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11 | [서평]
똠방각하의 고향
소설『똠방각하』
글/최인기 소설가
(2004-02-03 14:13:38)
이제는 문단에서조차 내 이름보다도 똠방 또는 똠방각하로 불리는 형편이 되고 말았지만 1990년도 초, 똠방각하를 MBC-TV에서 방영키로 한 뒤 감독과 극본을 쓰기로 한 작가가 나에게 물어왔다. 불내골이 어디에 있으며 장둑울은 어디인가고. 나는 번연히 물어울 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웃기만 하였다.
불내골은 보수성이 짙은 전통적인 마을이고 장둑울은 변화의 실용성의 취한 개발에 편승한 소비지를 상징하는, 내가 조성하여 탄생시킨 마을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런 이름을 가진 마을이 있을 리 없다. 그러나 감독으로서는 동시녹음까지 한다고 터트려 놓았으니, 드라마에서 두 축을 이루는 불내골과 장둑울을 담지 않고는 드라마를 끌어갈 수 없었던 모양이다.
사실은 드라마화 되기 전에 출판사에서 서점으로 나오기 전에 독자들을 끌을 거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는데 출판사에서 돌아가며 읽기에 바빴다는 말을 출판담당 부장이 전해주었던 것이다. 그 부장도 부안에 가면 불내골과 장둑울이란 마을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때도 웃었는데 내가 태어난 마을 당상리(堂上里)가 불내골이냐고 물으면 그냥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장둑울이 해창(海滄)이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하고, 격포(格浦)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하고, 돈지(頓池)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하고, 염소(鹽所)냐고 하면 그렇다고 대답해 주었다. 그렇게 대답해 줄 수밖에 없었다.
먼저 불내골이 내가 태어나 성장한 당상리냐고 묻는데 그렇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나의 언어를 이 작품에서 쓰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언어란 내가 쓰고 있는 말을 이른다. 말은 억양뿐만이 아니고 전통과 습속이 그 속에 스며 있을 때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말을 하면서 전통이나 습속을 익혀가면서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 옛 속언에, ꡐ한 동네에서도 위아랫뜸의 전통과 습속이 다른 법이다.ꡑ라는 말은 바로 여기에 해당되는 말이다.
사람들이 재미있다고 하는, ‘조기 대가리 서울 갈 일 읍다는디 띄금읍시 웬 서울이당가!ꡑ,ꡐ뜨물 먹고 취허면 아재비도 모른다더니,ꡑꡐ예라이, 오뉴월 쇠똥에 처박을 녀석 같으니라구ꡑ ꡐ지기럴, 망신살이 끼려면 지애비 함자도 안나온다더니ꡑ
이런 말은 당상리에 가면 지금도 지천으로 들을 수 있는 말이다. 그런 언어를 어떻게 수집하고 보전하느냐 하는 점은 작가에게 주어진 성실성의 문제일 것이다. 아무리 좋은 재료가 널려 있어도 관심을 갖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나는 어쩌다가 당상리에 가면 그런 분들한테 막걸리를 사며 이야기를 듣는다. 녹음기를 들고, 버스 배차장에서서 바삐 말을 주고받는 분들의 사투리가 그대로 튀어나오는 말을 녹음하기도 하고, 동네에서 즐거움을 주었던 서울에 사시는 분들을 가끔 초대하여 화토라도 치게 하면, 나무개아저씨며 집안 형님이 되는 김형수씨, 내 국민학교 동창이며 집안일을 보살펴 주었던 채수봉은 하룻밤에도 이야기를 몇 섬씩 털어놓는 것이다. 그것을 메모해 놓았다가 작품에 써먹는 맛도 보통 옹골진 게 아니었다.
이런 말들을 불내골 사람들이 쓰고 있으니 당상리가 불내골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 마을의 상징인 정자나무가 있고 소설의 끝에 선비 도곡실의 서책이 불타는 장면이 있는데 당상리의 어느 한 문화를 대변하고 있음이다.
그러나 나는 불내골이 바로 당상리라고 꼭 고집하지는 않는다. 그런 당상리의 말과 문화를 갖고 있는 마을이 부안군 전체는 물론이고 인근의 평야와 해안을 끼고 있는 마을이 오죽이나 많았는가 말이다.
ꡒ아니, 그거 우리 동네 이야기던디 언제 우리 동네에 다녀왔습뎌?ꡓ
이러고 말을 거는 사람도 많다.
또 장둑울은 각기 해창, 격포, 돈지, 염소 사람들이 보면 자기 마을을 그리고 있는 거라고 내세울 만 했다. 이 마을들이 포구를 끼고 있는 마을이기 때문이다. 계화도 간척지를 막아 지금은 육지가 되고 말았지만 1960년대까지만 해도 포구였던 염소는 장둑울에 알맞은 상징이고 당상리에서 반 마장쯤의 거리에 있어 안성맞춤이다. 다만 이 글이 쓰여진 작품속의 연대가 1980년대 말 쯤으로 본다면 그 점에서는 조금 동떨어진 맛이 있을 것이다.
가장 지리적으로 그럴싸한 곳이 해창이다. 하서면과 변산면의 경계이고, 다리가 걸쳐진 분위기 있는 포구 마을이고, 투기 바람과 연관되는 온천예정지로 일제시부터 온천이 나온다고 전해온 마을이기 때문이다. 온천 예정지로 알려진 곳은 해창에서 조금 산 속으로 들어간 불막동이란 마을이다.
그때 나는 세농민이란 잡지의 편집장으로 있으면서 전국을 무대로 취재를 다니게 되었는데 춘천 만천지구며 경남 고성의 회화지구 등 온천을 개발한다고 하는 곳을 돌아보면서 여러 가지 사례를 불내골과 장둑울에 모아 놓게 되었던 것이다.
내가 글을 쓰고 있을 때는 투기의 조짐을 느꼈지만 그렇게 큰 바람이 불던 때도 아니었다. 그 글은 3년에 걸쳐 쓰게 되었는데 책이 출판되어 나올 무렵은 예측대로 투기왕국이라도 된 듯 열풍이 불어대고 있었다.
그 바람에 부안 사람이나 해창지역을 아는 사람들은 그곳을 장둑울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격포도 그런 분위기에 알맞다. 왕성하게 발전하고 있는 격포의 발전은 작품 속의 불내골과 흡사하다. 또 돈지를 들먹이는데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부안에 가면 먹음직한 음식이 발달되어 있지만 운치를 찾노라면 바닷가에 나가기를 좋아하는데 돈지에 가면 초막집이 있어 전주에서까지 찾아갔던 듯싶었다.
작품 속에서 초가집이란 횟집을 그렸는데 알만한 사람들은 돈지의 초막집으로 떠올려지는 모양이었다.
부안에서 당상리로 염소로 돈지로 해창으로 격포로 조각공원으로 돌아보고 온 감독은 알아차리고, 불내골은 조각공원이 있는 동네 소격 마을을, 장둑울은 해창, 격포, 돈지 외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찍어대었다. 불내골이 전통적인 마을이라면 장둑울은 오늘 이 시대에 개발되느라고 꿈틀대고 있는 어느 포구나 관광지라해도 상관없는 것이다.
불내골과 장둑울이 이럴 진데 똠방은 누구를 모델로 했느냐는 질문은 어색하다. 똠방이라는 별명을 가진 사람이 많게 되었고 그것을 애칭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많은 것 같았다. 의미도 여러 가지가 된다. 덤벙대는 사람, 하수인 노릇하는 사람, 자기가 악인인 것처럼 굴지만 결국은 인간의 본질을 등질 수 없는 사람 등등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