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2 | [문화가 정보]
우리고유의 민간신앙과 결합되어있는 사찰
만 복 사
한수영 / 전북대 고고인류학과 조교
(2004-02-03 11:59:43)
만복사에 남아 있는 석조물들의 건립연대는 개개별로 약간의 차이가 있는 듯하다.
발굴사를 통해 밝혀진 가람배치는 좌우가 대칭되는 1탑3금당 형식으로
남쪽에서부터 중문지 목탑지 북금당지 강당지가 있으며 목탑지를 중심으로
동서금당지가 배치되어 있다.
1. 들어가는 말
남원시내에서 순창으로 가는 국도를 따라 1.5km내외 지점의 서쪽을 커다란 절터가 자리하고 있다. 정돈된 건물지의 형태로 보아 당시의 절의 규모가 꽤 큼직했음을 알 수 있고, 오층석탑을 비롯한 석조물들이 곳곳에서 눈에 띈다. 이곳이 바로 한번쯤은 들어 보았음직한 만복사지이다.
이곳은 행정구역상 남원시 왕정동에 속하고 본래 농지로 이용되던 곳으로 1979-1985년에 걸쳐 전북대학교 박물관에 의하여 발굴이 실시되어 지금의 모습으로 변하게 되었다. 만복사의 뒤쪽으로는 덕유산에서 뻗어내려온 교룡산의 한 줄기인 기린산이 있고 이산의 지맥이 동서로 뻗어 절의 좌우를 감싸고 있다. 남쪽으로는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고 丑川이 흐르고 있어 만복사는 배산임수한 곳에 터를 잡고 있다.
만복사의 기원에 관해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고려초기 문종조(11세기초)에 세운 사찰이라 하고, 일설에 의하면 그보다 먼저 신라말기의 도선국사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또한 조선 초기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이 지은 한문소설 “금오신화”중의 “만복사저포기”에는 남원에 살고 있던 늙은 총각 양생이 만복사 부처님 앞에서 배필을 구해 달라고 빌었으며 부처님과 저포놀이로 내기를 하여 좋은 배필을 얻는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어 만복사에 관한 기록을 다시 한 번 볼 수 있다.
만복사는 정유재란 때 일본군에 의해 소실되었다고 전해지며 파괴된 후 여러번 중건할 계획을 세웠으나 워낙 광대하여 복원하지 못한 채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파괴전의 건물형태 및 불상에 대하여는 자세히 전해지지 않고 있다. 둥국여지승람에 전하기를 남아있는 오층석탑 서편에 높이가 35척 (약11미터)에 이르는 동불이 있었다고 하니 당시의 규모만을 짐작할 뿐이다. 여기서는 현재 만복사지에 남아있는 유물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겠다.
2. 절터에 남아있는 유물에 대하여
지금 남아있는 유물로는 오층석탑, 석좌대, 당간지주, 석불입상 등이 있는데 이는 모두 귀중한 보물로 이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만복사 오층석탑(보물 30호)
고색이 짙은 이 석탑은 전라도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백제계 석탑양식이다. 화강암 석재로 상층부분은 결실되었다. 현재 기단부는 일매의 판석으로 되어 있으며 제 1층 탑신부는 일석의 방주형으로 높으며 네 모서리에 우주가 새겨져 있다. 2층 이상의 탑신은 급격히 높이가 줄었으나 3,4,5층의 탑신부의 축소율은 그다지 크지 않다. 옥개석은 두꺼워 둔한 느낌을 주고 있다. 이 탑의 특징으로는 옥개석의 위에 탑신받침을 별도로 끼운 것인데 이 돌은 탑신보다 넓은 판석으로 되어 있으며 이러한 수법으로 미루어 볼 때 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만복사 창건시기보다는 다소 후대의 작품으로 여겨진다.
2)석좌대(보물31호)
6각으로 다듬은 일매의 화강암에 지대석, 하대석, 상대석, 간주, 하대가 표현되어 있다. 하대는 각면에 우주와 탱주를 새기었고 안상이 표현되었으며 그 내부 중심에는 귀꽃형의 화형문이 조각되어 있다. 간주는 낮으며 우주와 중심에 탱주가 있고 하대 상단의 간주받침에 올려져 있으며 위쪽에는 상대받침이 마련되어 있다. 상대에는 연꽃무늬가 조각되어 있는데 파괴가 심하여 자세하지 않다.
3)당간지주(보물32호)
당간지주란 본래 깃발을 달기 위해 세운 기둥으로 만복사 당간지주는 동서로 2기가 배치되어 있다. 장방형의 평면형태로 기둥에는 저혀 조각이 없으며, 꼭대기 부분은 외면이 둥글게 사선으로 처리되었다. 기둥의 내면에 상․중․하로 구멍이 뚫려 있다.
4)석불 입상(보물43호)
오층 석탑지에서 북쪽으로 떨어진 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현재의 지표보다 1.5m 낮게 서향해 있다. 불신과 광배는 하나의 석재로 만들어졌는데 양어깨는 움츠린 듯 좁고 하체도 다소 빈약한 편이다. 머리는 소발이고 육계가 있으며 이마에는 백호공이 새겨졌다. 목에는 3도가 표현되어 있고 귀는 길어서 어깨에 닿고 있으며 얼굴은 눈과 코가 손상되어 뚜렷치 않으나 부드러운 느낌을 주고 있다. 양손은 결실되어 확실히는 알 수 없으나 오른쪽 손은 팔꿈치르 굽혀 들고 있으며 왼쪽손은 아래로 내려 뻗고 잇는 형태이다. 광배는 윗부분이 파괴되었는데 두광과 신광 안에 새겨진 연꽃줄기가 선명하며 그 바깥쪽은 화염문과 화불로 장식되었다. 이 조각은 형식화된 옷주름이나 유자형으로 대칭되게 표현된 법의와 머리가 강조된 신체비례의 표현에서 고려시대 불상의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이 불상은 높이가 2m 가량으로 클 뿐 아니라 “동국여지승람”에 그 제작연대가 확실하게 나와 있어 시대적 특징을 살펴볼 수 잇는 중요한 작품중의 하나이다.
5)석인상
석인상은 당간지주에서 남쪽으로 5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있으며 도로와 접하고 있다. 본래는 2구였으나 동쪽에 있었던 석인은 파괴되어 현재 보관중이며 남아있는 것은 서쪽의 것으로 높이는 1미터 내외이다. 머리에는 육계가 표현되어 있고 귀가 길며 눈은 안구가 튀어나와 화를 내고 있는 형태이다. 사찰장승으로 보는 견해도 있고 불상인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3. 맺음말
만복사에 남아 있는 석조물들의 건립연대는 개개별로 약간의 차이가 있는 듯하다. 발굴사르 통해 밝혀진 가람배치는 좌우가 대칭되는 1탑 3금당 형식으로 남쪽에서부터 중문지 목탑지 북금당지 강당지가 있으며 목탑지를 중심으로 동서금당지가 배치되어 있다. 앞에서 살펴본 석탑지는 동금당지의 북쪽에 있으며 석불입상은 그 북쪽에 모셔져 있다. 그러나 현재 밝혀진 가람의 구조는 조선시대에 중건된 만복사의 모습이며 창건시의 모습은 아니다. 끝으로 만복사와 관련된 이야기가 전하고 있어 몇가지 소개해 보고자 한다.
창건시의 만복사는 대웅전, 약사전, 종각, 나한전, 명부전 등의 불전이 빽빽하게 들어서 잇는 거대한 사찰로 그 경내 주위가 2Km나 되었고, 또한 승려들은 수백명이나 되어 아침에 시주를 얻으러 나갈때와 저녁에 되돌아 올때면 승려들의 행렬이 실로 장관인지라 남원 8결에 만복사귀승이 손꼽혔다고 한다. 이는 과거 이절의 전성기에 있었던 광경을 전하는 듯하다. 또한 만복사 앞을 가로지르는 축천은 수심이 깊어 명주실꾸러미를 다 풀어도 바닥에 닿지를 아니했다고 하는데 축천가에 연꽃을 심어 연못을 만들었다고 하며 이 연못은 남원에서 제일 가는 낚시터로 손꼽혔다고 한다. 그러나 옛날의 연못자리는 축천의 모래가 퇴적되어 지금은 찾아볼 수 없으며 물길조차 지금의 자리로 옮겨지게 되었다. 만복사의 서북쪽으로는 만복사 승려들이 전용화장터였던 곳으로 중상골이라 부르는 곳이 있다. 이 곳에서 화장하여 타고 남은 재를 가방들에 쌓아 놓은 토성에 뿌리며 남원에 재앙이 없기를 빌었다 한다. 이 부근의 논은 썩은 밥배미라 부르고 있는데 수백명의 승려들이 만복사 한곳에 살자니 밥만 하는데도 두세가마니의 쌀이 소모되고 아무리 알맞게 밥을 한다해도 식은 밥이 나오기 마련이어서 여름철이면 쉬어서 먹지못할 음식만도 엄청나, 끼니때마다 이곳에 버려 썩은 밥이 쌓이게 된 이유로 그 논을 썩은 밥배미란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만복사 앞 들은 白들이라고 하는데 만복사 승려들의 빨래터로 수 많은 승려들의 옷을 말리자니 온 들이 하얗게 되어 백들이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다.
또한 음력 3월 24일에는 남원의 풍수지리설에 따라 만복사의 승려들과 남원민들이 이 고장에 재앙이 일어나지 않을 것과 풍년을 기원하는 토성제를 치루었다고 하니, 이를 통하여 만복사는 단순히 사찰의 개념이 아니라 우리 고유의 민간신앙과 결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