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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2 | [서평]
고정관념 털어버리기와 나의 고정관념 소설 “귀무덤”
우한용 / 소설가 (2004-02-03 12:03:04)
소설가가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쑥스러원 짓이다. 더구나 자신의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기는 가난한 집 이삿짐 마당에 내놓은 것만큼이나 괴피스럽다. 나는 그런 불편을 무릅쓰고 자신의 이야기를 잘 하는 편이다. 거기에는 내 나름의 까닭이 있다. 소설은 다른 장르와 달리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하는 글쓰기를 자신의 영역에 포용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소설가가 동시에 비평가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쑥스러움을 무릅쓰고, <귀무덤>의 소재를 얻고 작품을 만든 과정에 대해 한 마디만 하기로 한다. 어느 여름날, 볼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열차를 탔다. 차안은 초만원이었고, 쉬지근한 땀냄새와 승객들이 지껄여대는 소음으로 뒤범벅이었다. 통로에 빼곡한 사람들이 밀고 밀리는 가운데 자리를 찾아 앉은 것이 통로쪽이었다. 통로쪽 자리가 대개 그렇듯이. 팔걸이에 엉치를 비싯비싯 밀어 넣으며 기대어 앉은 젊은이의 등판이 답답하게 눈앞을 가로막았다. 한쪽 어깨로는 그 젊은이의 엉치를 밀어내면서, 의자에 등을 기대고 잠을 청했으나 눈알만 알싸하니 아리고 잠이 오지를 않았다. 거기다가 젊은이가 풀풀 넘기는 신문지가 얼굴에 스치는 바람에 신경이 깔쭉깔쭉 일어섰다. 차마 떠밀고 버리거나 비켜달라고 말하기는 낯간지러웠다. 그렇다고 그냥 견디자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그렇게 불편한 대로 잠시 졸음이 슬핏 지나가는 사이, 아랫배에 오줌이 가득 차올라오는 것이었다. 슬그머니 일어나 사람들 틈을 비집고 화장실에 다녀와 보니 그 젊은이가 내 자리를 차지하고는 아예 코까지 골기 시작한 뒤였다. 목을 톱질하듯 스치던 신문지는 그물망에 구겨져 들어가 있었다. 염치없는 짓거리로 보아서는 젊은 놈을 발로 걷어차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억지로 눌러 참았다. 다 그만한 사정이 있지 않으랴 싶어서였다. 신문이나 훑어보다가 적당한 때에 깨우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물망에서 젊은이의 신문을 꺼내 펼쳐들었다. 칠레든가 아르헨티나든가, 혹은 멕시코인지도 모르겠는데, 술에 취해 길바닥에 쓰러져 자고 있던 젊은이의 눈알을 빼갔다는 기사가 눈에 띄었다. 눈감으면 코 베가는 곳이 서울이라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술취해 길바닥에 자고 있는 놈의 눈알을 빼가다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순간 몇가지 생각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눈알을 빼다가 어디다 쓰려고 그랬을까? 눈알을 빼간 사람 자신이 실명이었나? 아니면, 팔아먹는다? 판다면 얼마를 받을 수 있을까? 심청이가 안맹한 부친을 위해 목숨을 바친 대가는 공양미 300석, 쌀 한 가마 줄잡다 십만원, 심청이 몸값이 대강 3천만원이라면, 그 때나 지금이나 사람값이라는게 헐값이기는 마찬가지. 안구은행이라는 것도 있겠다? 그건 기증자들의 안구를 보관하였다가 필요한사람에게 시술하는 사회제도로 의미있는 일일 터이고, 기증을 강요당하는 경우는 없었을까? 심청이는 혹시 부친의 강요를 못이기고 남경상인들에게 몸을 판 것은 아닐까? 청년이 코를 고는 대로 술기운이 풀풀 올라왔다. 애비의 술값을 벌기 위해 몸을 파는 여식은 없을까? 저 친구를 끌어다가 눈알을 빼내 가지고 몇 억 받아서 사륙제로 나눠갖는다면? 너무 적은 액수가 아닌가? 고개를 흔들어 떠오르는 상념을 쫓아 버렸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게, 아무리 소설적 발상이라고는 하지만, 스스로 생각해도 끔직스런 느낌이었다. 뭐 이런 사람이 있어! 옆자리의 아가씨가 날카로운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얼른 눈을 돌렸다. 젊은이는 습관적으로 아가씨의 허벅지께로 다리를 올려놓았고, 아가씨는 그 다리를 밀어제치느라고, 버러지 제쳐내듯 하는 중이었다. 젊은 자식이... 얼굴이 활활 달아올랐다. 다리를 잘라다가....? 아니지. 아가씨는 구원을 요청하는 그런 얼굴이었다. 젊은이를 두드려 깨우고 싶었지만, 그런 구경거리도 흔하지 않은 것, 두고 보자는 심사였다. 얼마간 꼴을 보고 있는데 젊은이가 능청인지 사실인지 눈을 비비고 일어나서는, 실례했노라는 인사를 굽신 하고는 내가 들고 있는 신문을 나꿔채듯이 해 가지고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나갔다. 젊은이가 사라진 다음, 쓸개도 없는 자식! 아가씨는 일고 있던 주간지를 내게 건네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어디 쓸개빠진 놈들이 한둘이랍디까? 나는 주간지를 받아들며 응수했다. 쓸개를 떼 준다면 얼마를 받을 수 있을까? 간을 빼 준다면? 그런 생각을 하면서 주간지를 풀풀 넘기다가는 박삼중 스님이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전리품으로 잘려간 귀무덤과 코무덤을 파온다는 기사에 눈이 머물렀다. 흙속에 묻힌 귀빼기나 코빼기가 400년이 지나면 형태는 고사하고 흙이나 제대로 남아 있을 것인가? 그런데 그 흙을 거둬오라는 것은 인간만이 하는 의미행위 아니겠나, 우리는 거기에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그런 상징행위를 통해 인간의 정신을 확인하는 것이지 않은가. 나는 계속 생각을 굴리고 있었다. 눈알과 귀무덤. 눈알 대신 팔아먹을 수 있는 인간의 부속품이 무엇인가? 그렇지 콩팥이 있지. 누구한테 팔아먹어야 가장 욕 얻어먹는 장사가 될까? 심통이 순아롭지는 않지만, 늘 발상이 그렇지 않았던가. 조상의 귀빼기 잘라간 일본인들에게 콩팥을 팔아먹고, 그러한 장사 중개를 한국인이 하고... 그런대로 소설적인 구도를 갖춘 이야기가 되지 않겠나 싶었다. 그리고 며칠 자료를 조사하는 가운데 인간의 자존심이라는 것, 인간의 상징행위라는 것 등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러한 소재를 한 편의 소설로 정리하는 데 며칠이 걸렸다. 인간이 자존심을 잃었을 때, 어떤 모양으로 추해지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면서였다. 술취한 놈 눈알을 훔쳐갔다는 것, 천하 못된 놈의 짓거리이고, 지나친 술은 패가망신한다는 교훈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내게 더 중요한 것은 그런 소재가 불러올 수 있는 상상력의 자장이다. 그것은 소재의 힘이기도 하고 소재를 매개로 하는 작가그이 품이기도 할 터이다. 그러한 작업은 고정관념을 털어내는 데서 시작한다. 평소 나의 생각과는 달리 나는 소설에 대한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다. 소설은 인간성을 옹호하는 작업이라는 것이 나의 그것이다. 그 소설이 어떤 형태의 것이든 어떤 종류의 것이든 소설은 결국 인간을 옹호하는 것이라야 한다. 천하 악당이나 잡놈을 그리는 소설이라도 그것이 소설 값을 하기 위해서는 인간을 옹호하고 나서는 것이 아니면 안된다. 우리들의 삶이 망가지고 이지러지는 제반원인이 고정관념에 있는 것이라면, 인간의 옹호는 고정관념의 탈피와 크게 다르지 않다. 고정관념을 버리는 일. 그것이 내 소설작업의 원천인 셈이다. <귀무덤>이 그 예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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