의 삶은 사진예술을 사회사업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계기가 됐다. 그는 사회에 환원할 수 있는 시각 예술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오래된 생각을 실천했다. ‘행복한 순간으로의 초대-우리가족 행복이야기’ 전은 전라북도 장애인 다문화 가정의 가족사진을 찍는 작업이었다. 2011년부터 시작한 이 일은 4회에 걸쳐 진행됐고 사회복지활동가로서 도지사 표창을 받는 계기도 됐다. 하지만 그가 꿈꾸는 내일이 거창하지는 않다. 그의 사진을 보고 ‘아내 손이라도 잡아줘야 겠네’라거나 ‘아이들과 놀아야겠어’하는 생각만 가질 수 있다면 그는 성공한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두 가지 일 모두 손에서 놓고 싶지 않다고 했다.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과 사귀고 사람과 만나는 가장 좋은 직업 중 하나가 사회복지일입니다. 자꾸 상품화되고 평가화되면서 딜레마에 빠질 때도 있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회복지는 정년이 있지만 사진은 죽을 때까지 해야 할 일이죠. 사진을 통해 따뜻해지는 사회, 서로 공감하고 소통할 수 있는 인간사회를 만들 수 있는 작은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진과 복지일은 힘닿는 데까지 열심히 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