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2 | [저널초점]
80년대 미술운동과 민족 민중 운동 전국 연합
문화저널(2004-02-03 12:05:34)
80년대 미술운동과 민족 민중 운동 전국 연합
민족미술협의회(민미협)와 함께 민중미술의 중심이 되엉온 민족민중미술운동전국연합(민미련)이 지난 1월, 조직운동의 해체를 선언 했다. 80년대 말부터 민중미술 운동의 성과글 새롭게 집적 시켜온 민미련의 해소는 최근 세계적인 사회주의운동 진영의 급격한 변화에 대한 [현실 인식]으로서의 단순한 대응에서가 아니라 그동안 소홀 할 수 밖에 없었던 창작활동을 확대하고 [사람과 창작이 중심이 되는] 운동 형식의 변모를 위한 것이란 점에서 각별한 의미와 함께 관심을 모은다.
지난 1월 9일과 10일 전주 기독교여성회관에서 열렸던 정기 총회를 겸한 해소식에서 전국단위의 연합체 운동의 종언을 선언한 민미련의 해체를 계기로 그동안의 활동과 위상을 82면대의 미술운동속에서 개략적으로나마 정리하고 앞으로의 활동을 전망해본다.
“사람과 창작이 중심이되는 미술운동의 새로운 선언”
민미련의 지나온 5년과 그 전망
김은정 / 전북일보 문화부 기자․편집위원
민중미술운동의 등장은 미술이 특수한 계층의
선택 받은 사람들만의 것 이라는 인식을 씻어냈을 뿐 아니라
우리 삶과 현실 속에 살아 있는 미술의 역할과 기능을 새롭게 인식시키고
활동의 영역을 확대 시키는 성과로 이어졌다.
80년대는 우리 한국 현대사에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정치 사회 경제 문하ㅗ 각 분야가 전반적으로 큰 변화를 이루어 냈던 80년대, 우리나라는 광주민주화운도응ㄹ 시작으로 민중성이 대두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역사의 장이 전재되었다.
80년대의 가장 큰 특징으로 꼽히는 민중성 회복의 상황은 문화예술계에도 일었다. 격변기의 사회적인 변화와 맞물려 그러한 흐름을 자연스럽게 수용하게 된 예술계는 그동안의 반역사성과 반민족적인 사회 구조를 변혁하려는 역할에 예술의 힘을 부여하는 작업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기 시작했다.
미술계에도 민족 민중미술운동이 확산되면서 70년대까지만해도 그 응집력이나 조직력이 미흡했던 한계를 극복해내는 활동이 이어졌고 그러한 작업의 성과는 제도권 미술의 한계를 노출시키면서 기존의 미술에 대한 일반인들의 그릇된 고정관념을 털어내는 결과를 가져 왔다.
사실 80년대의 민족 민중미술운동을 정리한다는 것은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한국현대사의 변혁기로 기록될 만한 80년대의 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성과는 역사와 사회의 변혁에 부응하는 민족 민중미술의 등장이랄 수 있는데 그 성과의 몫이 우리나라 미술의 전체 틀을 변화시키는데 미친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민중민족미술의 등장은 미술이 특수한 계층의 선택 받은 사람들만의 것이라는 인식을 씻어냈을 뿐 아니라 우리 삶과 현실 속에 살아 있는 미술의 역할과 기능을 새롭게 인식시키고 활동의 영역을 확대 시키는 성과로 이어졌다.
이를테면 전시장 중심의 미술과 파행적인 미술교육이 중심이 됐던 기존 미술계의 구태의연한 질서가 깨지고, 생활 속에, 노동 현장속에 함께 있는 미술이 서게 된 것이다.
민중미술운동은 민주화 운동이나 통일운동에까지 그 역할을 증폭시키면서 미술의 사회적 역할을 새롭게 인식 시켰다.
우리의 현실과는 철저하게 유리 된 채 관념적이고 예술지상주의적인 성향이 지배적이었던 지금까지의 미술은 이시대의 대중들과 공동체적인 정서를 공유하기에는 적잖은 한계가 있었던 상황에서 미술의 사회적 역할과 힘을 올곧게 발휘해낸 민중미술운동의 작업들은 자연스럽게 대중들의 공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사회적 역사적 주제를 미술이라는 장르에 수용한다는 것만으로도 어려움을 겪거나 철저하게 고립되어야 했던 80년대 이전의 미술계 상황과 비교해볼 때 그러한 미술계 흐름의 변모는 엄청난 변화이자 발전에 다름아니었다.
그러한 상황은 어찌보면 정치적 사회적 민주화에 대한 강한 열망의 민중의식이 팽배해진 사회 분위기 속에서 미술이 어떤 형태로 존재해야 하는가에 대한 방향 모색의 자연스러운 성과이기도 했다.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비판적 리얼리즘의 제기와 민중적 내용의 민족적 형식의 창출에 중심을 둔 민중미술운동은 단합된 활동을 벌였다. [현실과 발언] [임술년] [두렁] 등의 그룹에서 활동하던 작가들과 민중미술운동에 뜻을 같이하는 작가들이 주축이 되어 창립한 <민족미술협의회>는 80년대 미술운동을 일치된 의지로 꾸려 냈던 중심체였다. 그러나 8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공안정국의 탄압이 더욱 가혹해지자 민중미술운동진영은 보다 조직적인 활동이 필요하게 됐고 내부적으로도 정치선전선동의 미술, 현장미술, 계층운동으로서의 미술이 심도 있게 제기되고 논의되기 시작했다.
미술평론가 성완경씨는 80년대 후반에 들어서 뚜렷하게 보이기 시작한 이 민중미술운동의 변화를 세줄기 양상으로 분석했다. 그 첫째는 80년대 초반에 활발한 활동을 하다가 후반에 와서는 주춤하는 30대 후반과 40대의 직능예술인들, 이른바 전시장 미술의 작가군이며, 두 번째는 광주시각매체연구소를 중심으로 한 반제국주의적이고 주체적인 색채가 강한 미술, 세 번째는 대도시 주변의 노동현장과 지역문화활동을 배경으로한 지역미술운동이 그것이다. 이 중 두 번째와 세 번째의 미술운동이 후반에 와서 상당히 두드러진 활동을 하는데 각각의 성과와 문제점이 있다는 것이 그의 평가였다.
이러한 분위기속에서 미술운동 내부적으로 본격적인 문제제기와 갈등이 싹트기 시작하면서 88년에 이르러서는 정하수 홍성담 송만규 최열 씨 등이 중심이 되어 민미련을 창립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그동안 민중미술운동의 중심체 였던 민미협의 활동이 전시장 중심의 문화주의에 기울고 있다는 강력한 문제 제기와 함께 집단 창작과 현장중심의 미술운동을 표방하고 나섰던 것이다.
88년 7월, “오월 미술전”을 계기로 전국 각지역의 미술단체들의 의지를 모아낸 민미련은 3개월여동안의 건설준비위원회 작업을 거쳐 그해 12월 민족민중미술운동연합을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민미련은 민주화의 투쟁현장과 집회 노동현장이 활동으로 큰 성과를 거두었고 <민족해방운동사>그림 슬라이드 북한 반입 등 자주적 남북미술교류 작업을 추진해왔다. 그러한 활동으로 홍성담의장을 비롯, 서울지역의 민미련 회원 10명이 구속되는 등 공안정국의 탄압을 지속적으로 받았으나 민미련은 현장중심의 미술운동을 활발하게 펼쳐 왔다. 물론 민미련의 그동안 활동들은 [미술의 정치도구주의 편향]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서울에 비해 활발하지 못했던 지역의 민중미술운동을 정착시키는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햇고 특히 80년대 후반부터 민주화를 향한 수많은 집회와 노동운동 현장에 등장했던 걸개그림들의 대부분이 민미련 회원들의 집단차악 성과물들이었으며 그것으로 대중들이 미술의 사회적 역할을 새롭게 인식케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은 소중한 성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런점에서 지난 1월 초 해체 선언으로 조직활동을 마감함 민족민중미술운동전국연합의 조직 해소는 문화계에 충격을 주기에 충분한 일일 수 밖에 없다. 더욱이 그동안 지속적으로 가해졌던 공안당국의 탄압을 단결된 의지로 지켜냈던 민미련이 조직활동의 해소를 선언한 것은 민중미술운동의 흐름에 커다란 변화를 예견케하는 바탕으로서도 큰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지난 1월 9일과 10일 전주기독교 여성복지회관에서 가진 정기총회를 겸한 해소식에서 민미련의 홍성담 송만규 공동의장은 <다시 씨앗을 뿌리며>란 인사말을 통해 “80년대의 역사는 바로 우리의 역사다. 역사주의 관점을 견지하자는 것은 역사로부터 배우는 것을 이르는 말이요 역사 속에서 현재를 비판하자는 의미다. 1992년은 어떤 역사의 물줄기를 타고 흘러온 것인가. 미술로 보면 소시민적 미술운동에서 과학적 미술운동으로의 변화, 그리고 현시기 과학적 미술운동과 존재로부터의 미술운동으로의 전환과정까지를 주의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역사주의의 관점은 그 시대의 사상적 높이를 측정할 수 있는 평가의 나침반이다.”고 말하고 “민미련의 해소는 역사주의의 관점에서 계승보다 혁신을 강조 한 것이다. 그 혁신의 대상은 바로 우리 자신들이다.”고 해소의 절실함을 밝혔다.
민미련의 이번 해소는 단순히 조직운동의 종식에서만 논의되어서는 안되는 또다른 의미가 있다. 사실 민미련의 해소 방침은 각지역 민미련총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일부 회원들이 문제를 제기하는 등 큰 반발에 부딪쳤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집단 창작과 조직활동에 중점을 두고 활동해오면서 현장운동이 갖는 한계를 회원들이 공통적으로 인식하고 있었고 미술운동의 중심은 사람과 창작운동이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지면서 이번 해소를 만장일치로 채택하게 됐다.
전주 겨레미술연구소 소장이자 민미련 공동의장으로 활동했던 화가 송만규씨는 “민미련의 해손느 역사주의적 관점에서 계승보다 혁신을 강조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개인적인 창작활동보다 조직활동에 기반을 두고 있었던 우리 단체의 활동방향이 어떤 형식으로든 변화해야 한다는 인식을 회원들이 절실하게 공감했고 결국은 좀더 다양하고 자유로운 창작활동으로 혁신을 이어나가는 방법을 택하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민미련의 해소로 그동안 조직활동에 매달려 있던 회원들이 부담을 벗고 개인적인 창작활동을 펼치게 되면서 앞으로 민중미술계열의 발표 활동은 부쩍 활기를 띄게 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창작과 사람이 중심이 되는 운동을 겨냥한 발전적 해체를 내세운 민미련의 조직 활동 마감으로 미술운동의 형태는 큰 변화를 몰고 올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이는 곧 90년대 우리미술의 변화된 흐름을 예견케 해주는 바탕이기도 하다. 대중들에게 보다 가깝게 다가서기 위해 창작을 중심으로 한 대중미술운동을 펼쳐 나가겠다는 민미련의 이번 해소 결정은 시대변화에 따르는 자기 혁신의 의지를 회원들이 어떻게 펼쳐 갈 것인가에 대한 관심과 맞물려 미술계의 새로운 바람으로 등장했다.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다. 지금 조직이라는 형식을 벗어던지지만 내일 우리는 더욱 강고한 연대로 어깨와 어깨를 걸고 당당하게 서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