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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3 | [문화비평]
영화「홍등」 감출수 없는 여성의 현실, 그리고 도전
류 수 연 / 전북대 대학원 (2004-02-03 14:10:44)
영화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는 경우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마도 주연 배우나 감독을 보고선택할 것이다. -본인과 마찬가지로- 반드시는 아니지만 유명한 영화 배우나 감독은 그 영화를 보려는 많은 관객들에게 이전의 영화에서 보여 주었던 재미(?)를 예상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 영화 <홍등>도 예외는 아니다. 사회 민주의권 영화, 특히 중국의 영화게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장예모 감독과공리의 콤비로 이루어진 이 영화는 <붉은 수수밭>,<국두>의 성공에 이은기대를 갖게 해주었다. 더욱이 작품이 여성의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사살은 여성관객중 한 사람으로서 필자의 호기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하였다. 영화의 줄거리는 비교적 단순하고 상투적이다. 여대생인 주인공 송련이 가난때문에 대부호의 네번째 첩으로 시집을 갔다가 처첩들간의 시기와 암투, 그리고 철저한 남성위주의 가부장적 가풍에 적응하지 못하고 끝내 미쳐버리고만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장예모 감독은 이러한 상투성 속에서 전제적인 가부장제 속에서 이용되고 파멸되는 여성의 현실을 탁월하게 묘사해내고 있다. 영화의 전편을 통하여우리 - 송련과 관객-를 압도(?)하는 것은 홍등의 붉은 빛과 시종일관 대형화면을 가득 채운채 끝도 보이지 않는 대저택이다. 동양인의 관점에서본다면붉은 색은 정열보다는 권위를 상징한다. <홍등>의 붉은 색도 역시 남녀간의 정열보다는 특권을 상징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분히 동양적인 세계관을 엿 볼 수 있다. 저택에서 홍등은 주인에게 선택되어진 여인만이 밝힐수 있는 절대적 특권이다. 저택의 사람들은 세개의 서열로 분류된다. 먼저 저택의 주인이며 가풍의 주체인 남성이다. 두번째 서열은 남성의 비호를 받으며 홍등을 밝힌 한 여성. 그리고 여인들이다. 결국 주인인 남성을 제외한 여인들에게 있어서 내용적인 서열은 홍등에 의해서 결정된다. -전날 홍등을 밝힌 한 여인만이 다른 여인들의 우위에 설뿐이다- 가풍이라는 남성중심적 불문율에 의해 교묘히 조장된 이러한 홍등의 일회성은 여인들의 치열한 암투를 유도하고 있다. 미래에 대한 호기심은 불완 전환 인간의 본능일짇 모른다. 책이나 드라마를 볼 때와 마찬가지로 영화를 보면서 관객은 인물에 대한 주어진 정보와 현재의 정황에 의해 앞으로 일어날 사건을 예견하고 그에 대응하는 인물들의 특정 반응을 한다.그리고 그러한 기대가 얼마나 강한 설득력을 갖고완성되느냐에 다라 감동의 크기가 결정된다. (물론 써스펜스나 스릴러의 경우는 관객의 기대를 얼마나 철저하게 뒤엎을 수 있느냐에 따라 작품의 성공여부가 결정되기도 하지만) 그런 점에서 <홍등>은 작품의 완성도를 의심하게 한다. 송련은 중국 개화기에 대학을 다닌, 우리 식으로 표현한다면 시니여성인 셈이다. 또한 극 중에서도 창극배우인 세째 마님, 하녀인 안아,그리고 전형적인 여성인 둘째마님과의 끊임없는 대비가 진행되는 가운데 관객은 송련의 배운 자로서의 현명한 처신을 기대하게 된다. 그러나 송련의 행위는 다분히 자포적이고, 감정적이며, 허무적이다. 영화의 서두에 송련은 사흘을 우는 어머니 (계모)의 감정적인 호소에 시집 갈 것을 결정하고 ?가 가치의 척도가 되는 사회통념에 따라 부호의 네번째 첩 자리를 선택한다. 즉 송련은 혼인을 결정하였을 때부터 스스로를 포기하였다는 인상을 심어주고 있다. 저택에서의 삶도 마찬가지다. 부호의 첩이 되는 것을 꿈꾸는 철없는 하녀 안아의 시기에 대한 감정적 대응, 안아와 결탁하여 자신을 모함하는 둘째마님의 귀를 자르는 행위, 그리고 비인간적인 가풍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저항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태도 등이 바로 그렇다.영화가 진행됨에따라 송련에 대한 관객의 배신감은 강도가 더해진다. 결국 안아의 염탐과 둘째마님의 음모로 인한 봉등(우리 식으로 표현한다면 일종의 소박이다)의 분풀이로 어린 안아를 죽게하고, 자신과 이해관계가 형성한 세째마님 마저도 취중 실언으로 죽음을 당하게 만드는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하면서 송련이라는 인물은 설득력을 상실하고 만다. 권력의 속성을 이용한 性의 도구화를 고발하기 위해 장예모 감독은 의도적으로 남성을 배경화 하고있다. 영화가 게속되는 가운데 저택의 주인이며 지배자인 남성은 의도적으로 배경속에 함몰되거나 뒷모습, 목소리 등으로 표현되는 등. 홍등에 의해서만 존재가 확인된다. 이와같은 남성의 상징화를 통해 영화 <홍등>은 사랑이라는 감정적 호소를 배제하고 남성중심의 제도에 의해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하고 성의 대상으로서 이용되고 결국파멸에 이르고 마는 여인들의 비애를 고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송련과 첫째마님의 아들 비포와의 사이에 깔린 끈끈한 감정의 복선들은 마치 사랑만이 구원일 수 있다. -국내 개봉되었던 장예모 감독의 영화 <붉은 수수밭>, <국두>에서는 진실한 사랑이 하나의 구원으로 설득력있게 제시되었던 것과는 달리-는 통속성마저 표출하고 있어 영화의 전체 구도를 망치는 사족의 구실을 하고 있다. 다섯번째 마님이 다시 시집을 오고 송련은 미쳐버린 채 환히 밝혀진 홍등속에서 맴도는 마지막 장면은 허무적 분위기를 한층 더 가증시킨다. 가부장제의 벽은높고도 험하여 여성들의 도전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 바로 현실이라고 조소하는 듯한 결말은 문제적 상황의 영화적 해결을 기대하던 관객을 실망시키고 있다. 그것이 바로 감출수 없는 여성의 현실이라고 외치려는 것이 제작의 의도가 아닐까? 그렇다면 오늘의 현실에 비추어 보아 분명히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알수 없는 아쉬움 속에서 영화관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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