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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2 | [문화와사람]
생이 다하는 날까지 배우는 자세로 공부했던 서예가 허람전
문화저널(2004-02-03 12:06:28)
허람전은 화가의 작화태도로 심성을 제일 꼽는다. “그림으 그린다는 것은 화선지위에 자신의 마음을 그리는 것“이라는 말로 자신의 예술세계를 표현했던 서예가. 그가 살아왔던 인생과 예술은 후세대 예술인들의 모범으로 길이 남아 있을 것이다. 여성 서예예술인으로 개척자적인 활동을 해온 람전 허귀녀(藍田 許貴女,69)씨가 지난 1월 6일 세사을 떠났다. 여성화가들의 활동이 거의 없었던 70년대부터 이 지역 화단에서 활발한 활동을 해 독보적 위치를 다져온 허귀녀씨는 남다른 고통을 이겨내며 예술의 세계를 지켜왔으며 늘 겸손한 예술인으로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본명인 허귀녀(許貴女)보다는 행원(杏園)이나 람전(藍田)으로 더 많이 알려진 그는 동양화의 본질처럼 여겨온 먹의 그림인 사군자에서부터 화조에 이르기까지 살아숨쉬는 듯한 생동하는 그림을 그려왔다. 사군자중에서도 오상고절(傲霜孤節)로 알려진 국화를 매우 좋아했던 허귀녀씨의 국화그림은 그가 가진 특유의 정감을 느낄 수 있으며 남다른 풍류가 풍겨난다. 늦은 나이에 허백련(許百鍊)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서화를 익힌 그녀는 화조를 주소재로한 문인화로 독특한 예술성을 인정받았다. 사군자의 정수를 자신의 내적세계와 맞닿아내기 위해 항상 붓을 놓지 않았던 람전은 “생이 다하는 날까지 배우는 자세를 흐트리지 않겠다.”는 자세로 꾸준히 그림공부를 해왔다. 모필의 끝은 부드러우면서도 예리하며 둥글고 뾰족하다. 예술의 지고한 경지는 만난(萬難)을 겪고 난 이후라야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람전은 종이위의 그림이 생명력을 얻게 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해왔다. 그녀가 ‘예술일’으로 정당한 대우를 받기까지는 남모를 고통을 감내해야 했음을 많은 사람이 알고 있지만 정작 자신은 그런 갈등과 고통을 드러내지 않고 살아왔다. 지병으로 오랫동안 고생을 하면서도 인자하고 부드러운 낯빛으로 많은 예술인들에게 따뜻함을 저해 주었던 그녀는 순탄하지 못한 삶을 살아 오면서도 어느 누구에 뒤지지 않는 곧은 삶을 살다 갔다. “아직도 자신있게 내보일수 있는 그림을 그리지 못한다.”며 항상 겸손한 자세로 지내온 그는 지나친 자기주장 보다는 세상을 순리대로 사는 것이 좋고 똑똑함들이 부딪혀 내는 마찰음이 싫어 주로 자신의 화실에서 생활해 왔다. 국전 9회부터 28회까지 작품을 출품해 15회의 입선경력을 가지고 있고 국전초대작가와 전북도전 초대작가로 활동했으며, 서울을 비롯 대전, 전주, 군산등지에서 가진 개인전을 통해 작품세계를 인정받아 왔다. 남다른 어려움속에서 모은 돈으로 뒤에 숨어 장학사업을 벌였던 사람으로, 또 국악인들의 생활이 어려웠던 시절 친누이나 언니처럼 그들을 도왔던 까닭에 각계각층의 적잖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아왔던 그는 불우이웃돕기를 비롯한 자선전시회등에는 빠지지 않고 작품을 내놓는 서예가로 알려져 있다. 장학금을 내도 익명으로 하여 혜택을 받는 사람들에게 부담감을 주지 않으려는 속깊은 뜻을 지니 그녀는 여러 사회단체에서 벌이는 어려운 이웃돕기에는 적극적으로 나서 전북문화상을 비롯한 많은 공로상과 감사패를 받기도 했다. 허람전은 화가의 작화태도로 심성을 제일 꼽는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화선지위에 자신의 마음을 그리는 것“이라는 말로 자신의 예술세계를 표현했던 서예가. 그가 살아왔던 인생과 예술은 후세대 예술인들의 모범으로 길이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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