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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11 | [특집]
통곡의 바다는 말이 없다 위도 서해 훼리호 참사 그 뒤 1년…
글/김용권 전북일보 사회부 기자 (2004-02-03 14:17:59)
또 북적대는 격포항 국군의 날과 개천절 연휴가 이어진 지난 1일, 부안 격포항은 아침인데도 자가용과 인파로 붐볐다. 엊그제 바람이 몹시 불던 험악한 날씨와는 달리 맑은 가을날이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편한 복장과 부푼 가슴을 안고 배에 올랐다. 자가용, 화물트럭 등 10여대의 차량도 배의 한켠을 가득 매웠다. 10시 20분, 완도 카훼리 5호는 긴 고동 소리를 내며 서서히 항구를 빠져 나갔다. 위도, 위도로 향하는 뱃길이었다. ꡒ요즘은 조금 신경을 써서 운항을 합니다. 매일같이 넘나드는 뱃길이라 눈감고도 헤쳐나갈 수 있지만 그날이 다시 찾아오니 긴장이 되는군요.ꡓ 선장 송주길 씨(51.부안군 위도면)는 위도 사고 1년이 다 돼가는 요즘 작년 일이 문득문득 생각이 나 자기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가곤 한다고 말했다. 송선장은 ꡒ출항 규정이 엄격해져 승객들과 가끔 마찰도 생긴다ꡓ며 ꡒ안전운항을 위하여 스스로 독해지고 있다ꡓ고 덧붙였다. 순식간에 일어났던 참극 파란 하늘에 한얀 물살을 가르기 40여분, 배는 위도에 닿았다. 위도. 전체면적이 14.06km(2)인 조그마한 섬. 8개리 11개 마을로 구성돼 있다. 2백여 척의 어선으로 하는 멸치와 새우 잡이가 주업이다. 한때 연근해 어자원이 고갈돼 생기를 잃었으나, 최근 관광지 개발붐이 일기 시작해 서해의 새로운 명소로 떠오르고 있던 곳이었다. 그러던 1993년 10월10일 일요일 아침. 위도 앞바다엔 바람이 몹시 불었다. 도저히 배를 움직일 수 없는 날씨였다. 그러나 파장금항은 사람들로 북적댔고, 그 운명의 ꡐ서해 훼리호ꡑ는 출항 준비를 서둘렀다. 배를 놓치면 하루를 더 묵어야 하는 이들은 무조건 배에 올랐다. 정원 규정은 아예 쓸모가 없었다. 10시 5분, 파장금항을 떠난 훼리호가 임서부 북서쪽 3km지점을 지나다 심상치 않은 날씨로 운항을 포기하고 회항하려 막 뱃머리를 돌리려는 참이었다. 순간 거센 파도가 뱃머리를 때렸다. 배는 두어 번 기우뚱거리더니 그대로 가라않아 버렸다. 눈 깜짝할 사이였다. 배안은 아비규환이었다. 운 좋게 배에서 튀어 나오거나 빠져 나온 사람들은 1개밖에 펴지지 않은 구명정과 아이스박스 등에 매달려 사투를 벌였다. 다행히 사고는 인근에 낚싯배를 띄웠던 주민 강길홍씨(44)에 의해 목격됐다. 강씨가 이 사실을 알리자 바다에 떠있던 배들은 물론 항구에 정박해 있던 배들도 일제히 사고 지점으로 달려 왔다. 여객선을 삼킨 바다는 여전히 사나왔다. 그러나 5-15톤급 어선 50여척은 생사를 넘나들던 수십여 명을 구해내기에 정신이 없었다. 뒤이어 해경 경비정, 해경 함정, 경찰과 군 헬기 등이 긴급 출동했다. 계속 사체가 인양됐다. 정확한 승선 인원이 파악되지 않은 상태에서 첫날에만 44명의 사망자를 확인했다. 다음날부터 해군 UDT대원 등이 투입돼 인양작업이 본격적으로 벌어졌다. 사체가 부패해 가족들조차 신원을 알아보기 어려워 더욱 곤혹스러웠다. 사고 선박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7일만 인 17일 오전. 그러나 훼리호는 ꡐ차마 사람들에게 내비칠 면목이 없었던지ꡑ 그날 밤 인양선의 쇠줄이 강풍에 끊어지면서 다시 가라앉고 말았다. 다행히 선실 내에 남아있던 사체 67구를 모두 수습한 뒤였다. 배는 27일 다시 끌어 올려져 군산외항으로 옮겨졌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말짱한 모습이었다. 11월2일 위도 진리 앞바다에서 마지막 실종자였던 임봉석씨(70)의 사체가 인양됐다. 이로써 2백92명의 희생자 시신을 1백% 찾아내 기네스북에 오를 만한 기록을 세웠지만, 엄청난 참극과 충격을 숨길 수 없었다. 포크레인 소리는 요란하지만 정말 높은 하늘이었다. 엊그제 제삿날(9월29일)을 앞두고 또 매서운 바람이 불어치를 했던(위도 사람들은 매년 같은 때 바람이 부는 것을 ꡐ치한다ꡑ고 말한다) 통곡의 섬은 말이 없었다. 사람들은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흩어졌다. 밝은 햇살사이로 포크레인 소리가 요란했다. 사고 이후 시작된 위도개발의 현장. 그러나 주민들은 소리만 요란하지 눈에 띄는 것이 없다고 말했다. 기대했던 만큼 각종 사업이 진척되지 않고 있다는 얘기였다. 7월 건조에 들어가기로 한 신형 여객선은 아직 시작조차 하지 못했고, 여객터미널 사업도 공사비 관계로 재검토중이라는 것. 특히 부안군이 내년도 사업비로 중앙에 요구한 1백 65억원은 겨우 35억밖에 반영되지 않아 주민들은 ꡒ정부의 개발위지가 벌써 식어버린 것 아니냐ꡓ며 경계의 눈초리를 보냈다. 사실 사고 이후 대대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위도 개발사업은 지난 88년 10개년 계획으로 이미 세워져 있던 것이다. 그동안 장밋빛 구호에 그쳤던 이 사업은 6억년동안 겨우 16억만 지원돼 터덕이던 상태에서 결국 사고가 나고 만 것이다. 정부는 그 뒤 위도를 종합 개발하겠다고 호들갑을 떨고 있으나, 그것도 ꡐ빛 좋은 개살구ꡑ가 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주민들은 차라리 소득자원 개발에 더 관심을 쏟아달라고 말하고 있다. ꡒ사고 이전엔 낚시꾼들에게 배라도 빌려줘 재미를 보았으나, 지금은 단속 때문에 대부분 포기한 상태입니다.ꡓ 이형식 전 위도사고 대책위운장(58)은 ꡒ하루 빨리 위도가 진정한 삶의 터전으로 새롭게 나기 위해서는 각종 개발 사업이 계획대로 추진되고, 유어업 등 관광객을 상대로 한 소득 증대 방안이 집중 모색되어야 한다ꡓ고 말했다. 위도엔 현재 5백 68가구 1천 6백 78명이 살고 있다. 1년 새 23가구 2백 51명이 정든 고향을 등진 셈이다. 언론의 무책임한 보도로 크게 시달려야 했던 백운두선장 가족도 지난해 12월 찬바람을 맞으며 경기도로 이사했다. 파장금가의 그의 2층집은 지금 굳게 닫혀 있다. 부부가 함께 희생된 오남규씨(당시 66세) 집은 마을 경로당이 됐다. 모두 오늘도 바쁜 생활 그날 졸지에 혈육을 잃은 유족들이나 천행으로 살아난 사람들, 현장 구조작업에 나선 사람들은 오늘도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다. 엄청났던 참사의 충격도 이젠 서서히 잊혀져 가고 있다. ꡒ남들이 저보고 독한 사람이라고 합디다. 남편과 장남까지 잃고서도 이렇게 살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세월이 갈수록 생각이 나 멍하게 서 있기도 합니다ꡓ 정금리이장 홍정표씨(57)는 엊그제 제사에 썼던 그릇들을 가을 햇살에 말리며 또 한번 울음을 삼켰다. 홍씨는 당시 훼리호의 갑판원이었던 남편 장봉환씨(당시57)와 큰아들 세영군(당시 29)을 한꺼번에 잃었다. 여객선 고동소리만 들으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는 홍씨는 가만히 앉아 있으면 자꾸 눈물이 나 종일 밭일을 하거나 개펄에 나가 바지락을 캔다. 당시 44명을 구조한 종국호 선장 이종훈씨(42)도 예전과 같이 고깃배를 손질하느라 여념이 없다. ꡒ정말 그땐 난리였지요. 어찌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생존자들을 하나하나 끌어 올리는 데 정신이 하나도 없었습니다.ꡓ 이씨는 ꡒ다시는 그런 일이 없겠지만, 요즘 운항되는 배가 파도가 없는 연안을 돌던 여객선이라 바람이 약간만 불어도 운항이 중단되는 등 불편이 커 걱정ꡓ이라고 지적했다. 위도 참사는 어처구니없는 인재(人災)였다. 정원을 훨씬 초과한 승선과, 기상을 무시한 운항은 대형사고를 자초한 행위였다. 유족들은 말할 것도 없지만, 생존자들도 그날의 충격으로 한동안 악몽에 시달렸다. 그날 직장 동료 9명과 밤낚시를 갔다가 6명을 한꺼번에 잃은 이문석씨 (32.농협 全北도지회 근무)는 요즘 그때 다친 가슴속이 더욱 쓰려온다. 이씨는 지난 1년 동안 물가엔 한번도 못 가봤다. ꡒ유족들에게 미안했습니다. 한번 찾아보려 해도 마음대로 안 되고… 정말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ꡓ 충남에 사는 이곤씨(49 상업. 연기군 조치원읍)는 그날 사고를 현장서 생생하게 목격하고 사진까지 찍은 사람이다. 이씨는 그날 인근 바다서 낚시를 즐기다 사고소식을 듣고, 긴급히 다가가 물위에 떠있던 사람 2명을 구조했다. 사고 모습이 한동안 머리속서 맴돌았다는 이씨는 그 뒤에도 너댓번 위도를 찾았다. ꡒ그 뒤 배의 입출항 통제가 강화돼 다행입니다. 그러나 요즘 자가용만 몰고 찾아와 격포항 주변과 선상을 북새통으로 만드는 일부 관광객들은 좀 각성해야 할 것입니다.ꡓ ꡒ산 사람이 두 몫을 살아야지요. 다음날에도 위도의 아침은 조용히 밝았다. 어디에서도 그날의 흔적은 쉽게 찾아 볼 수 엇었다. 새벽녘에 벌써 뱃일 나간 사람들과 섬에 남아 있는 사람들 모두 그저 바삐 움직일 뿐. 배를 기다리는 파장금항 한켠에서 어망을 손질하던 한 어부는 담배를 꺼내 물며 이렇게 말을 던졌다. ꡒ산 사람들이 열심히 살아야지요. 돌아가신 분들 몫까지 두 배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날의 상처가 모두 잊혀진 것은 아닙니다. ꡐ힘들지만 이겨 나가고ꡑ 있는 것이지요.ꡓ 10월10일 위도면 진리에서 위도 참사 희생자 위령탑 기공식이 있었다. 1주기를 맞아 사고 해역이 내려다보이는 현지에는 유족, 주민, 공무원 등 3백 50여명이 참석했다. 태풍 세스의 영향으로 날씨마저 잔뜩 찌푸려 그날의 아픔을 더 했다. 행사가 이어지는 동안 유족들은 계속 눈물을 닦아냈다. 이철규 부안군수는 추도사를 통해 ꡒ다시는 이런 참극이 없어야 한다ꡓ며 ꡒ고인들이 못다 이루고 떠나신 뒷일을 서로 힘을 합쳐 이루어 나가자ꡓ고 말했다. 유족들은 완도 카훼리호를 타고 당시 사고 해역에서 차례로 국화꽃을 바다로 던지며 다시 한번 오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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