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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10 | [신귀백의 영화엿보기]
황량한 영화, 그것이 담고 있는 시대의 황량감 『장미빛 인생』
글/김병용 소설가 (2004-02-03 11:44:50)
김홍준씨의『장미빛 인생』은 매우 진지하면서 황량한 영화다. ꡐ충무로ꡑ 바닥에서는 보기 드물게 탄탄한 영화 이론을 갖췄고 잠재적 실전 능력의 가능성도 인정받고 있던 젊은 감독의 첫 번째 작품, 또한 이 영화는 원작의 성망에 힘입어 보려는 ꡐ계산 속ꡑ과는 거리가 먼 ꡐ오리지널 시나리오ꡑ영화, 그 영화는 과연 어떠할 것이다. 한국적인 영상 리얼리즘의 대가로 지칭되는 임감독 밑에서 수업을 하였으니 아무래도 그 영향이 드러나지 않을까, 아니면 그이가 예전부터 깊이 선호하던 ꡐ블랙 코미디ꡑ류의 영화가 나올까. 결론부터 이야기하면『장미빛 인생』은 이 둘 모두에 해당하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할 수도 있다. 이 영화에는 네 명의 등장인물이 나온다. 가리봉동에서 심야 만화방을 운영하는 여주인, 친구의 배신으로 살인죄 혐의를 쓰고 쫓기는 깡패동팔이, 위장취업이 발각되어 도망치는 운동권 학생, 아르바이트 삼아 정치 현실을 빗댄 무협지를 썼다가 수배자 명단에 오른 작가 지망생 그리고 시대 배경은 악몽 같던 5공화국 시절. 불안스럽게 쫓겨 다니던 남자 셋은 우연찮게 심야만화방으로 모여들고, 음습한 지하 만화방의 눅눅함 속에 몸을 숨긴다. 첫 시작은 이처럼 진지하고 상징적이다. 하필이면 만화책과 무협지가 사방의 벽면을 메운 곳이 공간 배경이 된 것일까. 단돈 1천원만 내면 하룻밤 새우잠이 허락되던 곳, 그래서 ꡐ똥파리ꡑ같은 동팔이도 꾀는 곳, 밑바닥 인생들의 퀴퀴한 땀 냄새, 라면 끓는 냄새, 쌓인 만화책이 썩어가는 냄새… 그 냄새에 시커멓게 찌든 벽지에 고개를 기대로 바라보던, 파란 인광을 번뜩이며 파닥거리던 14인치 텔레비전, 거리서 동시에 방영되던 대통령의 호헌 조치 선언과 저질 포르노 영화… 이쯤 되면 관객들은 화면에 담긴 작의(作意)를 얼만큼 짐작하게 된다. ꡐ새삼스러운가? 그대들에게 묻노니, 80년대는 당신에게 무엇이었던가. 과거를 기억한다는 것은 회한이더냐, 미련이더냐, 아무리 해도 청산되지 않은 마음의 부채이더냐ꡑ 관객들은 차츰 고통스러워진다. 생뚱맞은 질문에 기습적으로 한 방 얻어맞은 것도 불쾌하지만,ꡓ내일이란 단어 자체에 깊은 회의와 불안스러운 희망을 품었던 그때, 어느새 그 ꡐ내일ꡑ이 왔고 우리는 객석에 앉아 돌아가는 필름 속에 우리의 과거를 읽게 되었구나ꡓ하는 스스로에게 자뭇ꡐ새삼스럽다ꡑ되뇌이는 회억. 관객들의 느낌엔 아랑곳하지 않고 필름은 천연덕스럽게 계속 돌아간다. 깡패가 만화방 여주인을 성폭행하면서 둘 사이에는 불편하면서도 미묘한 감정의 교통이 시작되고, 운동권 학생은 알고 보니 여주인의 동생이고, 작가지망생은 ꡐ세상의 많은 것을 경험해야 훌륭한 작가가 된다ꡑ는 다소 빛바랜 금언을 몸소 실천하다가 ꡐ맨드라미 사이에 핀 채송화 같은ꡑ 다방 레지에게 반하고… 미로와 가까운 폐쇄공간으로 점철된 화면을 보고 있노라면 누군가는 그 정밀한 카메라 워크에 찬탄을 보내기도 하고 대부분을 자연광 처리하여 어둑한 화면에 대해서 어떤 이는 ꡒ저렇게 어두운 자연광 처리는 영화『만다라』이후 처음이군ꡓ아는 체 한다. 그때 또 다른 관객 하나가 갑자기 무릎을 치며 혼잣소리를 한다. ꡒ더럽다!ꡓ 과연 그렇다, 더럽다. 영화는 점점 더 관객들을 압박한다. 포르노 영화에 넋을 놓고 있는 지하 만화방의 그 많은 군상들 중에서 ꡐ너ꡑ의 얼굴을 찾아보라! 동네 똘마니 깡패들, 화투짝을 쥐고 있는 노가다 일꾼들, 가출한 청소년… 그 틈바구니에서 남모르게 눈 반짝이며 화면을 쫓던 너.. 너도 그때 거기 있었다. 얼어붙은 정치적 지형도 속, 응달진 능선을 몸 웅크리고 헤매일 때, 감당할 수 없이 주저하던 갈망, 네 육신과 네 영혼의 타는 목마름.. 영화는 본격적으로 황량해진다 물론 영화가 담고 있는 시대가 황당한 탓이다. 작가 지망생이 ꡐ수배자ꡑ명단에 올라 도망 다니는 이야기의 경우, 80년대 초반에 실제로 일어났던 일을 대본에서 채택한 것이지만 그 실제성 여부와 상관없이 우리에게 황당한 느낌을 준다. 희극적인 조건에 진지한 메시지라니.. 슬프고 적막하다. 또, 이 영화가 황량한 느낌을 주는 것은 영화의 곳곳에서 발견되는 외국 영화의 흔적들 때문이다. 굳이 이 영화와 비슷한 시기에 개봉되었던 ꡐ헐리우드 키드의 생애ꡑ가 잘 보여준, 동시대적 ꡐ텍스트상호연관성ꡑ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들의 안목은 『아웃사이더』,『굿모닝 베트남』에서 눈에 익힌 횡덩그레한 영화적 기호들을 이 영화에서 쉽게 감별해 낼 수 있다. ꡐ모방을 통한 창조ꡑ란 비아냥 섞인 칭찬을 하려는 건 아니다. 그만치나 우리들의 감성엔 헐리우드적인 감성이 요지부동으로 자리한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한다는 것..또한 이 영화에서는 ꡐ홍콩 느와르ꡑ의 영향도 쉽게 발견 할 수 있다. 동팔이의 터무니없어 보이는, 마지막 의리에 죽는 행동 역시 다분히 홍콩 갱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연상케 만든다. 기억을 더듬어 보자, ꡐ주윤발ꡑ같은 홍콩 배우들의 대표작이라 할 만한 영화의 메시지는 무엇이었던가, 출구가 없는 상호아, 장렬하고도 허무한 피의 산화에는 어떤 이데올로기가 숨어 있었던가. 중국 전통의 ꡐ의리적 구투ꡑ? 아니다. 97년 홍콩의 중국 반환이란 절망적인 종말의식이 장면 장면을 스산하게 만들었고 관객을 안타깝게 했다. 이 영화가 전하는 황량함은 이처럼 헐리우드의 쟝르영화와 홍콩 갱영화와 닮아 있다. 『앵그리 영 맨』 더하기 『영운본색』과 유사한… 영화는 보여주는 것이지, 설명하는 게 아니다. 그래서 이런 억설(臆設)도 성립된다. ꡒ우리는 황량함을 어떻게 표현하는가?ꡓ ꡒ본대로 표현한다. 아아.. 우리의 영상적 감성은 그렇게 성장했다!ꡓ하지만 이런 황량함은 등장인물들의 황량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 영화의 중심축이 되는 인물은 만화방 여주인이다. 이 여주인이 상징하는 바는 다소 관념적이지만 80년대라는 총체적 상황이다. 그녀에게선 전형적인 모신성의 징후가 보인다. 쫓기는 남동생이 마지막 거처를 삼고, 수배당한 작가 지망생은 ꡐ만화방 총무ꡑ를 자원하게 되고, 감당키 어려운 깡패마저도 싸안게 된다. 그래서 피폐한 살기에 허덕이는 동팔이에게 표면적으로 몸을 앗긴 이면의 심층기호는 감싸고 보듬는 모성성의 발현이 된다. 한데, 이 만화방의 여주인이 비옥하지 못하다. 강파르고 메말라 있다. 우리의 80년대는 그처럼 황량하게 말라붙어 있었다. 동일한 차원의 상징 기호가 또 다른 인물에게서 나온다. 깡패 동팔이는 한쪽 팔에 장미문신을 하고 있다. ꡐ장미ꡑ의 인류학을 상징을 이해하지 않고선 [장미빛 인생]이란 영화 제목과 미스터리에 가까운 마지막 시퀀스-동팔의 유복자로 보이는 아기가 그네를 타고 갑자기 비행기가 나는 황당한 종영-을 이해하기 힘들다. 장미는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죽음, 상반된 두 개의 이념을 동시에 상징하는 꽃 부박한 혀영을 표상하면서 동시에 맑고 드높은 순결을 의미하는 꽃. 하여, 깡패 동팔에게 상당히 배치되는 두 개의 모습이 함께 드러나고.. 또한 장미가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가 흘린 성혈로부터 배태된 ! 꽃이란 설화적 배경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동팔이가 영화 마지막에서 보 인 행동(ꡐ작은ꡑ폭력으로 ꡐ큰ꡑ폭력에 맞선 자의 허무와 분노)은 값어치 없는 것이 된다. 순결한 유혈 없이는, 생명도 또 어떤 것도 탄생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마지막 장면이 영화의 흐름상 썩 매끄러운 것은 아니다. 돌출의 정도가 심해, ꡐ정말로ꡑ 황당하게 만든다.) 이제 극장에 불이 켜지고 관객들은 하나, 둘 자리를 뜨기 시작한다. 그래도 감독은 집요하다. 또 묻는다. ꡒ당신의 삶은 지금 장미꽃처럼 피어나고 있습니까?ꡓ ꡒ ……ꡓ ꡒ당신의 뜨락에 장미 모종 심었던 날들을 기억하십니까?ꡓ ꡒ………..ꡓ ꡒ기억하십니까?ꡓ ꡒ내 마음… 그대가 아네…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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