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3 | [문화시평]
축제문화의 창조적 지평을 향하여
다가공원에서 이루어진 정월대보름 굿에 관한 단상
김 익 두 / 전북대 인문대 강사
(2004-02-03 13:54:30)
오늘날 우리가 봉착한 가장 큰 불행 중의 하나는, 이젠 세상이 ‘인간적인’ 문제에 대한 언급없이도 ‘잘’돌아간다는 비관적인 인식일 것이다. 인간에게 남은 것은 ‘죽음의 형식’이며, 오직 이 신을 복종하는 사자들과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 뿐이라는 인식은, 특히 우리와 같은 이상의 황폐화가 깊어질대로 깊어진 환경에서는 더욱 심각한 현상으로 필자에게는 보인다.그것은 작금 국내외의 모든 현상들이 잘 말해주고 있다. 아무 대책없이 맞이하게 된 경제난국, 정치적 이상의 극단적인 소멸, 세계 정치의 자본주의화, 가속화 되는 지구환경의 파괴 등은 다 그러한 상황을 잘 보여주는 증거들이다. 이러한 현실속에서 우리의 문화 - 좁은 의미의 문화 - 좁은 의미의 문화 - 를 운위한 다는 것은 자칫하면 병자의 잠꼬대나 문화의 탈을쓴 물신주의의 횡포일 l수도 있다.
‘우리문화’는 지금 어떤 상황속에서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 필자는 매우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 그 단적인 예로, 문화의 꽃이라 이르는 예술 분야에서 오늘날 나타나고 있는 실험성과 창조성의 극단적인 퇴조 현상을 들수 있다. 그 중에서도, 공연예술 분야에서의 그러한 퇴조와 불모화 현상은, 근래에 와서 아주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전통적인 공연예술가들은 이른바 무형문화재라는 안일한 제도 속에 함몰되고 고착되어 가고 있으며, ‘현대적’인 공연예술가들은 전통적인 바탕과 소양을 기르려 하지 않고 기를 수 있는 기회도 거의 없다. 그러다 보니, 전통의 부싯돌과 현재의 부시가 서로 만나 힘차고 예리하게 부딪칠 때 비로소 타오르게 되는 의미와 창조의 불꽃은, 이제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렵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때에 전주 다가 공원에서 행해진 정월 대보름 굿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문화적인 반성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첫째, 우리의 이 공연행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전주라는 한 도시의 문화 전체가 아무런 실제적인 변화의 계기 없이 올해의 정월보름을 지나쳤을 것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굿은 전주라는 한 도시의 공연예술, 특히 축제적인 공연예술의 창조적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자발적’으로 모인 사오백명의 청.관중들의 굿판에의 자발적인 참여는 그 점을 잘 보여준다.
둘째, 그 축제적 가능성은 바로 축제의 양식으로부터 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그 양식의 프레임은 우리의 전통 농어촌 마을굿이었고, 그 중에서고 통합의 중심을 풍물굿에 두는 마을굿 형태를 취하였다. 풍물굿을 통합의 중심으로 하는 마을굿 양식은 중부 이남, 특히 도작 중심지인 호남지방에서 가장 폭넓고 다양하게 이루어져 온 양식이다. 이 양식의 요체는 풍물굿이 지니는 집단적 공동체적 신명의 도발력이 있다. 이 신명의 도발력이 세세풍속이라는 문화적 관습과 아주 잘 결합된 것 중의 하나가 이 정월 대보름굿이다. 집단적인 신바람을 불러일으키는 일은 오늘날에 와서는 우리의 전통적인 축제 관습과 연결시키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번의 공연은 이 점에서 성공했다.
셋째, 우리는 이번 공연을 통해서 우리의 새로운 공연양식, 소외의 양식이 아닌 관계회복의 양식, 분리의 양식이 아닌 통합의 양식, 죽음의 양식이 아닌 살림의 양식으로서의 새로운 공연 양식의 지평을 열어나가는 작업의 계기를 잡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 핵심은 이번 공연에 참가 한 사람들이 모두 확인한 바 있는 ‘청.관중의 공연자화’원리에 있다. 필자가 보기에는 이 점이야 말로 우리 풍물굿이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공연예술적 가능성의 원천이다. 우리의 전통공연예술 혹은 예능 중에서 오직 풍물굿만이 공연에 참가한 청.관중들을 공연자로 거의 왕ㄴ전히 변화시킬수 있는 것이다. 이 점은 무당굿도 판소리도 탈춤도 할 수 없다. 풍물패의 반복적이고 순환적인 기악의 연희와 춤동작은, 마침내 청.관중들의 신명을 도발시켜 굿판 안으로 끌어들여 공연자가 되게 하고, 굿패 자신들은 뒤로 물러나 그 공연의 반주자가 되어버리는 이 혁명적이기 까지 공연양식은, 우리의 새로운 공연예술의 지평, 살림의 지평을 열어나가는 데 있어서 반드시 참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넷째, 이번 공연에서 또 하나 빠뜨릴 수 없는 것은, 종래의 풍물굿 공연에서는 볼 수 없었던 ‘합굿’ - 어떤 지역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여러 마을 공동체의 굿패들이 한 장소에 모여 벌이는 연합적인 형태의 굿 - 형태를 위했다는 점이다. 종래에 이루어진 젊은층의 풍물굿 공연은 이런 형태를 거의 볼 수 없었으며, 필자가 보기로는 이러한 시도가 의식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이 지역에서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이러한 합굿 형식은 전북지역에서만해도 전통적으로 남원의 아영면 일대. 익산의 금마 함열지역, 전주의 우아동 평화동지역, 고창읍지역 등에서 확인해 볼 수 잇는 중요한 공연양식이다. 이 양식은 마을 단위의 대동굿인 마을굿이 지역단위의 대동굿으로 확장된 형태라는 점에서 그 형식상의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위로부터의 통제 형식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자발적 형식인 이 지역연합 대동굿 형식은, 앞으로 우리 사회의 각계각층의 두루 침투해 들어가, 새로운 문화적 변화의 활력소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이 전통적 형식을 잘 변이 응용하면, 깊어질 대로 깊어진 각 지역간의 골 - 호남과 영남, 남한과 북한 등 -을 좁힐수 있고, 나아가 우리의 진정한 ‘통일굿’의 형식도 바로 여기서부터 그 중요한 단서가 잡히게 될 것이다.
다섯째, 이번 공연에서는 이밖에도 전통 마을 굿이 가지고 있는 요소들 - 무당굿, 줄다리기, 음식나눔 등 -을 두루 활용하려고 노력한 점도 돋보였다.
그러나 이상과 같은 좋은 점도 있었지만, 몇가지 문제점들도 드러났다. 예컨대, 무당굿의 지나친 놀이화, 좌도 풍물 굿패들의 연합굿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볼 수 없었던 ‘윗놀음’ 부자연스럽게 드러난 짖ㄴ행자 측의 의도성 등은 다시 반성해 볼 필요가 있는 것들이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분명히 이러한 행사는 오늘날 근본적으로 자생적인 문화혀상은 아니며, 일종의 문화운동, 축제운동, 연극운동 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이 행사를 계기로 해서 전주지역의 ‘도시민속’ 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새롭게 변화되기를 바라고, 또 그러한 변화는 특히 이번행사를 마련한 분들의 미래지향적인 반성과 학습과 실천을 통해서 착실히 이루어지리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