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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2 | [문화계 핫이슈]
극단황토의 “초분”
윤희숙(2004-02-03 11:22:34)
한국적이고 토착적인 몸에 입힌 서구 전위극이라는 옷 이 작품은 극한 상황에 처한 인간의 절망과 체념이 한국적인 방식으로는 어떻게 나타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극단 [황토]가 93년 신년 개막공연으로 오태석작 <초분(草墳)>을 조승철연출로 무대에 올렸다. 위도를 비롯한 섬지방과 일부 뭍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바로 땅에 매장하지 않고 지상에 초분으로 두었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시체가 육탈(肉脫)되면 본장(本葬)을 치르는 습속이 있다. 이러한 초분의 풍습을 소재로 삼은 작품<초분>은 1973년 오태석에 의해 쓰여저 74년 미국에서 공연되었고 국내에서는 많은 극단들이 80년대 초 무대에 많이 올렸다. 이 작품은 극한 상황에 처한 인간의 절망과 체념이 한국적인 방식으로는 어떻게 나타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연극은 다분히 동양적인 소재와 섬마을이 간직하고 있는 토착적인 정서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그로테스크하고 부조리한 요소를 갖춘 서구 전위극의 전형적인 기법을 사용하고 있어, 독특한 연출방법으로 미국 공연에서 호평을 받기도 했다. 탈역사적이고 난해한 작품이기도 한 <초분>은 조그만 섬마을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다루고 있는 상황극이다. 겉으로 드러난 문제는 ‘초분’이라는 무덤 자체에서 파생된 것이지만 더 깊숙이 들여다보면 법(法)과 섬안에서 지켜지는 질서 사이에서 빚어지는 갈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역양식을 생계수단으로 삼는 섬마을에 공해에 의한폐수가 밀려와 미역이 모두 썩어버린다. 더 이상 섬에서 생계를 이을 수 없게된 섬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섬을 떠나야만 하는 상황에 부딪치게 되지만 막상 섬을 떠나기전, 죽은 노파의 시신이 없어져 문제가 발생한다. 그 시신의 행방의 열쇠는 그 노파의 손녀인 임자가 쥐고 있다. 임자는 할머니가 죽기전에 남긴 유언에 따라 할머니의 시신을 초분하려고 마을 사람들 몰래 시신을 감춘다. 하지만 법을 대표하는 행정관 당자는 시체를 물에 담궜다가 건져서 장례를 치르는 초분의 풍습을 환경법이라는 이름으로 금지시킨다. 원칙만을 고집하는 법은 섬이 그동안 오랜 생활과 관습에 의해 몸에 밴 행동들을 제약함으로써 섬의 질서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오로지 섬을 빨리 떠나려하는 마을살마들은 시신을 찾아내 뭍에 가서 화장을 해야한다 하며 시신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할머니의 뜻을 따르려는 임자와 5년전 섬의 질서를 지키려다 버을 어겨 뭍에서 징역살이를 하는 도중 어머니의 부음을 듣고 임시로 석방되어 섬에 찾아온 소자 그리고 법을 상징하는 행정관 군자 여기에 소자의 또 다른 모습으로 법에 순응하여 법을 집행하는 집행관으로 등장하는 당자가 <초분>이라는 극을 이끌어 가는 주요 인물들이다. 소자라는 인물이 무대에 처음 등장하면서부터 극이 끝날 때까지 예측할 수 없는 행동들이 많이 일어난다. 5년후인 지금의 시점에서는 법을 집행하는 집행관인 당자라는 인물로 등장하는 것등이 이극의 난해함을 더해주는 요소들이다. 결국 소자의 미스테리한 행동들은 이 작품에서 큰 변수로 작용한다. 이 극은 임자가 결국 마을 사람들에게 모든 사실을 실토함으로써 문제가 해결된 듯이 보여지지만 갑자기 마을 장정들이 임자를 살해함으로써 또 다른 의문을 제기한 채 막이 내려진다. 입체적 추상화같은 인상을 주는 작품 <초분>은 ‘우리는 동기간’이라는 섬사람들을 대표하는 장정들의 코러스적 무대효과와 ‘초분이 탄다. 배를 타라!’와 ‘섬을 태워라’ 등의 동음어가 내는 청각적 효과, 그리고 해초처럼 얽힌 움직임 속에서 굴게 혹은 가늘게 비쳐 보이는 문제들이 그런 느낌들을 보여준다. 어쩌면 이 극은 대사 하나 하나에서 의미를 찾기보다는 굴게 표현된 선과 색, 빛과 소리 등에 정신을 집중시키는 것이 극의 이해를 높여주는데 도움을 줄 것인지도 모른다. <초분>, <태>, <춘풍의 처>, <물보라> 등 전통적이고 토착적인 작품들을 주로 써온 오태석의 희곡들은 전통적 리얼리즘 작품인 <물보라>를 제외한 거의 모든 작품이 전위적인 연출기법과 난해한 내용이 담긴 모더니즘 계열의 것들로 평가받고 있다. 1월 27일 시작하여 2월 7일까지 전주 창작소극장 무대에 올려지는 극단 [황토]의 공연 <초분>에는 김준, 장걸, 염정숙, 양차섭, 소병기, 곽봉운, 김은희, 김미화, 최석규, 이상호, 이거룩, 이경의, 양현아, 이은정이 출연한다. 연출가와 한마디 “연출이란 작업은 단순히 작품만을 잘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연출자는 작품속에서 창조적인 면을 발견해내기 보다는 배우나 스텝들 사이에 서로서로 마음을 열어 좋은 팀웍을 이룰 수 있는 분위기를 잘 이끌어내야 합니다.” 자신의 입봉작품 (처음으로 연출한 작품)으로 오태석작 <초분>을 무대에 올린 조승철씨의 말이다. 91년 12월에 입단하여 무대에는 단 한차례도 서지 않았고 음향과 조명 등 스텝으로만 활동한 이제 갓 스물을 넘긴 풋내기(?)연출자를 만나는 일이 처음엔 몹시 어색하기만 했다. “나도 모르게 이 작품에 끌려 대본을 구하려고 뛰어다녔습니다. 그러나 전주에서는 <초분>의 대본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직접 서울로 원작자인 오태석씨를 찾아가 어렵게 대본을 구했고 그것을 읽으면서 점점 더 작품속으로 몰입해 들어갔습니다.” 힘들여 접한 작품이어서 인지 조승철씨의 <초분>에 대한 집념은 대단했다. “작품속에서 의미를 찾는데 힘이 들었습니다. 관객들에게 어떻게 전달될지 걱정이 앞섭니다. 한국적인 행동방식을 표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 작품이 전위적인 상황극인 만큼 관객들이 대사 하나하나에 신경쓰기 보다는 큰 선으로 보여지는 인간들의 대립과 갈등, 고통, 체념하는 모습을 눈여겨 보아주었으면 합니다.” 1973년 완주 비봉에서 태어난 조승철씨는 자신에게 어려운 기회를 만들어주고 적극적으로 도와준 극단과 선배들에 대한 고마움을 전하며, 기회가 닿으면 표현주의 작품이나 부조리극보다는 정통적인 사실주의 극을 무대에 올리고 싶으며, 많은 경험을 두루 쌓기 위해 무대에서 연기자로 활동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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