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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2 | [문화칼럼]
새해편지
이철수 / 화가 (2004-02-03 11:25:05)
큰눈이, 오늘 영동 내일 삼남으로 전국에 고루 내렸습니다. 대선에 표가 그렇게 쏟아졌더라면 나라운세가 달라졌을 터입니다. 빌어먹을 대선이야기는 꿈에도 듣지도 보지도 하지도 말자했는데 소담한 눈경치를 바라보다 드느니 그 생각이었습니다. 인간이 정치적 동물이라니 미친! 짐승! 어찌되었거나, 춥다던 날씨가 겨울 답지 못한다하였더니, 웬걸 큰눈 끝에 한파로 기상대의 체면을 세우면서 세상을 얼어붙게 합니다. 새벽녘에 오줌을 비우느라 나가 본 바깥바람이 여간 차지않습니다. 성에 낀 창밖으로 방금 오줌 끼얹고 온 두엄더미와 추위타는 나무를 내다봅니다. 그 주변에 밤새 서성이던 고양이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혀 있습니다. 김치국물로 붉스레해진 밥찌꺼기가 얼어붙어 있는 것 보입니다. 음삭찌꺼기가 얼어있어 고양이가 8밤새 안들을 했던가 봅니다. 밥이 어는 계절이라.... 오늘 종일은 창밖으로 오가는 참새떼 구경을 하였습니다. 일하다 바깥보다 하는 것이라 그저 골똘이 창밖만 공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만 보아도 그깟 새떼틀의 수작쯤이야 몇해를 두고 익숙히 보던 것이라 참새들 우루루 날면 왜 그러는 지 어디로 가는 것인지 조차 대개 짐작할 만 합니다. 한여름 긴 장마에도 그러더니 오늘같이 큰 눈 내린 뒤에도 어김없이 마당안에 깃들고 맙니다. 휘돌아보아도 흰눈 덮인 산, 들, 숲, 그뿐 쉽게 찾아질 먹이가 있을까 싶지 않습니다. 보이는 밥찌꺼기나마 고양이 이빨로도 어림없게 얼어 버렸으니 알량한 부리가 고작인 참새들이야 말할나위가 없습니다. 오늘도 앙상한 라일락위에 모여들고 그 아래 닭 몇 마리 웅숭그려 떨고 있는 닭장에서 사람이 베푸는 닭의 모이나마 얻어먹자는 속셈이 분명합니다. 속없는 닭들은 낮이면 참새떼에 밤이면 쥐새끼들에게 그릇 내맡겨둡니다. 바라보는 사람이야 얄밉고 아까울 노릇이지만, 쥐들 새들 바지런이야 이길 장사가 없습니다. 해전에 새그물을 쳐서 서너마리 참새를 잡아보기도 했으나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어서 이제 그만입니다. 지루한 정성으로 훔치는 것이니 짐짓 버려두기 밖에 수가 없습니다. 그저 해보는 수작이, ‘더러운 것들! 황새나 되면, 아니 까마귀라도 되면, 높은데 앉아 세한의 풍경으로 그 마음을 삼고 조용히 체통을 지킬 줄 알리로되 붕새의 마음을 모른는 작것이라 염치도 없이 배고픔을 내색하여 치사스러운 수입사료 부스러기에나 마음을 두고 있구나. 살아서 내내 그짓 밖에 못하리라. 못난 것...’ 그래도 목숨 중한 것을 알아 사람의 기척이 있으면 황급히 그 꽁무니를 보이고 달아나겠지. 그 더러운 꽁지라니. ‘아나, 떨어뜨린 꽁지깃털 가져가거라!’일 뿐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거니와 그러나, 이 엄혹한 시절에 작은 참새의 한 몸이나마 부지하여 끝내 봄날 쾌청한 하늘을 종달새 더불어 날개짓하여 날아보자고 하면 그 바지런 없이 알량한 체통 버리지 않고 어찌할 것인가? 꽁지 빠져 볼품없는 참새의 목숨인들 죽어 박제로나 아름다울 큰새의 꼬리깃털 체통과 어찌 비기랴. 무릇 삶에는 지루한 마음으로 그 생명이어가야할 의무도 깃들어 있는 법, 따지고 보면 참새들의 그 행각이 오히려 금수조류의 바른 도리라 해야 할 것입니다. 해서 오늘에는, 눈쌓여 더 위엄있는 멀리 큰산 꼭대기도 마음에서 멀리 있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들 어제 겪어오는 정치며, 문화예술이며, 삶의 구석구석이 두루 한겨울 모진 바람․눈․서리의 차가움과 만난 셈이라 절박한 현실 앞에 다른 선택이 있을 리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참새의 선택이 곧장 사람의 선택이 되기도 쉽지는 않을터, 아직 덜 끝난 고민이 많이 있음을 알겠습니다. 방금 치른 전쟁터처럼 건질 것 없는 폐허와 그 위를 스치는 바람이 마음에 오가는 생각들처럼 어지럽습니다. 겨울햇살은 거침없이 밝은데 눈밭이 눈부실 뿐 녹아내릴 기미는 보이지 않습니다. 시절이 차가운 것입니다. 그런 겨울날입니다 참새떼가 뜰안을 서성이다가 틈틈이 푸새의 것들 입에 담는다한들 그 일에 매정한 눈길 보낼 일은 아닙니다. 살아있는 구차한 생명들이 언땅의 나무에서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마음 깊은데 봄이야기 하나쯤 여전히 묻어두고 있을 것을 짐작합니다. 시절도 마음도 무상하여 지난 세월과 겉모습은 돌이킬 수 없으되 무상이 한같 스러지고마는 종말은 아닌 터, 그 깊은 마음으로 다시 일어나는 내일은 기약해도 좋을 것입니다. [민미련]이 깃발을 불에 태워 단체의 해소를 알렸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깃발의 무늬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되 그이들 마음은 마음으로 짐작할 여지가 있었습니다. 앞길에 오히려 더 큰 성취가 있기를 바랍니다. 참새떼가 우루루 우루루 나는 시절이라 그 추위를 아시는 이라면 누구도 그 선택을 나무라지는 못할 것입니다. 다만, 한겨울을 힘겹게 견뎌야하는 한갓 참새의 마음 이렇게 적어두기도 그리 편치않음을 근거로, 참새보다는 뜻이 높고 아름다웠을 이들의 마음을 향해 부끄럽다거나 지켜보겠노라거나하는 인사는 해두어야 할 듯 합니다. 뒷날, 살아남은 새들이 모여 인사할 때 그때까지 꽁지깃털이 남아있는 새들에게는 엎드려 하는 인사도 사양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추운 계절에 강건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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