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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11 | [문화비평]
누구를 위한 지방자치인가?
글/강준만 전북대교수 신문방송학과 (2004-02-03 11:59:22)
최근 어느 신문에 아주 재미있는 기사가 하나 실렸다. 어느 도에 도지사가 새로 부임해 불건전한 학연 척결을 부르짖고 나섰다는 것이다 그 지역 공무원 사회에선 그 지역 명문고 출신과 그 이외 고교 출신들 사이의 상호 반목이 어찌나 심한지 부작용이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기사는 중앙 일간지들의 지방소식란을 유심히 읽어보면 심상치 않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지방에선 그게 좀처럼 뉴스가 되질 않는다. 그 지방 신문들의 주요 요직도 그 지방의 명문고 출신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파벌주의야 사람 사는 곳이면 어디에든지 있기 마련이지만, 지금 우리나라 지방의 학연, 지연, 혈연을 중심으로 한 배타적 파벌주의는 지방자치의 성공적인 실시를 위협할 정도로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좀처럼 공개적인 논의의 대상이 되질 않고 있거니와 또 사실상 공개적으로는 논의하기도 어렵다는 데에 있다. 우리는 지방자치를 논할 때는 너무 공식적인 측면에만 관심을 집중시켜 또 너무 ꡐ교과서적ꡑ으로만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다. 또 그런 경향의 당연한 귀결로 지나치게 외국의 경험에 의존해 외국으로부터 너무 많은 것을 배우려는 과욕을 부리는 것 같기도 하다. 지방자치의 핵심은 무엇일까?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여러 답이 나오겠지만, 지방자치는 본질적으로 ꡐ자유로운 커뮤니케이션ꡑ을 전제로 한다. 과거 억압적인 중앙집권 체제하에서 지방민들이 가장 큰 불만을 느꼈던 건 모든 의사결정이 중앙에서 권위주의적으로 이루어지고 그것이 일방적인 경로를 통해 지방으로 하달된다고 하는 것이었다. 만약 지방자치가 지방! 내에서의 자유로운 커뮤니케이션ꡑ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면, 그건 억압적인 중앙집권주의를 지방 내에 다시 심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지방언론이 중요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지방내의 ꡐ자유로운 커뮤니케이션ꡑ을 북돋우고 그 결과를 수렴할 수 있는 건 현실적으로 언론밖엔 없다. 공동체적 커뮤니케이션 채널은 아직 일부 농촌 지역에 남아있기는 하나 도시 지역의 유일한 사회적 커뮤니케이션 채널은 언론 이외에 달리 기대할 곳이 없다. 그런데 지금 지방언론의 현실은 어떠한가? 지방언론이 잘 하고 못하고가 문제가 아니다. 그건 나중 문제다. 지방언론은 기본적으로 지방내의 ꡐ자유로운 커뮤니케이션ꡑ을 활성화하기 위해 그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방에 사회적 논쟁의 장(場)이 존재하는가 하는 물음엔 ꡐ존재한다ꡑ고 답할 순 없다 기껏해야 어디에 고가도로를 설치하느니 마느니 하는 정도의 문제. 즉 직접적인 이해 당사자가 있는 문제에 한해서만 논쟁 비슷한 게 부여될 뿐 전체 지방민의 이익 및 관심과 연관된 문제에 대한 논쟁은 찾아보기 어렵다. 중앙집권체제하의 권위주의와 지방자치체제하의 권위주의는 어떻게 다른가? 후자의 권위주의가 전자의 권위주의보다 더 폐쇄적일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사회적 논의의 장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가운데 실시되는 지방자치제는 지방유지와 명망가들이 중심이 된 구태의연한 ‘신 엘리트’의 독무대가 돌 수 있으며, 이는 과거 중앙집권체제하에선 형식적인 차원에서나마 존재했던 ꡐ중앙ꡑ이라고 하는 견제세력의 부재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우려해야 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지방언론에게 많은 걸 요구하지 않는다. 귀가 닳게 들어온 그 ꡐ구조적 한계ꡑ를 모르는 바 아니다. 경제 사정도 어렵거니와 또 그 망국적인 ꡐ서울공화국ꡑ체제하에서 반세기를 살아오느라 중앙지향적인 의식 구조를 갖고 있는 지방민들의 냉대가 심각하다는 것도 잘 안다. 또 지방내 언론사들 사이에 존재하는 치열한 경쟁으로 인해 우선 당장 먹고 살 ꡐ고아고 따내기ꡑ에 하루 24시간도 모자란다는 사정도 잘 안다. 지방방송의 사정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중앙 방송국에 종속되어 예산에서부터 편성에 이르기까지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으며, 신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지방 시청자들이 오히려 지방 방송 알기를 더 우습게 안다는 사실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속 모르는 밖에서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것이지 안에 직접 들어와 프로그램 만들어 봐라! 그렇게 말하고 싶어 하는 방송인들이 많다는 것도 잘 알며 그들의 심정에 공감한다. 그러나 어차피 그 무슨 내용으로 채우든 신문은 매일 만들어내야 하며 방송을 매일 내보내야 하지 않는가. 만약 현재의 여건으론 도저히 그 어떠한 개선도 기대하기 어렵다면, 그 문제라도 속 시원히 밝혀 그걸 놓고 이야기할 마당을 만들 수는 있지 않겠는가 이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방자치제가 실시되면 지방언론이 발전할 것이라고 말하지만, 오히려 그 반대라고 보는 게 옳다. 지방언론이 먼저 발전해야 지방자치제가 성공적으로 실시된다. 시민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가 배제된 지방자치제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은 예전에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런데 현재 시민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가 도대체 무슨 수단과 방법을 통해서 가능한가? 선거 때에 표를 던지는 것 말고 무엇이 있는가? 아니 반사외가 있기는 하다. 그런 반상회에게 그 모든 기대를 다 걸 수 는 없는 일 아닌가. 돈이 많은 중앙 언론은 수시로 여론조사를 실시하지마나 지방언론은 여론조사라는 걸 거의 하지 않는다. 요즘 여론조사비용이 오죽 비싼가. 그렇다고 신문의 독자투고란이 있는 것도 아니다. 가뭄에 콩 나듯이 한 두건 실리는 경우가 없는 건 아니다. 또 그렇다고 신문들이 무슨 ꡐ지상 논쟁ꡑ이니 하는 걸 싣는 것도 아니다. 그 어떤 형태든 ꡐ논쟁ꡑ은 지방언론에서 씨가 말라 있다. 다 알고 지내는 사이들인데 무슨 논쟁이 필요하겠느냐는 말이다. 방송사는 출산에서부터 미용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한 종류의 주부 대상 교양강좌는 주최해도 무슨 공청회니 토론회니 하는 걸 주최한 적이 없다. 지방자치와는 거리가 먼 학술 세미나를 주최하는 걸 본적은 있어도 말이다. 지방 방송사가 공청회니 토론회니 하는 걸 주최하면 안 된다는 조항이 방송법 어디에 있는 건 아닌지 찾아봐야 할 모양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지방언론은 어떤 형태로든 모든 시민들에게 말하고 떠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맘만 먹으면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꼭 신문 지면이나 방송시간을 통해서만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다. 언론사들이 지방의 정보문화센터로 기능하란 말이다. 어중이떠중이 다 떠들면 한동안 시끄럽긴 하라 게다. 그러나 그렇다고 지방 유지님들만 이야기 하겠다면, 그게 무슨 지방자치란 말인가. 훈련을 위한 과도기를 두려워 할 필요는 없다. 보다 ꡐ자유로운 커뮤니케이션ꡑ의 활성화를 위해 지방언론사들은 그 존재 이유부터 다시 확인해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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