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2 | [문화와사람]
국악인들의 정성으로 건립되는
명창 권삼득 기념비
문화저널(2004-02-03 12:07:29)
당시 엄격한 신분제도의 사회에서 소리에 미친 양반자제를 집안에서
그냥 둘리는 만무하여 말리고 단념해도 듣지않는 그를 두고 권씨 문종에서는
종중회의를 열어 가문을 더럽힌 그를 멍석말이를 하여 죽이기고 결정했다.
권삼득은 문중의 결의에 순순히 따르면서 죽는 마당에 소원으로 춘향가중
십장가나 부르게 해달라고 간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허락 끝에 그는
마지막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슬픈 곡조를 한 대목 불렀다.
19세기초 판소리 명창들의 이름의 역사의 지평에 떠오르기 시작하면서 거명이 되는 소리꾼들은 우춘대, 권삼득. 모흥갑이었다. 이들중 권삼득은 국악의 본고장인 이 지역 출신으로 우리 판소리사에 큰 업적을 남긴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국악협회 전북지부(지부장.배기봉)가 주축이 된 <국창 권삼득 기적비 건립추진위원회>가 지난해 구성되어 권삼득의 생애와 예술세계를 되짚어보고 그 정신과 맥을 오늘에 되살리는 작업의 일환으로 먼저 그의 기적비(記蹟碑)를 판소리의 본고장인 전주에 세우려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송흥록, 모흥갑, 염계달, 고수관, 박유전, 신만엽, 김세종 등과 더불어 8명창 중의 하나로 꼽히는 권삼득은 완주군 용진면 구억리에서 1771년 권내언(權來彦)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명문집안인 안동 권씨의 후예로 태어났음에도 당시 양반으로서도 꿈도 꾸지 못할 소리꾼의 길을 걸은 그는 양반 출신 소리꾼인 ‘비가비’로서는 최초의 인물인 셈이다. 권삼득이 태어난 완주군 용진면 구억리는 전주에서 봉동 가는 길로 가다가 전주시를 벗어나 바로 만나는 초포다리가 있는 곳에서 5백여 미터쯤 북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지금도 80여 세대중 25세대가 안동 권씨 집안인 이 마을은 권삼득의 조상들이 대대로 터를 잡고 그의 후손들이 지금껏 살아온 마을이다. 그의 아버지가 기록한 이우당집(二憂堂集)}(이우당은 아버지 권래언의 호다)에 의하면 삼득(三得)은 그의 호이고 이름은 정(政)이었다고 전해진다.
권삼득은 좋은 양반 집안에 태어나서 한문공부를 했으나 글보다는 음악적 재질이 뛰어나서 소리공부에 전념했다고 한다. 얼마나 소리 공부에 미쳤던지 다른 지방으로 나들이 갈적에 양반이라 집에서 떠날 때는 나귀에 마부까지 딸려 출발하지만 향리를 벗어나면 마부를 말에 태우고 자신은 말고삐를 잡고 신나는 소리를 부르며 여행하곤 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당시 엄격한 신분제도의 사회에서 소리에 미친 양반자제를 집안데서 그냥 둘리는 만무하여 말리고 단념해도 듣지않는 그를 두고 권씨 문종에서는 종중회의를 열어 가문을 더럽힌 그를 멍석말이를 하여 죽이기고 결정했다. 권삼득은 문중의 결의에 순순히 따르면서 죽는 마당에 소원으로 춘향가중 십장가나 부르게 해달라고 간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허락 끝에 그는 마지막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슬픈 곡조를 한 대목 불렀다. 허락 끝에 그는 마지막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슬픈 곡조를 한 대목 불렀다. 그 소리가 어찌나 슬펐던지 소리를 듣던 사람들이 깊이 감동되어 눈물을 쏟았고 문중 어른들은 그 재능을 아깝게 여겨 그를 족보에서 제명하고 쫓아내는 것으로 멍석말이를 대신한다는 결정을 다시 내렸다는 유명한 일화는 지금까지도 널리 전해지고 있다. 이외에도 여러번 죽을 고비를 당할 때마다 뛰어난 소리 실력으로 위기를 모면한 설화들이 판소리꾼의 길을 걸으면서 그가 겪은 수많은 고통들을 보여주는 예가 되고 있다.
권삼득은 ‘권삼득 덜렁제’라는 새로운 판소리 선율을 도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덜렁제는 설렁제. 권제. 권마성조(제) 등으로 일컬어지기도 하는데 지금도 소리꾼들이 이 선율로 된 대목을 부를 때면 “권삼득씨 덜렁제로 떠들고 나오는디~”하는 식의 말을 덧붙여 그것이 권삼득이 만들어낸 선율임을 꼭 밝힌다. 덜렁제는 고음역의 소리가 연속되다가 뚝 떨어지는 음이 출현한다거나, 저음역에서 갑자기 치솟는 음이 출현하는 등 소위 도약선율을 많이 사용하여, 매우 씩씩한 느낌을 준다. 이 덜렁제 선율은 <흥보가>의 [놀보 제비 후리러가는 대목], <적벽가>의 [위국자의 노래], <춘향가>의 [군노사령이 춘향을 잡으로 가는 대목] 등에 쓰인다. 계면조의 가락이 유행하던 초기 판소리에 남성적인 덜렁제 선율을 도입하여 판소리의 표현 영역을 넓힌 권삼득의 업적은 국악사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권삼득을 기리기 위한 사업이 전에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지난 91년 문화부의 지원으로 그의 출생지인 구억리에 기념표석이 세워졌기는 했지만 그것은 관의 무성의하고 형식적인 자세로 고증도 제대로 거치지 못했고 예산에 맞추기에만 급급하여 지나치게 초라하게 세워졌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현재 국악인 1백 50여명이 기금모금에 참여하고 각계각층의 뜻이 모아지고 있는 권삼득 추모비 건립 작업은 그동안 예술인으로 정당하게 평가받지도 못하고 쓸쓸하게 방치되어있던 판소리명창의 예술사적 권위를 회복시키는 일이 될 것이다. 전남 보성을 중심으로 명창들의 맥이 잘 이어지고 있는 것과는 달리 입으로는 끊임없이 국악의 본고장임을 내세우고 있으면서도 판소리명창들의 기념비하나 번듯하게 세워놓지 못한 전북 국악의 면모를 새롭게 가꾸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이번 작업은 의미있는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총사업비 3천3백 50여만원이 쓰여지는 이번 사업은 오는 4월 16일 본격적으로 기적비 제막식을 갖고 그즈음에 추모국악공연을 대대적으로 가질 예정이다. 상당수 국악인들이 참여하여 이미 1천 8백여만원의 기금이 마련된 추모사업회는 국악인뿐만아니라 이지역의 사회단체나 기업인들의 참여를 적극 기대하고 있다, 추모비가 세워질 부지로는 전북 도립국악원광장과 전주 덕진동물원이 강력하게 거론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