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11 | [문화저널]
스스로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행과 기행문
글/이재현 어린이 글쓰기 지도교사
v(2004-02-03 14:11:27)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는 가을이다. 이때가 되면 이곳저곳 산이나 들을 찾아 구경 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요즘은 꼭 가을뿐만이 아니라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에 관계없이 주말이면 가족단위로 여행하는 일이 어느 새 생활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고 있다.
작년 이맘때의 일이다. 서울에 사는 선배언니한테서 한숨 섞인 전화가 왔다. 국민학교 4학년과 2학년의 두 딸, 그리고 여섯 살짜리 아들을 데리고 전라도 지역의 역사 유적지를 돌아보았다고 한다. 잘못된 관리를 응징하고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일어선 동학혁명의 유적지를 보여준다는 것을 그저 어린이 공원이나 수영장을 가는 곳보다 훨씬 뜻 깊은 일이라고 남편도 대찬성이었단다.
무엇보다 도시에서 학교와 학원, 집으로만 맴도는 아이들에게 가을의 맑은 공기며 높고 파란 하늘, 희한하게 생긴 구름들, 길가의 가로수, 먼 산의 단풍잎, 들에 핀 작은 들꽃들을 실컷 보게 하는 것이 너무도 기뻤단다. 그래서 차 안에서 그저 떠들고 먹는 것에만 정신을 빼앗긴 아이들에게 끊임없이 관심을 돌려 보려고 갖은 애를 썼다는 선배언니의 이야기다.
모처럼의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일기 쓰는 시간이 되었는데, 이틀 동안 보고 느낀 것들이 많으니 자못 기대하고 있었단다. 그런데 웬 걸? ꡒ아, 글쎄 큰 맘 먹고 몇 달을 별러서 돈 들여서 여기 저기 끌고 다녔는데 일기장에 고작 뭘 썼는지 아니? 아파트 계단에서 넘어진 이야기, 또 동생하고 싸운 이야기를 썼지 뭐냐. 집에만 있던 날하고 내용이 똑같더라구. 애들은 그렇게 여러 곳을 다니고 많이 돌아다녔는데도 본 것도 없고 느낀 것도 없는지, 도대체 요즘 애들한테는 어떻게 해야 역사나 자연이라는 걸 느끼게 하는 거냐구.ꡓ 긴 시외전와 끝에 선배언니는 흥분하고 말았다.
내가 글쓰기를 지도하고 있는 아이들도 사정은 비슷하다. 추석이나 설 명절이 지나고 며칠 뒤 추석 쇠러(설 쇠러) 어디를 다녀왔냐고 하면ꡐ할머니댁ꡑ,ꡐ큰엄마집ꡑ,‘외갓집ꡑ이라고 대답한다. 그런데 할머니댁이나 큰댁 , 외할머니 댁이 어디냐고 하면 갑자기 우물쭈물 한다.
또, 유난히도 더웠던 지난여름의 일이다. 아이들에게 여름방학동안 있었던 일 가운데 가장 인상에 남는 일을 글로 써보라면 제목이 대부분 ꡐ냇가ꡑ아니면 ꡐ물놀이ꡑ였다. ꡐ냇가ꡑ가 어디냐고 물으면 어딘지는 잘 모른다. 어디를 다녀온 지 모르기 때문에 제목이 그저 ꡐ냇가ꡑ나 ꡐ물놀이ꡑ일 수밖에 없다.
보기글1 냇가(3학년 남)
우리 가족은 이모네 가족과 냇가로 놀러 갔다. 도착해서 엄마가 밥부터 먹자고 했지만 우리는 빨리 물 속에 들어가고 싶어서 밥을 먹기 싫었다. 그래도 밥을 안 먹으면 물놀이를 할 수 없다고 엄마가 말씀하셔서 김밥과 음료수를 먹었다.
우리는 물고기들과 검은 소라를 잡았다. 검은 소라를 잡아 병 속에 넣었더니 기어 올라와서 뚜껑까지 올라왔다. 엄마가 끓여 먹는다고 많이 잡으라고 했다. 검은 소라를 많이 잡고 또 밥을 먹고 텐트에서 잠을 잤다.
집에 올 때는 차가 막혀 지루했다. 너무 지겹고 힘들었다. 나는 글쓰기 선생님이 냇가 어디를 갔다 왔냐고 물어볼 때 어딘지 잘 모르겠다. (1994년 8월 7일)
여기서 ꡐ검은 소라ꡑ라는 것은 알고 보니 ꡐ다슬기ꡑ를 말하는 것이었다. 책에서도 많이 보고 작년, 재작년에도 잡았던 검은 소라가 다슬기라는 것을 이 아이는 알지 못했다. 그 곳에서 또 무엇을 보았냐고 물어 보니 본 것이 없다고 한다. 본 것이 없으니 느낀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부모님들은 위의 선배언니의 경우처럼 아이들이 사철 변하는 자연을 보고 가슴 속에 무언가 느끼기를 기대한다. 한번쯤 하늘도 보고, 나무도 보고, 벼를 베고 난 논에서 가슴 가득 푸근함도 느껴 보기를 진정으로 바란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어른들의 느낌을 막연히 아이들에게 강요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아이들은 어떤 것을 보고 느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어떻게 해야 아이들의 가슴에 와 닿는 좋은 여행이 될까? 다음은 몇 년 전 나와 함께 글쓰기를 하던 아이의 일기이다.
보기글 2 진주성(2학년 남)
옛날 사람들이 육지에서 싸운 진주성에 갔다. 그 쪽에서 열심히 싸운 김시민장군과 재말장군님이 아주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임진왜란 때 싸운 장군과 열심히 싸운 사람은 이순신장군, 김시민장군, 재말장군과 재말장군의 조카와 김천일, 황진, 최경희….. 열심히 싸워 왜적을 무찔렀다.
그런데 진주성이 너무 커 많이 걸어 다리가 아팠지만 우리 조상의 성이 얼마나 멋있는지 확인해 보려고 참고 걸어갔다. 중간쯤 오니 왜적이 오는가 안 오는가 보려고 만든 구멍을 봐 보니 진주가 아주 아름답게 보였다. 성문에 가까이 있는 구멍으로 서쪽을 봐 보니 남강이 맑고 푸르게 바다로 흐르고 있었다.
네 계절이 있는 아름답고 푸르고 금수강산의 경치는 맑고 이렇게 천사처럼 아름다운 대한민국이다. 또 진주성에 있는 촉석루를 볼 때마다 우리나라 중 제일 높고 푸른 백두산이 생각났다. 빨리 통일이 되었으면 하고 생각했다. (1992년 5월2일)
2학년인데도 역사적 사실들을 들어 너무 잘 썼길래 처음에는 혹 꾸며서 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 아이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는 어떻게 하여 ꡐ진주의 남강ꡑ을 바라보며 ꡐ백두산ꡑ과 ꡐ통일ꡑ에 까지 생각이 미쳤는지 알 수가 있었다.
이 아이의 가족은 되도록 주말마다 여러 곳을 다니는 편인데 반드시 가기 전에 할 일이 있다고 한다. 금요일쯤 되면 어디를 갈 것인가 가족끼리 같이 정하고, 갈 곳이 정해지면 지도책을 펴놓고 우리 집에서 출발하여 그 곳에 도착할 때까지의 길목을 살펴본다. 아빠까지 모두 함께 지도책을 들여다보며 목적지에 가려면 어느 어느 곳을 지나고, 그 곳의 역사적 사실과 많이 나는 특산물 따위를 재미있게 공부한다. 또 아이들 스스로 그 곳에서 활동했던 역사적 인물이 나온 위인전을 찾아 읽고 엄마나 아빠께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한다.
처음에 몇 번은 그렇게 해도 여전히 먹는 것과 장난치는 일에만 관심이었는데 어느 주말에 모악산 꼭대기에서, ꡒ엄마, 너무 좋아요. 이 좋은 기분을 글로 썼으면 좋겠어요. 여기서 종이에 뭐 좀 써도 되요?ꡓ 그 아이의 부모님은 얼마나 반가웠을까? 집에 돌아온 아이는 그 때 모악산에서의 생생한 글을 너무나 좋아하더라고 했다. 그 다음부터는 자기 용돈으로 산 작은 공책과 연필이 여행의 필수품이 되었다고 한다. 가는 곳마다 생각날 때마다 몇 자씩이라도 적어두면 집에 돌아와 힘들게 기억하지 않아도 기행문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떠나기 전의 설레임이나 있었던 일을, 돌아와서의 정리까지를 곁들이면 더욱 나무랄 데 없는 기행문이 된다.
며칠만 더 있으면 남쪽의 나뭇잎들도 울긋불긋 아름다운 풍광을 펼칠 것이다. 이 가을에 아이들의 마음을 풍성하게 살찌우는 여행이 된다면 떠나기 전의 작은 수고는 얼마든지 기쁜 마음으로 할 수 있지 않을까? 너는 왜 아무 본 것도 없고 느낀 것도 없냐고 야단치기 전에 그 아이가 스스로 관심을 가지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기행문을 억지로 쓰게 하는 것은 부모님이나 아이나 모두 괴로운 일임에 틀림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