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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3 | [저널초점]
오늘의 유자광을 경계한다
윤 덕 향 / 발행인 (2004-02-03 14:14:38)
4월은 잔인하다고 영국의 시인은 노래했지만 우리네 4월은 잔인한 달만은 아니다. 특히 금년 4월은 30여년만에 문민전부가 들어서고 맞는 첫 번째 봄이라는 점에서 겨울처럼 암 울했던 지난 시간들에서 벗어날 수 있음직도 하다. 하여 한껏 기뻐 이 봄을 노래 함직도 하다. 그럼에도 산들거리는 봄바람과 산과 들을 물들이는 봄꽃들의 화려함이 마음 깊이 느껴지지 않음은 너무나 길어던 지난 시간들의 타성에 기인하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의 지역 의 특성상 아직 문민정치가 봄을 맞았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하는 탓인지 분간할 수가없다. 진심으로 새정부의 출범을 축하하고 신한국건 설이라는 기치를 기꺼이 함께 하고싶다. 그 러면서도 주저하는 것은 그간 숱하게 당해왔던 정치노름에 대한 불신이 채가시지 않은 탓 이거나 지역의 특성상 몸에 밴 냉소주의에 바탕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새정부의 출 범을 입에 바른 소리가 아니라 충심으로 축하한다. 똑같이 되풀이되는 역사는 없지만 다른 한 편으로 역사는 되풀이되는 법이다. 한 나라의 흥망성쇠의 과정을 들쳐보면 그에는 공통된 속성이 자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역사의 효용가치는 바로 과거에서 미래를 점쳐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나라의 역사를 좀 어설프나마 말해보려 한다. 거창하게 우리나라의 역사가 아니라 우리 역사에 있었던 한 인물에 대하여 살펴보려는 것이다. 이 인물의 후손이 되는 분들에게는 죄스러운 일이지만 이는 한 개인이나 그 개인의 가문을 욕뵈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먼저 말해두지 않을 수 없다. 그저 역사에서 우리의 미래를 생각할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하고자 하는 소박한 뜻임을 헤아려 주기 바란다. 잘알려진 바와같이 조선시대에는 서얼의 차별이 있어 서자는 관직에 나가서 높은 벼슬을 사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형편이었다. 전혀 예외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며 그중 조선 세조- 종종연간에 활약한 유자광이 있다. 유자광은 1467년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자원하여 종군하고 세조의 총애를 받아 병조정랑이 되고 이듬해에는 문과에 장원하였다. 그리고 그 해에 예정이 즉위하자 남이(南怡) 등이 모반한다고 무고하여 그 공으로 무령군(武寧君)으로 봉해졌다. 그 뒤 한명회를 모함하기도 하였으며 임사홍등과 현석규를 제거하려다가 실패하 여 동래로 유배되기도 하였다. 그의 진가는 무오사화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일찍이 유자광이 함양에 있으면서 시를지어 현판한 일이 있는데 이를 김종직이 떼어내어 불태워 버린일이 있었다. 유자광이 이를 알고 매우 분하게 여겼으나 당시 김종직이 성종의 총애를 받고 있었으므로 김종직과 교분을 맺었다. 뿐만 아니라 김종직이 죽자 제문을 지어 울면서 김종직을 중국의 왕통과 한유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무오년에는 김종직이 지은조의제 문을 트집잡아 김종직에게 설분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문인들까지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 하게 되었다. 연산군치세중 크게 권세를 떨치던 유자광은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중이 들어서는 반정중에도 반정군에 끼여 다시 공신으로 참여하여 무령부원군(武寧府院君)으로 봉해졌 다. 그의 정치적 운수는 여기까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다음해에는 대간 등의 탄핵으로 유배를 당하고 눈이 멀어져 몇해 더 살다가 죽음에 이르렀다. 조정에서는 그의 장례를 자 손들에게 허락하였으나 아들 중 하나는 여색에 빠져서, 다른 하나는 병을 칭하고 손님들과 술을 마시며 장례를 외면하였다고 한다. 텔레비전 화면에서 식상할 만큼 보아온 바를 여기에서 굳이 들추어낸 까닭을 말하지 않아도 미루어 짐작할 것이다. 줄타기의 명수였던 유자광이 말년에 눈이 멀었다는 것은 권력에 눈이 멀고 재물에 눈이 멀고 명예에 눈이 멀어서 지나온 그의 생에서 육신의 눈까지 멀게되었다는 점에서 당연한 일이다. 또 그의 아들들이 장례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도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없지 않다. 그러나 과학과 의술이 고도로 발달된 지금이야 권력, 재물, 명예, 여색에 눈이 먼 사람이라 하여 육신의 눈이 멀게 되는 사태는 없을 것이다. 아니 그같은 것들과 거리가 있는 일반 사람들이 돈이 없어, 빽이 없어 병원에서 이리저리 옮겨다 니느라 눈이 멀게 되는 세상이다. 돈과 권력만 있다면 병원특실은 제집 안방처럼 이용할 수 있지 않은가 말이다. 당시나 지금이나 불쌍한 것은 보통 사람들이다. 유자광을 공신으로 추대하였다가 이듬해 이를 탄핵한 대간들이 있었다는 것은 그래도 우리 역사의 긍정적인 면이며 우리네 조상들의 기백이 살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다르게 보면 애시당초 그를 공신으로 봉한것이 잘못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뒤늦게나마 이를 고친 것은 역시 잘한 일이다. 이래서 형만한 아우없고 아비만한 자식없다는 말이 있는 지 모르지만 요즘보다 월등 나은 것같다. 얼마전 이 지역 국회의원이 몇몇 분을 지목하여 친일한 전력을 문제삼았다는 기사가 있었다. 조선시대로 치자면 대간중의 누군가가 상소리를 올려 탄핵한 것이 되는 셈이다. 어쨌든 그에 대한 답변은 그분들의 그후 업적이 운운하 는 것이었다고 하는데 이는 지나가던 소가 코를 막고 웃을 일이다. 일제 치하에서 그같은 능력을 쌓지 않은 사람이 그분들의 자리를 차지했더라면 그같은 업적- 구 체적으로 어떤 업적인지는 모르겠으나 -을 남길수 없었다는 것을 어떻게 입증할 수가 있는가 말이다. 그야 말로 기득권의 보호를 위한 견강부회에 다름아닌 말이다. 새정부가 들어서 부정부패 척결, 경계 발전, 사회기강 확립을 취암사에서 언급하고 국민 모두가 함께 신한국건설에 나서자고 하였다. 참으로 좋은 말이다. 그리고 꼭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20세기의 유자광과 같은 인물이 지배계층에 앉아 있은 한 이는 또 하나의 구두선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오렌지족들의 내돈 가지고 내마음대로 쓰는데 무슨 상관이냐는 말에 무슨 낯으로 반박할 수 있는가? 돈으로 대학을 들어오려한 부모들에게 목적이 수단을 합리화시켜줄 수 없다는 말을 어떻게 대놓고 말 할 수 있는가? 새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단골처 럼 내놓는 공직 기강확립이 반만큼 만이라도 이루어졌다면 다시 사회기강을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고 부정부패라는 단어가 우리사회에서 이미 용도폐기 되었을 것이다. 다시 부정부 패, 사회기강 확립, 그리고 윗물맑기 식의 사회정화, 성역없는 처리가 언론매체를 장식한다. 30여년만의 문민정부라니 믿어 봄직도 하지만 지배계층에 제 2의 유자광들이 있는 한 공염 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니 온전히 믿을 수도 없다.이런저런 이유로 공직사회의 기강을 바로 잡는다면서 송사리들을 거둘 일이 아니라 바로 이웃에 유자광이 없는지 살펴볼 일이다. 그 리고 그에 대한 척결이 있을 때 ‘억’소리에 억장이 타버리고 ‘빽’소리에 가슴이 무너져 내린 서민들에게 신한국 건설에 동참하자는 말이 절실하게 와닿고 신바람 나는 신한국을 건설할 수 있을 것이다. 기쁨에 겨워야할 이 봄날, 암울한 기분이 가시지 않은 것은 신기루처럼 멀게만 느껴지는 말의 잔치 탓일게다. 앞날에 대한 시계는 아물거리는 아지랑이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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