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11 | [문화저널]
개인주의와 물신주의의 극복을 위하여
지존파에 대한 사회 철학적 판결
글/김영숙 원광대 철학과 강사
(2004-02-03 14:17:21)
해방 이후 대한민국 수립 이래 최대의 조직적인 살인범죄집단인 지존파의 두목을 제외한 나머지 6명이 후회와 참회의 빛을 보인다고 한다. 우리의 상상과 상식을 완전히 초월해 버린듯한 그들 역시 하나의 인간일 뿐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상식에 이제 우리 모두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이제 인간이라는 유(類)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 그들의 가장 극단적인 반(反)인간적인 행위를 곰곰이 분추해야 할 시점이다.
그들 범죄에 대한 사회 철학적 판결은 과연 어떻게 내려질 수 있을까? 그 책임의 소재는 어디까지 그들의 말대로 사회의 책임이며, 어느 지점이 결코 면죄 받을 수 없는 그들의 죄악이며, 또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어떤 유죄판결을 받아야 하는 것일까?
사회구조적인 측면에서 정의하자면 그들의 범죄는 가장 일차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체제에 돌려져야 마땅하다. 사회주의체제의 실패와 몰락 이후 맑스 이론의 상당부분이 비판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사회의 물신화(物神化)현상에 대한 맑스의 비판은 여전히 유효하다. 근원적으로는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인간이 만들어낸, 인간의 산물에 불과한 화폐가 마치 신(神)과도 같이 인간을 지배하고 인간 위에 군림하게 되는 물신화현상은 모든 것이 돈에 의해 교환되고, 평가되는 자본주의 사회의 어쩔 수 없는 암적인 부분이다.
사회구조적인 측면에서 두 번째로 우리가 주시해야 하는 것은 그들 집단이 호남 지역, 그것도 농촌 출신이라는 점이다. 호남 지역은 파행적으로 독점자본주의를 추진해 온 군사독재정권의 부와 권력의 재분배 정책에서 가장 소외되어온 지역이다. 반(反)인륜적인 패륜행위가 우리 사회에서 가장 약한 고리에서 발생했다는 것은 매우 시사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구조적 모순의 중첩으로 그들의 범죄행위가 면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명약관화하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그들에게 직접 돌을 던지기 전에 한 번 더 반성해보아야 할 것은 바로 우리들 자신이다. 우리들은 돈과 권력, 그리고 지식을 더 많이 갖는 자에게 굴종하고, 나보다 못한 자를 경멸한 적은 없었을까? 우리들은 과연 인간은 모두 나름대로의 존엄성을 갖는 일정한 인격체라는 가장 기본적인 상식을 망각하고, 쉽게 돈과 권력과 지식의 ! 노예가 된 적은 없었는가?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는 바로 이점에서 그 흉악 한 범죄의 싹을 키워준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을 고려한다 할지라도 그들의 죄악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 이 모든 것들이 그들 범죄의 여건을 마련해 주었다 할지라도 그러한 행위를 선택하고 결정한 자는 바로 그들이다. 어쩌면 인간이란 존재의 신비는 사회적 제 상황에 의해 영향 받지 않을 수 없는 사회적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외적 요인에 의해 완전히 좌우되지 않는, 거기에 대처하고 그것을 돌파할 수 있는 내적 힘이 있다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그들의 죄악은 무엇보다 먼저 그 범죄 내용의 반인륜적 극악성에 있지만, 여기에만 제한되지 않고 그들이 자기를 둘러싼 환경을 극복할 자기 자신의 내적 힘을 기르지 않고, 모든 원인을 외부에 돌린 데에 주어진다 하겠다.
돈이나 권력, 또는 지식은 사회 속에서 우리의 삶을 영위하는데 있어서 꼭 필요한 수단들이다. 우리가 한 순간일망정 돈과 권력과 지식의 노예가 되는 것은 그만큼 사회에 있어서 돈과 권력, 그리고 지식의 힘이 막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돈과 권력, 그리고 지식의 노예가 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이 인간으로서의 내적 가치가 돈이나 권력, 또는 지식! 의 가치보다 평가절하 된다는 서글픈 사실을 의미하라 뿐이다. 자기 자신을 다스릴 줄 아는, 즉 self-control할 줄 아는 인간이 바로 성숙한 인간을 의미하는 것처럼 돈이나 권력, 또는 지식을 사회유지나 사회발전을 위해 꼭 필요한 수단으로 활용하면서도 사회 구성원들이 그것들의 노예가 되지 않는 사회가 바로 성숙한 사회이다. 그러면 이제 이러한 사회를 형성해 나가는데 있어서 지침이 될만한 사회 철학적 원리를 정리해 보기로 하자.
미국의 사회윤리학자인 존 롤즈의 사회 정의론에 따르면 사회, 경제적 불평등은 모든 사람에게 공정한 기회균등의 조건하에 배정되어야 하며, 사회의 부에 있어서 최소수혜자에게 이익이 될 경우에만 허용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돈과 권력과 지식을 획득하는 길은 누구에게나 개방된 기회 균등한 것이어야 하며, 공정한 절차에 따른 것이어야 한다. 이 점은 대학의 부정입학에 의해 범죄 동기화 되었다는 지존파 일당의 고백을 상기할 때 특히 주목된다. 또한 사회 경제적 불평등이 사회의 최소수혜자에게 이익이 될 경우에만 허용될 수 있다는 것은 다시 말해 돈이나 권력, 또는 지식의 더 많은 획득은 그것이 사회 전체에 기여할 때에만 그 개인에게 허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 사회에 있어서 돈이나 권력이 자기 자신의 사리사욕만을 위해 축적되고 사용되어왔다는 점을 고려할 때, 따라서 돈 있는 자나 권력 있는 자가 존경보다는 질타의 대상이 되어왔던 점을 상기할 때 깊이 반성해야 할 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와 같이 공정한 게임의 틀을 정하고, 정당한 분배의 원칙을 세우는 것만 가지고는 역시 무언가 미흡하다. 합리주의와 개인주의가 뿌리내린 서구사회에 있어서는 이러한 정의의 원칙이 필요 충분한 조건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세계 어느 민족보다 집단주의적 성향이 강한 우리 민족에게는 충분조건이 도리 수 없는 것 같다. 필자가 보기에 우리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은 서구식의 공평하고 합리적인 원칙의 결여에도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서구 자본주의의 극단적 개인주의와 우리의 전통적인 집단주의와의 갈등의 문제에 위치하는 것 같다. 독일의 어느 도시에서나 볼 수 있듯이 청결하게 잘 다듬어진 맥주 집에서 두서너 명이 담소를 나누는 모습만 갖고는 웬 지 성이 안차는 약간은 떠들썩한 잔칫집의 분위기, 별로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도 기꺼이 불러들여 음식을 나누는 인정 등은 우리 고유의 풍습이요, 미덕이다. 결국 자본주의라는 황금을 낳은 거위의 필연적 분비물인 개인주의와 물신주의를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문제가 되겠는데, 우리에게는 개인주의와 물신주의의 결점을 본능적으로 느끼게 해주는 집단주의적 체험과 고결한 선비정신의 유산이 있다. 개개인이 전체 속에서 자기의 확실한 위치를 점하고, 작으나 크나 다른 사회 구성원으로부터 나름대로의 가치를 인정받는 사회, 자기의 노동이 자기에게 자긍심을 느끼게 해주고, 자기의 노동을 통해 타인의 행복에 기여함으로써 우리 고유의 공동체적 본능을 충족시킬 수 있는 사회가 점차로 형성된다면 우리 민족은 개개인이 전체에 대한 소명감 속에서 신명나게 일할 수 있는 민족이 될 것이다. 이러한 신명나는 사회는 우리 각자의 노동과 일상적 삶 속에서 자그마한 공동체들을 이루어 나가고, 공익을 우선하면서 사익을 동시에 도모하는 제도와 관습 및 규범들을 하나하나 만들어 나가는 것 외에 다른 지름길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들을 이루어낼 수 있기 위해서 우리 개개인은 먼저 자기의 내면 속에서 개인주의와 물신주의를 스스로 다스릴 줄 아는 보다 성숙한 주체가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