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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2 | [문화저널]
풍물판의 여자 쇠잽이 나금추
윤희숙 / 문화저널기자 (2004-02-03 11:53:52)
풍물관에서 쇠잽이로 널리 알려진 나금추씨를 그의 국악인생과 더불어 세 아이를 올바르게 키워내 어머니로서 만나는 이른 매우 흥미로웠다. 그를 만나기 위해 도립국악원을 찾은 날은 설을 이틀 앞둔 1월 21일. 몹시도 추운 오후였다. 강습이 막 끝나는 시간이었는데도 채 놓기가 아쉬운 듯 여기 저기에서 장고며 북의 흥겨운 장단이 새어 나왔다. 나금추씨의 강습실을 막 들어서니 그가 사흘동안 못만날 강습생들과 정겨운 새해 덕담을 미리부터 나누고 있었다. 이전에도 나금추씨를 본 적이 있지만 그건 치복에 색깔 고운 띠를 두르고 상모까지 Tsm 무대 위에서 였다. 무대 밖에서 본 그의 모습은 집안이나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어머니나 이웃집 아주머니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인생살이가 그다지 편치만은 않은 듯 그이 얼굴에는 몇 개의 골 깊은 주름이, 세월의 흔적처럼 매여 있다. “그러니까 그가 태어난 해는 1941년 이지요. 뭐 그때야 다들 그렇겠지만 나도 징그럽게 가난한 농사꾼의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고생 많이 했지요.....” 옛날 얘기를 하려니 고생하던 일들이 생각나는 듯 얘기보다 먼저 한숨이 앞선다. 전라남도 강진에서 태어난 그녀는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유복녀가 되었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고 위로 있던 네 명의 오빠들마저 세상을 일찍 떠나게 되자 나금추씨는 고향을 떠나 광주에 살던 언니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되었다. 당시 유교적인 사회 분위기 탓도 있었겠지만 상당히 완고하고 엄격한 집안 분위기에서 자랐다고 그는 그때를 회고한다. 하지만 완고한 집안의 분위기도 나금추씨의 내면 깊숙이 자리잡고 있던 예술적인 기질을 마냥 억누를 수 만은 없었다. 지금이야 극장도 많고 라디오네 비디오네 접할 수 있는 매체들이 많지만, 꿈 많던 사춘기 무렵 꿈을 키울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국극단이나 유랑극단의 지방순회 공연이었다. 그나마 그 당시에는 그것들의 인기를 따라갈 만한 그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이지 너무 멋있고 좋더라고요. 특히 공연이 시작하기 전에 굿판이 벌어졌는데 ‘어쩌면 저렇게 흥겨운 가락이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중학교 다닐 무렵 광주에온 여성국극단의 공연을 처음으로 본 나금추씨가 설레는 가슴을 달랠 수 없을 만큼 좋았던 감정을 소감으로 전해준다. 마치 지금 자신이 열다섯살 소녀인 것처럼. 그들을 따라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배우가 되고 싶은 맘에 공연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배우를 만나 배우가 되는 방법을 물어보기도 했단다. 결국 그들을 따라가지 못한 건 그 배우가 ‘극단의 배우가 되려면 빨래하고 구도 닦고 물건이나 챙겨주는 시다노릇을 3년은 꼬박해야 한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고생한다는 말에 덜컥 겁이 났던 것이다. 열일곱살이 되던 봄. 광주하천의 넓은 공간에 커다란 천막이 둘러쳐지고 가설의 무대가 들어섰다. 당시 줄타기의 명수인 김영철의 묘기와 쑥대머리의 대가로 알려진 명창 임방울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가설극단의 공연을 보고 2년 동안 묵혀두었던 꿈이 꿈틀꿈틀 되살아 났다. “가설극단이 서는 동안 매일 구경을 갔어요. 그러다가 마지막날 용기를 내어 단장님을 찾아가 단원이 되고 싶다고 했더니 부모 동의를 받아오라고 하더라고요.” 그날 밤 극단이 무대를 철수해서 남원으로 떠난다는 말에 다시 오지않을 기회라는 생각으로 마음이 급해져 집에 가서, 당당히 보따리를 챙겨가지고 나올 처지도 아니고 해서, 옷을 있을대로 껴입고 집에 있는 돈을 몽땅 털어서 그대로 집을 나와 버렸다. 이때 집을 나온 나금추씨는 혼이 날까 무서워 식구들과 연락을 끊고 살다가, 20여년 만인 불과 몇 년 전에야 비로서 언니들과 연락을 하며 살고 있다고 한다. 나금추씨를 남원까지 데리고 간 단장은 배우가 되려면 여러 가지 기본기를 먼저 갖추어야 한다며 소리공부나 하고 있으라고 남원 국악원에 그를 소개해주고는 떠나 버렸다. 그곳에서 김영훈선생과 강도근선생께 소리를 배우던 도중, 서울농악경연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조직한 여성농악단의 단원이 되는 바람에 소리공부는 3-4개월 만에 그맏두어 버렸다. “그 농악단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진 여성농악단이었지요. 오갑순이랑 유지화가 그때 같이 활동하던 친구들이었어요. 난 징을 쳤고, 우리 농악단이 그 대회에서 대통령상을 탔어요.” 처음으로 큰 상을 받았고 선배들로부터 재능을 인정받아 결국 그것을 계기로 그는 농악과의 길고 긴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집나와서 국악원 식두들 밥해주고 빨래도 하고 잦은 고생 끝에 제대로 맞는 일을 비로소 찾아낸 것이다. 중매로 만난 장금동씨를 만나 결혼을 하고 전우에서의 생활을 시작했던 때는 그녀 나이 스물 하나가 되던 해였다. “그때만 해도 국악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던 터라 시집 식구들 눈치도 보였고 또한 ‘밖으로만 나돌던 여자가 제대로 살림을 해낼까’라며 주위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보아서 힘이 들었어요”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시댁과는 분가해서 떨어져 살았고, 남편 장금동씨는 국악에 대한 열렬한 팬이어서 나금추의 활동에 전폭적인 지지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한다. 그 자신도 주위로부터 뭇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살림이라면 궂은 일, 마른 일 가리지 않고 억척스럽게 해내 살림하는 여자로서의 자리도 탄탄히 다져 놓았다. 그렇다고 해도 가정을 꾸려야하는 부담 때문에 대외적인 활동을 하기는 어려웠고 전주농고 농악팀 단체강습과 개인강습으로 그나마 활동을 유지할 수 있었다. 슬하에 딸 하나에 아들 둘을 둔 나금추씨가 어렸을 때와는 비교도 않될 정도로 심한 고생을 하기 시작한 것은 남편인 장금동씨가 신병으로 앓기 시작하면서 부터이다. “그저 자식들 여을 때까지만이라도 살아있어 줬으면해서 3년 동안 집팔고 전세금까지 모두 빼내 병구완에 썼지만, 보람도 없이 그냥 돌아가버리고 말았어요.” 큰 딸아이가 대학교 1학년에 다닐 때였다. 아침 먹고 나면 다음 끼니 걱정을 해야할 정도로 살림이 어려웠다. 아이들은 한창 돈을 많이 쓸 나이였고, 차마 돈이 없다라는 말은 입에서 떨어지지 않아 혼자서 가슴앓이를 퍽이나 많이 했다. “그때 김제로 강습을 다녔는데 하루종일 굶는 날도 많았어요. 고통을 잊기 위해 1년 동안 진통제를 먹고 살았지요. 애들이 그런 사정을 아나 누구 주위에서 도와줄 사람이 있나. 정말 죽지 못해서 살았던 세월이었습니다.” 그때를 용케 넘기면서 그는 생활에 익숙해졌고 ‘사람이 살려고 발버둥치면 살아지는구나’라는 이치를 터득하게 되었다고 한다. “딸 아이가 결혼해서 손자를 낳았을 때 그리고 큰 아들 녀석이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 가장 기뻤습니다. 나름대로 국악 활동을 하면서도 아이들이 혹시 비뚤어지거나 잘못되면 어떡하나 하고 걱정을 많이 했는데 곱게 잘 커줘서 아이들에게 너무나 큰 고마움을 느낍니다.” 다른 엄마들처럼 집에서 자신들을 돌봐주지 않는다고 투덜대던 자식들이었는데, 그러나 그가 반 백이 넘는 인생을 살아오는 동안 그를 가장 기쁘게 해준 건 역시 그의 분신들이었다. 전북대 사범대를 졸업하여 교편을 잡고 있는 딸과 연세대 중어중문과 4학년에 다니는 큰 아들이 그르 더없이 든든하게 해준다. 나금추씨는 지금 우석고 1학년에 다니는 막내 아들만 좋은 학교에 입학하면 이젠 더 이상 바랄게 없다고 한다. “국악에 사물은 징, 장고, 북, 쇠이지만 그래도 제일 대우받는 것이 상쇠지요. 여자로서 쇠잽이를 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선배들에게 열심히 배웠고 서울에 있을 때는 남도에서 김재옥 선생을 모시다가 3개월 동안 비원에서 전수 받기도 했지요” 우도농악을 처음 접했기 때문에 우도농악을 하는 것이지 별 다른 이유는 없다는 그이는 “우도농악은 가락이 많고 다양하며 멋이 있습니다. 맺고 다시 풀어내는 맛이 그만이지요.”라고 말한다. 이젠 자신의 활동보다는 제자들의 활동에 더 큰 보람을 느낀다는 그이는 강릉민속경연대회에서 제자들이 대통령상을 받았을 때 정말 기뻤었노라고 한다. “직접 쇠를 칠 때는 아무 생각없이 가락과 연주에만 도취됩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가락을 가르칠 때는 저 사람이 어떻게 받아들일까라는 생각만 합니다. 젊은 층들이 내 나라의 전통과 문화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알았으면 하는 안타까움이 일어요.” 하기야 나금추씨 뿐아니라 그의 남편인 장금동씨도 모두 국악에 미쳐 살았음에도 그들의 세 아이들은 전혀 국악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하니 오죽할까. 상쇠로 문화재 지정을 받고 나서야 비로소 엄마가 하는 일에 격려를 보낸 아이들이 조금은 원망스러운 눈치다. 힘든 일은 피해가는 요즘 국악을 하는 일이 쉽지는 않지만 일단 배우려고 마음 먹었으면 이런 자세로 임해야 한다고 이른다. “국악은 거의 모든 분야가 끈기와 노력을 요구하는 외로운 작업입니다. 중간에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끝도 없이 생기지만 정말로 우리 음악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열심히 배우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선생님들의 목을 꺾는 부분에서는 귀찮아 하더라도 끈기있게 묻고 또 배우려는 욕심도 필요하지요.” 국악을 대중화시키기 위해서는 많이 듣고 보아야 하는데 그런 기회가 많지 않은 요즘의 젊은이들이 국악을 낯설어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결국 교육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나금추씨의 [상쇠춤]은 ‘발디딤새가 무술로 단련된 사람마냥 정확하고 빠르며 힘차고 부포를 놀리는 고개짓에도 좀체 헛장단이 없다’라는 평을 받을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다. 87년에 전라북도립국악원에 들어가서 지금까지 국악을 배우려고 찾아오는 강습생들에게 우리가락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고 있는 나금추씨는 상쇠춤과 함께 판소리, 가야금, 춤에도 일가견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전공인 풍물에만 몰두하면서 제자들 가르치고 우리의 우수한 문화를 널리 알리는 일에 나머지 생을 바치겠다고 한다. 인터뷰를 처음 시작할 때는 그녀의 얼굴에 놓인 주름살이 고생의 흔적처럼 보였으나 인터뷰를 끝낼 무렵 그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아까의 주름살이 어느덧 나금추씨 인생살이에 대한 훈장처럼 당당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마치 예술인으로서의 역할과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훌륭하게 해낸 그에게 가장 어울리는 악세사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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