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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10 | [문화저널]
잃어버린 우리 정신을 찾고 자기 주체를 새롭게 세우는 일
유흥준의 ꡐ미술사, 어떻게 볼 것인가ꡑ (2004-02-03 11:53:52)
문화저널에서 이번 미술사강좌의 첫 번째 강의를 제게 맡겨준 것은 제게 큰 영광이자 또한 커다란 부담이기도 합니다. 본래 미술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주제는 사실 이 분야의 중진이나 원로가 맡아주시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어째 든 모처럼의 기회이고 다시 여러분은 만나기가 어려울 것 같아 저로서는 좀처럼 하지 않았고, 여러분도 역시 쉽게 접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해볼까 합니다. 미술사라는 학문도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19세기 모더니즘의 탄생과 함께 본격적으로 근대적인 학문체계로 성립이 됩니다. 미술사는 이론의 여지없이 인문분야에 해당합니다. 저는 한국미술사를 전공하기 이전에 서양미술사를 전공했었습니다. 서양미술사를 시작하면서 저는 그 지실을 얻은 것이 아니고 서양미술사에서 유물을 해석하는 것이 그토록 훌륭하고 탁월하다는 것에 대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한국의 미술사도 이처럼 하나의 유물 속에서 저렇게 읽어 낼 수만 있으면 얼마나 많은 가치를 찾아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 한국미술사를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독일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미술사를 공부했던 것이 저로서는 다른 사람과는 다르게 한국미술사를 할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에서 제가 그 동안 읽어왔던 독일을 중심으로 한 미술사 학자들이 어떻게 유물을 해석했는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에르빈 파노프스키는 20세기 미술사 최고의 거장으로 꼽히는 사람입니다. 그의 책 [인문학의 실천으로서의 미술사]에서 그는 임마누엘 칸트를 소개하면서 그가 최후의 순간까지도 휴머니티를 고민했었다는 이야기로 글을 시작합니다. 칸트의 저술 가운데 [판단력비판]이 바로 미학에 관한 책입니다. 어떤 사람이 사물을 보았을 때 무엇 때문에 쾌, 불쾌를 일으키는가에 대한 연구가 그것입니다. 칸트는 생각하는 것이 깊으면 깊을수록 오래면 오랠수록 미궁에 빠지는 것이 두 가지 있다고 말합니다. 그 하나가 저 하늘의 별이고 또 하나가 내 가슴속의 도덕률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중세시대에 그 인간성이라는 말이 처음 사용되었을 때 그것은 신성에 대한 상대적인 개념이었습니다. &#43088;나는 인간이기 때문에&#43089;라는 말은 &#43088;나는 신이 아니기 때문에&#43089;라는 의미였습니다. 그러나 16세기를 넘어서면서 &#43088;나는 인간이기 때문에&#43089;라는 말은 &#43088;나는 짐승이 아니고 인간이기 때문에&#43089;라는 말로 그 의미가 바뀌게 됩니다. 즉 인간에 대한 한계성에서 인간에 대한 가치로 중심적인 사고가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같은 인간성에 대한 한계와 가치를 용인하는 가운데 인간이 삶 속에서 만들어냈던 여러 현상과 사물을 종합하고 분류하고 분석해서 체계지우는 것을 인문과학으로 부릅니다. 하나의 현상이 그저 나열되어 있을 땐 그것이 무엇인지를 모르지만 하나의 가치체계로 만들어 냈을 때 그것을 우리는 학문이라고 합니다. 미술사의 예를 들자면 우리나라의 석탑이 지금 2천 개가 있다고 말하고 그치지만 익산 미륵사지에서 경림사지 탑으로 그리고 경상도 의성 탑리의 탑에서 감은사탑, 석가탑으로 이루어지는 일련의 탑의 줄기 20개를 가지고 석탑의 발생과 변천과정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이해하면 나머지 2천 개의 탑은 모두 어디에 속하는지를 알 수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학문의 가치체계라고 하는 것이고 바로 그 점에 학문의 미덕이 있습니다. 영국의 러스키는 위대한 민족은 세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고 말합니다. 고유한 언어 그리고 언어로 기술한 역사, 역사 속에서 만들어낸 문화유산이 그것입니다. 이 세 가지는 서로 제각각 존재하지 않고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지만 그 중에 가장 진실 된 것은 문화유산이라고 말합니다. 언어와 역사는 말하는 사람, 쓰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 바뀔 수 있지만 그러나 문화유산은 그 사람들이 그렇게 만들어 썼을 따름이지 그것을 갖고 훗날 사람들이 그것으로 역사를 이야기 할 것이라고 아무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입니다. 석굴암을 만들었던 김대성이 이 시대의 사람들이 그것들 동양 무비의 예술이라고 말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석굴암을 만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1350년경에 이으러 고려청자가 사라지 분청자에서 백자의 시대로 넘어오면서 고려청자는 잊혀진 도예의 하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잊혀진 청자가 그것을 그저 만들어서 썼던 12,3세기 사람들의 취미와 정서에 대해서 가장 많은 것을 말해준다는 점입니다. 그것을 읽고 알아 낼 수 있다면 우리는 존 러스키의 말대로 문화유산에서 역사의 기술이나 언어의 징표보다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미학은 하나의 철학체계로 존재합니다. 인간의 행동과 사유에는 반드시 이성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감성이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한 논리학자의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했습니다. 이전의 합리주의 논리학이 인간의 ! 감성적 판단은 다 제외시키고 있는데 이것은 결국 반쪽짜리 논리학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논리적 사유라는 것이 아무런 오류 없이 가장 극명하게 구현되는 것을 진리라고 합니다. 즉 이성적 사유가, 논리학이 궁극적으로 찾아가는 것은 진리입니다. 그렇다면 감성의 논리가 가장 극명하게 구현되는 것은 아름다움입니다. 감성적 인식론 즉 감성의 논리학이란 바로 아름다움에 관한 학문입니다. 지극한 아름다움은 우대한 이념보다 더 숭고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름다움을 봤을 때 거기서 감성적으로 인식되는 것은 어떤 뛰어난 논리체계를 본 것보다 더 감동을 주고 우리의 정신세계와 인문정신을 극명하게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미학이 갖는 매력입니다. 미술사는 이렇게 미학과 한 줄기로 발전해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나라의 전통에서 미술사는 미학이 아닌 고고학을 줄기로 해서 내려왔습니다. 고고미술사에서 다루는 고고학과 미술사는 본래 하나의 학문이 될 수 없습니다. 미술사에서 보고자 하는 것은 고고학에서 선사시대 사람들이 살아가던 삶의 방식을 복원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미술작품을 만들어 내면서 그 속에 인문정신을! 어떻게 구현했는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읽어낼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미술사는 편년사로서의 미술사입니다. 몇 년도에 미술작품이 무엇이 있고, 누가 만들었고 하는 것들입니다. 어떤 시대에 만든 가장 유명한 작품이 무엇이다 하는 것들이지요, 그 편년사로서의 미술사를 뛰어넘는 첫 번째 작업이 조르지오 바싸리가 쓴 [이탈리아 미술가열전]입니다. 미술사가 편년사를 넘어 나올 수 있는 것이 이 같은 인명사 또는 화가나 예술가 열전입니다. 바로 위대한 예술가의 삶과 예술을 말하는 그 방식입니다. 바싸리가 르네상스 시대에 쓴 가장 위대한 화가, 조각가, 건축가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그 자체만으로도 이 시대 우리 미술사가나 평론가에게 주는 준엄한 교훈이 됩니다. 바싸리는 미켈란젤로오 동시대를 살면서 그를 자세히 보아왔던 사람입니다. 그렇게 관찰된 화가들의 삶과 인생을 그린 것이 이 책입니다. 어느 화가의 삶을 알고 어떤 그림에 얽힌 사연들을 알고 보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여러분께 하나 묻겠습니다. 단원 김홍도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십시오. 조선후기의 풍속화가, 겸제 정선, 진경 산수의 대가. 그 다음에 말할 수 있는 사람 해보십시오. 그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분의 삶에 대해서 우리가 동경해본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거짓말 같은 사실이지만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단원 김홍도전이 한번도 열린 일이 없습니다. 위대한 화가의 삶과 예술이라는 것. 그가 그 예술을 완성하기 위해서 얼마나 인간적인 노력을 했는가. 그리고 예술적인 노력을 했는가, 그 속에서 그 사람에 대한 연구가 아니라 자신에 대한 반성이 나옵니다. 단원이라는 사람의 삶의 일대기를 읽는 것은 그의 삶을 이해하기 위한다는 것보다 그의 삶을 비추어 나를 볼 수 있기 때문에 소중합니다. 인문과학은 기본적으로 인간학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인간은 빠져버리고 사상사애서는 사상만 남고 미술사에서는 그림만 남았습니다. 인간학으로서의 인문 학을 복원하듯이 미술사도 역시 그렇게 가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서양의 미술사가 연대기나 한 작가의 라이프 스토리를 넘어서 정신사, 사회사, 양식사, 도상학으로 해석해내는 것은 그 밑바탕에 작가들의 일대기를 정리하고 그 삶의 궤적을 뒤쫓아 가는 궁색하지만 반드시 거쳐야 할 작업들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입니다. 한국미술사의 정말 중요한 과제중의 하나는 화가의 삶을 제대로 정립시켜주는 것입니다. 바싸리가 그의 책에서 미켈란젤로에 얽힌 일화와 삶을 소개하듯이 단원이나 겸제의 삶을 우리가 그렇게 알았더라면, 단원이 그린 신선도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하는 그 뒤안의 이야기를 알 수 있다면 그 그림이 우리에게 더 다가오는 것은 역사적으로 인간적으로 훨씬 더 가까이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빙켈만이라는 학자는 그런 식으로 낱낱 작가들과 개별 작품들의 줄거리를 엮었고, 그 자체를 가치체계로 인식했습니다. &#43090;내가 기록코자 하는 고대 미술사는 단순히 시대의 추이와 편년사를 쓰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 말로 역사라는 말은 탐구라는 말이다&#43091;고 했던 빙켈만의 말은 많은 것을 시사해 줍니다. 인간의 신격화, 신의 인간화를 추구했던 痼?그리스 고전미술의 본질이었습니다.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 몇 가지 단계가 있었습니다. 그리스 반도로 도리아인들이 내려온 것이 B.C. 1100년 무렵입니다. 그때부터 B.C700년까지를 그리스 미술의 암흑시대라고 부릅니다. B.C700년 무렵부터 그리스에서 도시국가가 형성되면서 4대축제가 형성됩니다. 이 축제를 위해서 신전이 만들어지고 그 신전에 제물이 바쳐지면서 인체조각이 등장합니다.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인체를 만들어가던 그리스의 전기 고전주의가 지나고 상들은 이제 점점 더 인간적인 모습으로 변해갑니다. 그리스 미술의 변천과정을 보면서 그리스 미술의 미덕을 &#43088;고귀한 단순과 조용한 위대&#43089;라고 표현했던 사람이 빙켈만이었습니다. 그는 단순성이 얼마나 고귀한가 그리고 위대한 감정은 조용한 곳에서 나오지 화려한 곳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는 프랑스 혁명 20여 년 전 화려하고 장식적인 로코코양식이 발달하던 시대에 이 이야기를 합니다. 19세기 최고의 휴머니스트라고 불리는 부르크하르트의 작! 업은 미술사 최초의 시범이었습니다. 그는 미술사를 통해서 자기 시대에 창조된 미의 형태를 이야기했고 그것을 통해서 한 미술이 지향하던 바를 이야기했습니다. 신라시대에 무엇이 만들어졌다 고만 이야기 할 것이 아니라 그래서 어떻게 했다는 것을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르네상스의 정신을 휴머니즘이라고 정의했던 사람이 부르크 하르트였습니다. 그는 당대 최고의 문화사가, 역사가, 미술사가였습니다. 그는 한 시대의 정신과 조건적 개념을 규정했던 것입니다. 위대한 미술사가는 최고의 인문주의자이자 당대 초고의 학자였습니다. 왜냐하면 미술품 구 자체가 지니는 포괄적인 의미가 너무도 크기 때문에 사상사, 문학사, 경제사적인 생활사에 대한 해박하나 이해 없이는 미술사를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르네상스는 천재의 시대여고 미켈란젤로나 다빈치 같은 한 사람의 천재가 모든 것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러나 바로크시대는 전문가의 시대였습니다. 갈릴레이 갈릴레오가 있었고 코페르니쿠스가 있었고 뉴턴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로크 미술과 르네상스 미술은 그렇게 달랐습니다. 인상주의 시대였기 때문에 바로크 미술이 다시 부활했던 것입니다. 미술사에서는 모든 것이 다 부활합니다. 르네상스 시기에서 고전주의가 ! 살아났고 뒤이어 나오는 낭만주의자는 고딕아트들이 지니고 있는 중세의 정신에 심취하고 영혼의 힘에 다시 매료됩니다. 그리고 인상주의 시대에서는 바로크 미술이 받아들여집니다. 한편으로 비엔나에서는 다른 미술사가 전개되었습니다. 그것은 정신사로서의 미술사였습니다. 바젤대학에서의 미술사는 형식서로서 발전해온 반면에 비엔나에서는 형식이 아니라 예술의지가 어떻게 그 시대의 예술을 낳는가를 보는 전통을 세웁니다. 이제까지의 미술사는 그리스 고전미술 즉 르네상스 미술이 위대하다고 하는 전제 속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즉 하나의 회화나 조각을 볼 때 그것은 우리의 감정이 거기에 이입해서 마치 살아있는 물체처럼 인식되는 것이 위대한 미술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전혀 그렇지 않은 미술형태가 하나 있다고 한 것이 비엔나 학파에서 제기됩니다. 그것은 이집트의 미술이었습니다. 이집트의 미술을 보면 정면성의 원리를 갖고 한 사람이 어떤 방향으로 있든지 누구나 가슴을 앞으로 내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도안화되고 추상화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그림은 감정이입으로 감정을 불어넣은 것이 아니고 추상화 되었다고 봅니다. 그러면, 어떨 때 감정이입의 충동이 일어나고 어떨 때 추상적 감정이 일어나는가. 그리스 고전미술의 경우 마치 살아있는 물체처럼 보이게 한다는 것은 인간과 자연이 행복한 조화를 이루고 있을 때입니다. 바로 그때 감정이입이 일어나지만 인간과 자연이 불안한 감정으로 대치할 때 그때는 추상적 감정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 미술은 현세의 미술이고 이집트 미술은 죽음의 미술이라는 것입니다 . 이제 미술은 그것을 감정이입으로 보았느냐 추상으로 보았느냐로 대별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놀드 하우저는 정신사로서 미술사연구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그는 르네상스 이후에 약 50여 년간 지속되었던 매너리즘시대를 분석했습니다. 왜 그토록 괴이하고 이상한 그림들이 출현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정신사적으로 분석한 것입니다. 그 시기는 천재의 시대 이후였습니다. 매너리즘 시대의 화가들은 앞 시대 화가들의 천재성이 짓눌려 있었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드보르작과 하우저의 해석은 달랐습니다. 그 시대는 불안의 시대였고 종교혁명의 척肉늄윱求?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30년 전쟁의 있었던 시대였고 따라서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은 뭔가 불안하고 정신사적으로 방황하고 있었던 한 시대정신을 표현했던 것입니다. 그 매너리즘은 1차대전 이후 초현실주의와 결합해서 부활합니다. 미술사연구에서 한 시대에 대한 연구는 그 이전 시대와 그 시대의 것들이 펼쳐내는 것에 대한 새로운 탐구였습니다. 과거의 유산들은 반복해서 재가치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종합해서 미술사의 줄거리를 얻어낸 것이 아놀드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라는 책입니다. 성모 마리아상도 역시 마찬가지로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합니다. 정연하고 안정된 구도 속에 있던 마리아가 조금씩 변하면서 20세기 1960년대에 들어서는 청바지를 입은 모습으로 나타나 현대문명을 표현합니다. 미술품을 뛰어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보면서 &#43088;아, 지금 밥을 먹고 있구나&#43089;라고만 느끼지 말고 그 이상의 것을 찾아 간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는 만큼 느낀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최후의 만찬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예수 다음에 유다 입니다. 바로 신의 계율로부터 벗어나 인간주의적 해석을 가하는 것입니다. 고려불화와 조선불화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고려불화는 확실한 상하이단관계가 기본입니다. 부처님 옆의 협시보살은 부처님위로 절대로 못 올라옵니다. 그러던 것이 임진란 전에는 슬슬 부처님위로 기어오르다가 임진란이 지나고 나서는 위로 올라와 있습니다. 즉 상하이단의 엄격구도에서 원형구도로 바뀌는 것입니다. 종교의 내용이 귀족 지배층의 종교에서 민중 신앙으로 바뀌면서 화면은 상하관계가 절대적으로 나누어지는 계급질서로 파악되는 것이 아니고 화면이 동등구도로 처리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읽어내는 것이 미술사입니다. 서양미술사 최근 백년의 성과를 통해서 우리는 그림 속에서 철학적이고 정신사적인 것을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하나를 발견해 내기 위해서 수많은 미술사가들의 분석과 시행착오와 대중적 검증이 있었습니다. 한국미술사에는 그만한 연구성과도 없고 그것을 이러한 철학적 입장에서 미학적인 입장에서 쓰겠다는 의지도 없었습니다. 뵐프린이라고 하는 학자는 르네상스와 바로크를 비교하면서 &#43090;르네상스라는 산마루는 담배 한 모금을 피우기에도 가파른 정상이었다. &#43090;라는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문화의 정상에 도달했던 르네상스의 전성기는 바로 그 시점부터 하강을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미술사에서 8세기 후반 B.C750년-760년이 통일신라시대 문화의 전성기입니다. 그 시기에 에밀레종, 석굴암, 불국사 같은 명작들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짧았던 순간을 넘어서면서 통일신라의 문화는 내리막길에 접어듭니다. 왜 그랬는가를 정신사적으로 시대사적으로 규명하는 것이 미술사의 작업입니다. 상감청자에 비해서 조선시대의 분청자는 세계도자사상 유래 없이 민중적이고 서민적인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그 당시의 시대정신 이었던 성리학의 주된 이데올로기가 바로 검소와 소박과 근면이었고 그 시대정신이 도자기에도 체현된 것이었습니다. 다 같은 산수화라도 인간이 자연과 맺어가는 관계에서 여러 가지 유형이 나타납니다. 중요한 것은 보는 시각입니다. 그림을 보든 사물을 보는 신문을 보든 얼마나 생생하게 보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의 안목은 다른 안목에도 통합니다. 사물을 대충 보는 사람은 다른 사물도 그렇게 판단합니다. 미술사를 공부하는 뜻은 당연하게 잃어버린 우리의 정신을 찾고 새롭게 자기 주체를 세우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더욱 본질적이고 중요한 것은 사물을 보는 시각과 현상을 인식하는 방법을 그림을 통해서 확인하고 재확인하는 작업입니다. 종소리는 때리는 자의 힘만큼 응분 하여 들린다고 했습니다. 추사 김정희는 서화감상은 세 가지 방법으로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는 절을 지키는 금강역사의 눈 바로 금강 안입니다. 둘째는 혹 무수 즉 혹독한 세 리의 손끝이라고 했고 마지막으로 핵 지이, 사또가 백성의 탄핵을 듣는 귀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사물을 인식할 때 얼마나 섬세하게 인식해야 하는가 그리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으로 가질 자세는 무엇인가. 그러기 위해서 사물은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에 대한 우리 선조의 가르침입니다. 감사합니다. <정리/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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