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11 | [문화와사람]
능숙한 서예에 바탕한 난(蘭) 그림의 대가
벽하 조주승
글/이철량 전북대 교수 미술교육과
(2004-02-03 12:07:12)
조선조 말엽, 특히 19세기 중반에 들어서면 사군자(四君子) 그림이 많이 그려지고 있다. 이 지역 출신 작가들 중에서 먼저 언급되었던 이정직(李定稷)과 함께 조주증은 그 대표적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이정직이 서체(書體)적 필치를 바탕으로 한 대그림에서 특히 일가를 이루었다고 본다면 조주승은 마다도 난 그림이 뛰어났다고 보여진다. 물론 조주승이 난에서만 그의 기량을 돋보인 것은 아니다. 필자의 부족한 자료에도 불구하고 그의 대그림은 출중한 면이 있다. 그러나 그의 대그림은 작품마다 우열의 폭이 크게 나타나고 있다. 말하자면 어떤 작품에서는 능숙한 필치와 섬세한 대의이해를 바탕으로 한 수작이 있는가 하면 또 다른 작품에서는 비교적 기량이 떨어지고 기운이 살아나지 않고 있다. 반면에 자료의 턱없는 부족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소개하는 난 그림은 가히 수작이라 할 수 있다. 아마도 그는 난. 죽 뿐만 아니라 다양한 먹그림에 관심을 보였을 것으로 믿어진다. 그중 능숙한 서예의 기량을 바탕으로 한난과 대그림에서 그의 면모를 발휘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이렇듯 이정직, 조주승 외에 19세기 중반 이후에 활동한 박규완, 배석린, 김희순, 유영완, 김정희, 이광열, 송기면, 송태회 등이 사군자를 즐겨 그려 오늘날 작품을 남기고 있다. 이들의 작품에 대한 설명은 다시 이루어지겠으나 어떻든 이시기에 이렇게 많은 사군자 화가들이 배출되었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한시대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며 또한 이후 이지역 미술의 한 흐름을 파악하는 단서가 되고 있다.
사군자는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를 일컫는 것인바 이 초목들이 어떤 특별한 상징성을 가지고 중국에서부터 많이 그려졌다. 그것들이 그려지기 시작한 출발은 정확하게 지적되고 있지 않으나 중국의 북송(北宋 960~1124)시대 이후에 문인 사대부들이 즐겨 그렸던 문인화의 소재로 널리 애용되었다. 이들이 그림의 소재로 차용하기 이전에는 시문(詩文)에서 각기 독특한 장점들이 학식과 덕을 갖춘 지식인의 인품에 비유되어 널리 애송되었다. 이들을 함께 묶어 사군자라 칭하게 된 시기는 정확하지는 않으나 중국에서 명(明 1368~1644)나라 이후부터라 할 수 있다. 중국과 깊은 문화교류를 갖고 있던 조선에서는 사군자가 많이 그려지고 있었다. 그중에서 특히 조선조 말엽에 들면 중국의 남종화가 크게 유행하게 되고 더불어 정신적 맥락을 함께 하고 있는 사군자도 크게 유행하게 된다. 이러한 사군자의 유행은 특별히 조선조 말기 사회적 혼란과 국권의 상실 등으로 실의에 빠진 대다수 지식인들의 정신적 안주의 대상이 되었던 데도 큰 이유가 있다 하겠다. 어떻든 이 무렵에는 사군자가 가장 많이 그려졌던 시기이고 그중에서도 난 그림이 특히 유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난 그림으로서 대표적인 화가로는 김정희, 허련, 이하응, 그리고 민영익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활동한 조주승은 1854년에 태어나 1903년에 세상을 뜰 때까지 주로 전주를 중심으로 하여 활동하였다. 호를 벽하(壁下)라 하고 자(字)를 초일(草日)이라고 하였는데 그림은 석정 이정직에게서 배웠다 한다. 그러나 그는 그림을 공부하기 이전에 벌써 시문(詩文)과 글씨를 먼저 익혀 가히 문인화가로서의 소양을 충분히 갖추었다. 뿐만 아니라 음악이나 시조를 잘 읊었고 또한 각처를 여행하기를 즐겼다. 그는 일찍이 중국 북경을 다녀오며 중국의 여러 그림들을 수집하고 감상하였다. 그러나 그가 중국의 그림들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흔적은 없는 것 같다. 여기에 소개하는 그의 난그림은 매우 출중한 기량을 보여주고 있는 걸작인데 당대에 난그림으로 유명하였던 석파 이하응(石破 李昰應)의 작품을 연상시키고 있다. 이하응의 난그림들 중 많은 작품들이 종폭(縱幅:위에서 아래로 좁고 긴 형태)의 그림으로서 대련(對聯:화폭을 두개로 하여 나란히 대치함)식으로 꾸미고 있는데 여기에서도 그러한 구성상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조주승의 이작품은 대련식의 쌍폭이라기보다는 독립된 하나의 작품이거나 혹은 따로따로 구분되어질 수 있는 여러폭의 병풍 그림중의 하나인 듯 보인다. 어떻든 대원군 이하응의 난 그림의 특징, 이를테면 주로 바위에 핀 난이나 화면 가장자리로 바짝 밀어붙여 아래로 늘어지거나 위로 힘 있게 뻗쳐 올려 부치는 힘찬 기개를 보여주는 모습이 조주승의 이 그림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조주승의 이 그림은 보다 더 섬세하고 구체적인 화면 짜임새에 관심을 기울였음을 볼 수 있다. 좌우로 두 무더기씩의 난을 정확한 간격으로 배치하고 한 중앙에 물 흐르듯 유연한 필치의 발문을 적어 넣고 있다. 또한 이하응의 작품에서 흔히 구사하고 있는 농묵과 담묵의 변화도 조주승의 작품에서 발견된다. 조주승을 세무더기의 난은 농묵으로 처리하였으나 오른편 아래쪽의 한 무더기는 담묵으로 처리하여 변화를 주었고 난잎은 농묵으로 하고 꽃은 담묵으로 그려내었다. 한 화면의 난들을 서로 다른 묵색으로 처리하는 방법은 이하응에게서 쉽게 발견되는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두 작가의 공통점은 난잎의 모양새에서 비교될 수 있다. 이하응 작품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당두(사마귀의 배모양-난잎의 독특한 부분)에서 서미(鼠尾:쥐꼬리 모양-난잎의 끝부분)로 이어지는 필세의 극적인 반전과 기운찬 힘에 있다고 할 것이다. 여기에서 보는 그의 작품은 73세에 그려진 말년의 작품으로 이전의 작품보다 유연성이 돋보이는 것이지만 가늘게 뽑아나가다 당두를 만들고 서미의 삐침이 그의 개성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특징을 조주승의 작품이 많이 담아내고 있다. 선의 힘과 유연성에서 다소 떨어지나, 이하응의 난그림의 한 유형이 당대 널리 그려지고 있음을 볼 수 있게 한다. 대원군 이하응은 조주승의 글씨와 난을 보고 창란벽죽(蒼蘭碧竹)이라는 칭찬을 하였다고 하나 실제로 그가 어떤 경로로 대원군의 그림을 공부하였는지 혹은 대원군과 직접적인 교류가 있었는지는 확인되고 있지 않다. 어떻든 조주승은 이지역에서 걸출한 난그림의 대가였음은 작품을 통해 확인된다.
또한 그의 사군자에 대한 뛰어난 필세와 구성력은 목죽도에서도 확인된다. 작은 그림이지만 달필의 경지에 꼿꼿한 선비정신이 배어나는 모습이다. 화면 전체구성이 팔자(팔자)모양의 댓잎들의 짜임새 속에 함축되어 완벽하게 안정감을 이루고 있다. 왼편 마른가지가 힘차게 화면 밖으로 삐쳐 파격을 내고 있는데 화제와 그림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ꡒ필(筆)은 보이지 않고 뜻(意)만 있다ꡓ 라는 옛사람들의 말이 생각되는 작품이라 할만하다. 이정직과 함께 19세기 말 이지역의 대표적인 문인화가임을 알 수 있게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