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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3 | [서평]
시간의 상처
정 도 상 / 소설가 (2004-02-03 14:13:22)
나는 21세기으 입구에 서 있다. 불확실하고 낯설기까지한 21세기 앞에서 나는 서성거리고 있으며 고민하고 있다. 세기말의 세계를 보면 첩첩한 안개뿐이다. 이 안개의 정체는 무엇인가? 답답하다. 길을 열어다오! 오늘과 어제를 조용히 들여다 본다면. 분명 좌절은 현실이고 변혁을 요구한 민중들의 가슴속깊은 상처는 치료가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하다. 그러나 이 모든 사실을 현실로 인정한다고 해도, 또한 오늘 당장은 미래에 대한 저망이 암담하다 해도, 좌졸보다 더한 깊이에서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지난 시대에 어떤 자리로부터 처서 걸음을 시작하였는가?'라는 질문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민족의 진로가 가로막히고, 민중의 고통이 가중되는 역사의 좌절과 굴절, 바로 그자리에서 항시 신발끈을 새로 조였다. 그리고 조금씩 조금씩 승리해왔다. 과연 오늘 우리의 좌절은 승리의 작은 꽃봉오리를 꿈꿀 수 없을 만큼 암담한 것이며 '그래도 역사는 전진한다'는 믿음을 포기할 만큼 상처는 깊은 것인가? 지나간 20세는 학살과 고문과 잠행과 투옥과 위선의 시대였지만 이 땅의 민중은 꿋꿋하게 버티었고 견기었다. 죽음으로 항거하면서 미래를 포기하지 않았다. 우리들 생의 목적은 오로지 승리에만 있지 않다. 작년 시월에 나는 '시간의 상처'를 썼다. 계간지 노둣돌 겨울호에 발표가 되었는데 여기서는 새삼스레 줄거리를 늘어 놓고 싶지는 않고 다만 왜 써는 가를 이야기 하고 싶다. 지난 몇 개월동안 내 관심은 '상처'였다. 물론 그전에도 가끔씩 상처를 떠올렸지만 이번처럼 전면적으로 생각을 하진 않았다. 상처는 쓸쓸하다거나 고독하다거나 아프다거나 혹은 슬프다는 감정과는 분명히 다르다. 상처는 인간의 내면에 짙은 음영을 드리운다. 불꽃처럼 타오르는 사랑과 거의 똑같은 힘으로 상처는 사람을 휘어 잡는다. 왜야하면 사라고 ㅏ상처는 동일하게 존재와 관계를 맺고 이기때문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만의 상처를 비밀처럼 간직하고 있다. 나도 마찬가지이다. 내 영혼에 기록되었거나 지금도 끊임 없이 기록되고 있는 상처의 자세한 내용을 말하고 싶진 않다. 다만 상처는 유행가처럼 '등이휠 것 같은' 무게로 나를 짓누르고 있다. 내가 지닌 구체적인 상처는 타인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때문에 나는 상처를 축적하고자 한다. 상처가 많아지면 어떠랴? 상처또한 내 인생이며, 그것이 주는 고통도 내 몫인 것을. 작년 겨울이었다. 아주 황폐한 상태에서 중편소설' 시간의 상처'를 썼다. 하루에도 수십번씩 책상에서 뛰쳐 나가고 싶은 충동이 일었고 때로는 안개속을 질주하다가 그대로 생을 마감하고 싶기도 했다.그러나 견뎠다. 나는 어둡고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깨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시간의 상처'에 그토록 몰두했는 지도 모른다. 정신적으로 황폐한 날들이 계속 되고 있었다. 시간에도 상처가 있는가? 세월도 아니 시간에 말이다. 제목을 '시간의 상처'라 하면 어떨까? 그러나 '시간의 상처'는 감각적으로 깔끔하지가 않다. '시간의 상처'는 나와 함께 동시대를 살고 있는 동갑나기들의 삶의 이야기다. 나는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풋내기들의 순수가 어떻게 변질되어 상처로 변했는지 알고 싶었다. 그들의 상처는 시간이 만들어 낸 것만은 아니다. 상처는 지난 80년대가 만들어 낸 것이다. 그들 20대의 빛나는 시절을 80년대와 함께 했다. 80년대와 청춘을 함꼐 했다느 ㄴ것은 곧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받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80년대의 청춘들은 광주항쟁의 상처를 온몸에 받아들이면서 대학생활ㅇ르 시작했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운동을 하든 않든, 80년대의 학생들은 역사의 상처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그들은고뇌했다. 도서관에서도 술집에서도 자취방에서도 거리에서도 고뇌하고 고뇌했다. 운동을 하지 않아도 늘 더부룩한 죄책감은 가슴 한 켠에 남아 이썼고, 운동을 해도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그들의 혈관속에서 조국과 민족의 민주주의와 통일에 존재하고 있었다. 자유와 평화와 평등을 원하고 노래했다. 아니 그것을 위해서 싸웠다. 때로는 그것때문에 사랑을 포기하기도 했다. 80년대는 삶에 대한 진지한 번민의 시절이었다. 그리하여 세월은 흘렀고 상처는 쌓였다. 그러나 90년대는 다르다. 학생들의 옷차림도 달라졌고 얼굴 표정도 훨씬 밝아 졌다. 학교앞의 술집이나 찻집도 밖고 세련된 내부장식으로 손님을 끄어 들인다. 어둡고 칙칙하고 답답한 것은 질색이다. 소빔ㄴ화도 놀랄만큼, 사회적으로 문의를 밎을 만큼 다양해졌다. 솔직히 퇴폐적이고 향락적이다. 물론 모든 학생들이 그렇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변했다. 빈약한 안주를 놓고 젖가락으로 다투던 할머니집은 문을 닫았고 그자리에 락카페며 커피전문점이며 스물 네 시간을 영업하는 편의점들이 들어섰다. 밤 늦도록 잔디밭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목청껏 노래를 부르는 대신에 노래방을 찾아 삼삼오오 흩어지는 게 요즈음의 풍속이다. 그들에게 있어 상처란 단어 이상의 의미가 아니다. 나는 상처를 강요하진 않는다. 다만 상처를 느끼고 받아들일 뿐이다. 하지만 90년대에 80년대의 상처를 구구절절히 이야기하는 까닭은 무얼까? 내가 진정으로 이야기 하고 싶은것은 희망이다. 지금, 정말하지는 쉬워도 희망을 갖기란 참으로 어렵다. 상처와 희망...... 서로 어울리지 않는 두개의 세계를 어지럽게 교차시키며 새벽마다 창가에 선다. 만일 문학이, 좁게말해서 소설이 흥미와 오락만을 제공하고 더이상 인간에게 감동을 주지 못한다면, 나는 얼마나 무가치한 존재인가? 끔찍하다. 포스트 모더니즘이 유행하는 시대에, 새로운 상품과 존재를 뒤틀리게 하는 왜곡과 비약의 궤변과 탈역사와 냉소주의와 무차별적인 이기주의와 섹스지상주의 세대의 한 복판에 질문을 던지고 싶다. 미학이 아니라 진실에 관한, 유행이 아니라 역사에 관한, 사랑이 아니라 상처에 관한, 승리가 아니라 패배에 관한, 자본이 아니라 인간에 관한 질문이다. 해답을 영원히 구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해답을 미리 구해 놓고 세상을 산다는 건 도통 하겠다느 것과 다를바 없다. 중요한 것은 20세기가 저무는 어느 하루에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다. 이제 곧 20세기는 끝난다. 나는 21세기를 온몸으로 받아들일 작정이다. 그것은 내 몫이자 인생이자 바로 당신 몫의 인생이기도 하다. 비록 역사와 운명이 우리를 계측할 수 없는 곳으로 끌고 간다고 해도 나는 두렵지 않다. 왜냐고 묻지 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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