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10 | [문화저널]
노동이 곧 유희가 되는 경지(?)
-행복과 노동의 철학이야기-
글/김영숙 원광대 철학과 강사
(2004-02-03 11:51:45)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냐 하는 물음은 우리가 인생에 대해 의식적으로 반성해 보기 시작할 때에 가장 먼저 던지게 되는 질문이다. 다른 사람들도 동일한 체험을 했으리라 여겨지는데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진진하게 노력했던 필자의 고둥학교, 대학시절의 경험에 따르면, 나라는 존재가 있어야 된 어떤 절대절명의 필연적 이유는 없다는 것이었다. 내 존재의 필연적 이유가 없다고 해서 죽음을 선택할 만큼 형이상학적인 존재가 아닌 우리 평범한 인간에게 있어서 이제 제기될 수밖에 없는 문제는 바로 그렇다면 우리가 추구해야 할 많나 것은 어떤 것이냐 하는 문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우리 인생의 궁극적 목적은 행복이다. 이때에 행복이란 개념을 어떻게 규정하느냐 하는 문제, 즉 행복의 구체적 내용을 무엇으로 보느냐 하는 것은 사람들에 따라 입장이 상이할 수 있다. 그러나 ꡐ행복=욕망ꡑ을 충족시켜주는 견해에 우리는 일반적으로 동의할 수 있다.
이 행복의 공식이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바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행복을 증대시키기 위해서는 욕망을 최소화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난세를 살면서 마음의 평정(아타락시아)을 얻으려고 노력했던 에피쿠로스가 제시했던 윤리적 덕목이었을 뿐 아니라 모든 종교가 하나같이 제시하는 가르침이기도 하다. 그런데 매우 흥미로운 사실은 우리 인간은 자기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대상들을 대량으로 생산해냄으로써 (예컨대 산업혁명을 통해서) 기존의 욕망을 충족시키고, 그 결과 욕망 자체를 다양화시켜 왔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우리 현대인에게 있어서 욕망은 그것이 지나쳐서 불행을 좌초하는 것이 아닌 한, 욕망 자체가 근본적으로 사악하고, 따라서 근절시켜 버려야만 하는 것으로 생각되기는 어렵다. 아니 거꾸로 문제의 어려움은 욕망이야말로 우리 인간의 모든 행동에 있어서 가장 근원적이고도 강력한 추진력이라는 사실에 있다.
둘째로 행복을 증대시키기 위한 방법은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대상을 최대한 확보하는 일이다. 그런데 욕망충족의 대상을 획득하는 것은 상당한 부분 돈과 권력에 달려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돈과 권력은 어디까지나 욕망충족의 대상을 획득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일 뿐, 욕망충족의 대상을 직접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대상을 만들어내는 것은 오로지 인간의 육체적, 정신적 노동일뿐이다. 이와 같이 노동이 사회전체에 필요한 욕구충족 대상들을 만들어 내는 것인 한, 사회구성원에 있어서 돈과 권력의 정의로운 분배의 문제는 바로 그 노동의 질과 양에 있어서 사회적 기여도에 따른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의 문제로 귀착된다.
그런데 행복, 또는 쾌락의 증대를 인생의 궁극적 목적으로 본 공리주의자 존 스튜아트밀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쾌락주의의 역설(Paradox)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즉 존 스튜아트 밀에 따르면 행복은 우리가 그것을 목표로서 의식하고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우리에게서 멀어지는 성향을 갖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간단하게 행복을 인생의 최고목적으로 단정 짓기 어려운 또 다른 이유는 행복이외에 우리가 고려해야 할 또 하나의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ꡐ행복한 돼지보다 불행한 소크라테스가 더 낫다ꡑ는 밀의 유명한 문구는 바로 이처럼 행복보다 더 높은 상위의 가치가 존재함을 우리에게 시사해준다.
그렇다면 인간을 보다 발전시키고, 성숙시키면서 궁극적으로 행복을 도모하는 것을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자기실현으로서의 노동이다. 노동이란 궁극적으로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자기의 의도에 따라 기존의 대상세계를 일정하게 변형시키는 행위이며, 기존의 재료를 이용하여 새로운 대상(또는 작품)을 창조해내는 행위이다. 인간은 노동 속에서 자기의 제 기능을 발휘하게 되며, 자기의 제 기능을 발휘하는 과정 속에서 인간으로서의 존재가치를 확인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자기의 고유한 독창적인 의도에 따라 새로운 대상을 만들어내는 기능을 발전시키게 된다. 노동이 궁극적으로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라 할지라도 노동 과정 자체는 직접적인 욕구충족을 억누름으로써, 또 인간의 본능적인 나태와 안일에서 벗어남으로써 비로소 성립되기 때문에 노동은 인간의 성숙을 도모한다. 또한 인간이란 존재가 태어날 때부터 어떤 자기만의 본질을 갖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과정에서 각자의 고유한 개성이 형성되어 가는 존재라고 할 때, 한 인간의 구체적 자아는 바로 그 개인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느냐 하는 것에 상당부분 의존해 있다.
그러나 현실적인 관점에서 볼 때 모든 노동이 자기실현으로서의 고유한 활동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오히려 역사는 과거의 노동이 우리가 벗어나고 싶은 힘겨운 고역이었음을 보여준다. 노동이 가능한 하 모든 이들에게 자기실현의 활동이 되기 위해서는 상당한 정도의 경제적 발전이 이루어져야 하며, 가장 단순한 기계적인 육체적 노동은 어느 정도 기계에 의해 해결되어야 한다.
또 이와는 달리 개개인의 측면에서보자면 노동이 자기실현으로서의 활동이 되기 위해서 각자는 그 활동에 대한 전문가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일이 요구하는 고도의 기술습득과 고된 훈련의 과정이 없이는 결코 노동의 자기실현의 경지는 도달되지 않을 것이 명약관화하기 때문이다. 다라서 노동을 통한 자기실현을 바람직한 가치로서 추구할 때 우리는 끊임없이 순간순간의 쾌락을 단념해야 하는 고행을 각오해야 한다.
우리가 일생동안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은 바로 노동활동 속에서이다. 노동이 명실 공히 자기실현의 활동이 될 때 그것은 바로 장자가 언급했던 노동이 곧 유희가 되는 경지다. 노동은 인간의 인간으로서의 제 기능을 발전시키고, 성숙을 도모하며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지만, 노동이 곧 유희가 되는 자기실현의 경지는 이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싸움인 자기와의 싸움이라는 지난한 과정을 수반한다.
우리 모두는 행복을 추구한다. 그러나 우리가 행복을 즉각적으로, 또 지나치게 의식적으로 추구하면 행복은 우리에게서 달아나지만, 나의 일에 순수하고 헌신적으로 몰두할 때. 그리하여 나 자신을 끊임없이 도야하고 또 일을 통해 타인과 만나고 나아가 타인의 행복에 기여할 때 때때로 행복은 우리를 찾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