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2 | [문화가 정보]
모악산을 중심으로 16개의 공소가 밀집해 있는
수류성당을 찾아서
최진성 / 남원여고 교사
(2004-02-03 12:04:02)
이번 호에서는 김제군 금산면 화율리에 있는 수류성당을 찾아 보았다. 그동안 주로 공소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는데 갑자기 성당을 언급하는 것은 수류성당이 모악산에 분포하는 공소들의 형성과정을 아는데 중요하기 때문이다.
금산면 소재지에서 모악산 자락을 굽어 돌아 약 5Km 정도 가면 한때 100여 가구 넘게 번성했으나 이제 약 50여 가구 남짓 남아 있는 수류마을이 나온다. 주변이 모악산, 상두봉, 국사봉에 둘러쌓인 이 마을은 동양에서 가장 많은 성직자를 배출한 마을로도 널리 알려져 있는데 모두 14명의 신부와 20여명의 수녀를 배출한다. (사진 1 참고) 이 마을에 천주교 신자들이 들어온 시기는 1895년으로 알려져 있으나 조금 수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첫째는, 필자가 3년 전에 답사할 당시 수류마을과 인접한 시목동 공소에 사는 조재룡(당시 78세)씨가 기억을 더듬어 1862년에 자기 조부님이 박해를 피해 익산군에서 이 곳으로 피신해 살았다고 하였다. 둘째는, 수류에 본격적으로 신자들이 성당을 짓고 살기 전에 주로 거주하였던 곳이 배재( 현 금산사 아래 마을)이고, 이곳에 신자들이 들어와 살았던 때가 1866년(박명규,1990,천주신앙 1백10년의 수류마을, 신앙의 고향 “월간전라” 3월호, p.230-245참고)이었다면 이들 마을이 수류와 가깝게 분포하기 때문에 이들과 형성시기가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그림 1. 참고)
수류 성당은 1895년 전주이씨 이진사의 제실을 사들여 안채는 사제관으로 쓰고 행랑채를 임시성당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07년 48칸의, 한국의 고전적 건축양식의, 목조건물을 지어 성당으로 사용하였다. 1918년 당시에는 이 마을 뿐 아니라 김제, 부안, 정읍, 순창, 고창, 용담, 장성까지 모두 24개 공소에 2,000명이 넘는 신자를 관할하였었다고 한다. 그러나 6.25때 성당이 불타 버리자 이 마을 신자들은 모두 김제, 원평 성당 관할의 공소가 되었다. 그러다가 1959년 현재의 성당을 다시 지었다.
이처럼 지리적으로 교통이 불편한 산간분지에 대규모의 성당을 지었던 가장 큰 이유로는 박해를 피해 모여든 신자들이 모악산 주변에 많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필자가:50,000지형도에 당시 형성된 공소들을 찾아 본 결과 모악산을 중심으로 16개의 공소가 밀집해 있었다. 모악산 주변은 전주 부근에서 가장 가깝고도 좋은 피신처를 제공하였을 뿐 아니라 노령산맥을 따라 임실, 정읍, 순창, 장성 등의 공소들과 산길로 연결되는 신자들의 비밀 교통로이기도 하였다. 실제로 수류성당을 지을 때 위 지역의 공소들에게 온 신자들이 이 길을 따라 와서 노동력을 제공하였다고 한다.
지금까지 수류성다의 형성시기에 대해 알아보았다. 필자의 분류에 의하면 수류성당은 마을 주변의 높은 곳에 위치하여 성소로서의 기능을 강조한 ‘의부형’이고, 지형분류에 의하면 원평천 최상류의 ‘산지입지형’이다. 그리고 교우촌 형성시기별 구분에 의하면 ‘교우촌 및 공소 형성기’라고 할 수 있다.
공소에도 과거에 옹기를 구웠던 흔적이 남아 있지만 이 수류마을도 옹기로 연명할 만큼 궁핍하였다고 한다. 돌과 자갈이 유난히 많고 평지도 좁아서 당시 100여 가구의 신자들이 먹고 살기에는 몹시 힘들었으리라. 이 마을 역시 많은 신자등리 전주을 비롯한 도시로 이사를 가서 이제 약 50여 가구가 남았다. 다만 전주와 가깝고 주위 경관이 조용하여 피정 (천주교 신자들이 자신등릐 신앙생활에 필요한 결정이나 새로운 쇄신을 위해 일정 기간 동안 일상의 생활에서 벗어나 묵상과 기도 등 종교적 수련을 할 수 있는 곳으로 찾아가는 일)의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돌아오는 길에 버스편이 마땅치 않아 매서운 겨울 바람을 뒤로하고 원평까지 걸어나오는데 1시간이 넘게 걸렸. 그런데 모악산 도립공원 조성 과정에서 없어진 공소들을, 이제 어디에서 볼 수 있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