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10 | [문화와사람]
한국초상화의 마지막 대가
석지 채용신2
글/이철량 전북대교수 미술교육학과
(2004-02-03 11:40:40)
지금까지 확인되고 있는 채용신의 유작 중에는 인물이나 초상화외에도 산수나 풍속화가 있다. 이런 작품들은 수묵을 기초로 하고 채색을 올린 수묵산수화로서 그의 인물을 소재로 한 작품들 보다 훨씬 격이 떨어지고 있다. 지금까지 확인된 산수화 계통의 유작들이 매우 단편적이어서 그의 역량을 파악하기에는 무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특기는 뭐니 뭐니 해도 인물 초상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아마도 채용신은 그림 수업기에 공필화(工筆畵)법으로 공부하였던 것 같다.
앞서 언급한데로 채용신의 부친 채권영은 궁궐에 참빗을 만들어 납품하는 일로 하여 대원군과 친교를 맺게 되었다. 이러한 견고로 채용신도 대원군과 알게 되며, 결국 궁궐 출입을 하게 되고 후일 대원군과 고종의 얼굴을 그리게 된다. 이 무렵 대원군과 만나기 직전에는 채용신이 참빗에 그림을 그렸다고 전해진다. 아마도 가업(家業)으로 이루어지던 참빗에 각종 문양이나 또는 여러 도안들을 직접 제작하였던 것 같고, 그 외에 여러 흥미 있는 그림들은 만들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어떻든 채용신이 어떻게 그림공부를 하게 되는지는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으나 그의 인물화나 초상화 작품들에서 보는 것처럼 대단히 섬세한 사실화법을 줄곧 사용하였고 이는 그가 당시 사대부들의 사랑을 받았던 남종화류의 문인화나 산수화 등의 화풍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채용신은 처음부터 문기(文氣)를 요구하는 수묵화풍을 그리지 않았으며 그러한 공부를 할 수 있는 환경에도 있지 않았다. 오로지 현실적 필요에 의한 실용화(實用化)를 그려야 했고 그 방면에 탁월한 기량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추정은 채용신이 과연 화원이었느냐 하는 의문의 열쇠를 제공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당시 화원(도화서의 직업화가)들의 주요한 일중 하나가 초상화나 기타 기록화를 그리는 것이였기는 하나 화원이 되기 위하여는 사군자나 산수 등의 문기 짙은 수묵화로 시험을 치루었기 때문이다. 그의 화원설은 아마도 그가 고종이나 대원군의 초상을 그렸다는 사실 때문에 확산된 것 같다.
채용신의 초상화는 조선 조 말기 초상화풍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인물이나 초상화의 역사는 대단히 오래되었다. 특히 동양에서는 책색이나 수묵으로 그려진 산수화 이전에 이미 채색으로 그려지는 인물화가 발달해 있었다. 채색인물화는 그만큼 현실생활에 일찍부터 밀착돼 있었다는 것이다.
옛날에 진(眞),영(影), 상(像) 등으로 불려지던 초상화는 대상인물의 특별한 성격을 그려내는 인물화의 일종이다.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초상화의 대부분은 조선조의 것이지만 실상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보듯 역사는 깊다고 하겠다. 남아있는 작품들은 임금의 초상에서부터 나라의 큰일을 한 공신상, 그리고 기노도상으로 불려지는 선비 사대부들을 대상으로 한 그림, 또한 여인의 초상과 승려들을 대상으로 한 승상 등으로 분류될 수 있다.
여기에서 소개하는 채용신의 초상화들은 조선조 초상화 형식 중에서 특히 후기적 특색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대표작들이라 볼 수 있다. 조선조 초상화의 제작방법은 고려시대의 기법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는데 대체로 중국의 전통화법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조선조의 초상화는 임진왜란을 전후로 하여 전기와 후기로 구분된다. 초상화는 얼굴중심으로 하여 그 인물의 정신을 표출해내는 그림인데 윤두서의 초상처럼 얼굴만을 그리기도 하지만 전신으로 하여 앉아있거나 서있는 인물상들도 많다. 대개 전기에는 전신상이 ! 많이 그려지고 있으며 전신 중에도 바닥에 앉아있는 모습이 많은 점이 특징이다. 그리고 후기에는 반신상이 많은데 채용신의 작품 중 최익현상(崔益鉉像)은 반신상이고 황현상(黃玹像)은 평좌(平座)의 모습을 하고 있는 전신상이다.
옷자락 선은 초상화에서 그렇게 크게 비중을 갖는 것을 아닌 듯하나 대체적으로 가늘고 부드러운 철선묘(鐵線描)를 주로 사용하고 있다. 인물화에서 나타나는 옷자락 선은 특히 신선도 등에서 많이 사용하고 있는 유사묘(遊獅描)에서부터 철선묘까지 다양하다. 초상화에서는 특히 철선묘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이는 초상화의 사실적 기법에 맞추기 위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먹색의 사용도 후기로 오면서 연한 담묵(淡墨)의 사용도 많아지고 있다. 채용신의 이 두 초상화에서도 먹선이 거의 나타나지 않을 정도로 약해지고 있으며 반면에 전기에서는 거의 평면적으로 나타나던 옷주름의 요철(凹凸)이 후기에 오면 입체감이 나타나도록 하는 음영(陰影)효과를 사용하고 있다. 전기에서 변화가 거의 없는 철선묘법에 평면적 진채(眞彩)사용이 후기에 오면서 많은 변화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황현상에서 쓰고 있는 관모(冠帽)역시 남자인물상에서는 거의 모든 작품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며 주로 관복을 입었던 전기에 비해 후기에는 형상복차림이 많아지고 있다. 황현상에서 특이한 모습은 손을 그리고 있는 점이며 여타의 초상화에서는 거의 손을 그리지 않고 있다. 그러나 기술적으로는 역시 손의 묘사가 얼굴에 비해 많이 떨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초상화는 이러한 인체의 다른 부분보다 역시 얼굴묘사가 제일 중요하다. 얼굴은 그 사람의 성격적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며 얼굴을 통해서 그 사람의 정신을 표출해 내기 때문이다. 이것을 전신(傳神)이라 하며 이 전신은 눈동자를 통해서 얻어진다는 견해가 오랫동안 내려왔다. 채용신의 초상화에서도 눈동자의 모습이 후기적 기법으로 그려졌으며, 이는 전기의 송시열 초상에서처럼 동자를 농담으로만 처리하였던 것이 동자의 형태를 선으로 두른 모습으로 나타났다. 또한 채용신의 초상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특징은 안면 근육묘사에 있다.
초기의 초상화에서 나타난 안면표현은 거의 대개가 평면적으로 처리되었으며 후기로 내려오면서 얼굴 주름의 표현에 요철을 주어 마치 돌의 준(:주름)법에서 보이는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던 것이 점차 채색을 통한 음영효과로 입체감을 살려내고 있다. 이러한 입체효과를 내는데 있어 채용신은 단순한 설채(設彩)가 아니고 안면 근육의 방향에 따라 세밀한 필선으로 표현해 내고 있다. 이러한 기법은 채용신이 이룩해낸 대단히 특출한 방법이며 초상회화의 새로운 개척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작품 황현상에서는 채용신의 작가적 역량이 최대한 표현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 초상화의 진수를 보여주는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투명한 정자관을 통해 들여다보이는 망건과 머리카락의 모습, 실제로 만져질 것 같은 수염의 표현, 얼굴 살갗 속에 베어있는 육리문(肉理紋:피부주름)의 실제감, 그리고 옷의 질감, 돗자리 올의 묘사에서 가히 신기(神氣)에 가까운 재능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돋보이는 이 그림의 훌륭한 점은 황현이라는 인물이 갖고 있는 우국충절을 간직한 선비의 기상이 얼굴표정을 통해 살아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황현(1855-1910)은 나이 30에 생원시(生員試)에 장원급제하여 벼슬에 나갔다가 나라의 혼란함을 걱정하며 은퇴하여 구례에 머물다가 한일합방이 되자 음독자살하고 말았다. 이 그림은 그 이듬해 그린 것으로 채용신의 손을 통해 우국지사의 고매한 정신이 그대로 살아나고 있다.
채용신은 한국 초상화의 마지막 대가였으며 이후 초상화는 맥이 끊기고 말았다. 가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