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2 | [문화시평]
하반영, 박민평, 유휴열 3인전
햇수로 19년, 이젠 전통이 서려진다
이승우 / 서양화가
(2004-02-03 11:21:36)
그들은 하나같이 권위를 좋아하지 않는 아웃사이더이고, 그래서 세대차이마저도
잊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림 또한 외형상으로는 전혀 다른 시각과 분위기로 마치
세 사람의 개성의 난투장이 되었기 때문이다.
같은 전주지역이라는 것 말고도 최소한 그림에서 만은 전혀 공통점이 찾아지지 않는 그들은 참으로 용케도 ‘삼인전’이라는 타이틀로 묶여졌고, 끈질기게도 이어 왔다. 짐작컨대 아마 정읍집(일명 정읍대학원)이었을 것이다. 경영방식이 까다롭고 특이하였지만 ‘쟁이’한테는 유난히 편안한 분위기(마치 치외법권을 행사하는 외교관처럼)속에서, 어느 시절 몽빠르나스의 주점에서 제 영혼의 변호를 위하여 침을 튀기던 그곳의 쟁이들처럼 그들은 끝없는 독설과 다독거림, 비워지는 막걸리잔과 대수리 국물을 바라보며 현실과 이상이, 차안과 피안이 뒤죽박죽되는 그 언저리쯤에서 공동체 의식을 느꼈을 것이다. 빛보다 빠른 재치와 기상천외한 기억력을 토대로 하여 속사포처럼 이어지던 하반영의 언어들, 다소 공격적으로 남보다 앞서 이야기의 매듭을 명쾌하게 지어가던 박민평, 보헤미안적 분위기를 물씬 풍기면 조용하게 앉아있던 유휴열의 ‘묶여짐’은 어쩌면 오히려 당연한 것이었고, 그 음모는 차라리 신선한 것이었을 게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같이 권위를 좋아하지 않는 아웃사이더이고, 그래서 세대차이마저도 잊을 수 있었기 때문이며, 그림 또한 외형상으로는 전혀 다른 시각과 분위기로 마치 세 사람의 개성의 난투장이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예를 들자면 이렇다. 하반영의 경우, 그림자를 드리운 달걀과 그림자가 없는 달걀이 중력과 무중력 상태를 감지케 하는 ‘어느 시대의 공감’이나, 무생물(돌) 위에 살포시 내려앉아 무한의 상상력으로 대입되어지는 생명력(나비)의 대비를 표현한 ‘나비야 청산가자’등의 초현실적 작품들이 그 많은 시어와 함께 환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 옆에는 격정적 사고와 몸짓에 연유한 박민평의 다이나믹한 해바라기나 메타포적 풍경이 있고, 또 그 옆에는 사실적 묘사로 도전에서 이미 몇 번인가의 수상 경험이 있는 유휴열의 색이나 면을 분할한다거나 넓은 붓의 속도감이 돋보이는 고전적 추상이 함께 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스스로 서문에 밝혔던 “뜻이 같아 셋이 모였습니다. 멀고 험한 표현의 길을 함께 걷자는 마음으로....”에서의 ‘뜻’이란 ‘어떻게’ 그릴 것인가 라는 방법으로 함께 가자는 것이 아니라 각자 ‘무엇을’ 추구하느냐에 있었고, 그 ‘무엇을’ 추구하는 사람들끼리 서로를 격려하며 ‘함께 걷자는 마음’이 될 것이다.
이 지역 대부분의 화가들에 해당되는 말이겠지만 하반영은 지역적 편견의 불합리성에 의하여 평가절하되고 있는 표본이다. 그의 작품세계는 재평가 되어서 확대되어야 마땅하다. 하반영은 참으로 세월을 잊은 정열로 인상주의적 사실에서 초현실, 형태의 변형에서 추상, 재료의 한계까지를 거의 모두 넘나든다.
명태 대가리 옆은 기어가는 개미들의 행렬이나 여인의 둔부에서 달걀이 헝겊에 가린채 아직 들어 있고, 뚫고 나오는가 하면 이미 나와 있는 그의 그림에 대한 기억이 아직 생생한데, 이번 전시에서는 또 다른 사고의 분방함을 보여주고 있다. 아마 그는 보여지고 생각되어지는 모든 의미를 그림으로 다시 해석하는 것 같다. 향수 어린 옛 정경, 군무, 나부, 비정형의 모든 것들이 거침새 없이 표현되어 진다.
박민평은 누구의 말처럼 자신의 삶이 모두 산에 투영되기라도 하는 듯이 산만 그린다. 초창기에 보여주었던 해바라기나 장미의 마치 태풍과도 같았던 격정은 점차 정적으로 변해져 있고 그러나 아직도 못 다한 하고싶은 이야기들이 방울방울 그 산밑에서 꽃의 모습으로 번진다. 보여지는 산이 아니라, 보여지는 초가집이 아니라, 이미 보여진 것들의 아득한 향수로, 심상 속에 자리한 산이, 초가집이, 꽃이, 해와 달이, 수목이 다양한 색으로, 서사적이라기 보다는 서정적으로 동화처럼 이어지는. 서정은 순수의 근원일 것이다.
유휴열은 사실과 추상의 병행단계와 현대미술의 다양함을 섭렵하는 모색의 단계를 80년대 중반쯤의 ‘生-놀이’라는 표현주의적 표출로 벗어나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양식을 찾아 고독한 순례를 시작한다. 그리고 현란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보폭으로 내달리며 가시적인 시간과 공간을 자신의 내면에 깊숙하게 자리하고 있을 영원속에서 용해시켜버린 상태로 나타난다. 기존의 천 무늬를 이용한다거나 합판을 자르고 심지어는 찢는가 하면 종이나 수지의 요철을 유도하여 자신의 표현에 이용한다.
이번 전시에는 그의 다양함이 더욱 두드러져 ‘신 한국화’라고나 이름하여야할 화면이 전통한지의 2저 같은 크기로 전개되는가 하면 꽃가마가 등장하고, 아무튼 우리에게서 차츰 멀어져 가는 ‘우리 것’이 여기 저기에서 자꾸 반복하여 등장한다. 아마 그는 ‘향토가 곧 세계’라는 사실을 실천으로 체득하였다고나 해야 할 것이다.
햇수로 19년, 횟수로 16회 이젠 차츰 전통이 서려진다. ‘전통은 아름답다. 그러나 더욱 아름다운 것은 전통을 만드는 것이지 전통에서 빛나고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프란츠 마르크의 말을 인용하며, 지금까지의 세월보다 서너배 쯤 더욱 오랜 전시회로 계속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