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3 | [특집]
교보문고 설립백지화의 속사정과
지역서점의 제역할에 대한 기대
윤 희 숙 / 문화저널 기자
(2004-02-03 14:22:32)
1986년 8월 전북지역 서점조합과 영세 서적상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주시 금암동에 위치한 대한교육보험 주식회사 전주사옥 지하에 마련된 매장에서는 교보문고 개점식이 치러졌다. 대한교육보험 본사 회장과 전북도지사 그리고 각급 기관장들이 참여하여 축하 테이프까지 끊은 성대한 개점식이었다. 지하에 뽐나게 배열된 진열대에는 온갖 책들이 가지런하면서도 풍성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개점식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밖에서 농성중이던 서적상들이 매장안으로 들이닥쳤다. 이들은 소화기에 분말을 무차별로 쏘아대고 오물로 사정없이 뿌려댔다. 경찰이 출동하여 사태는 진정되었지만 이일로 결국 교보문고는 영업을 시작하지 못했고 개점계획 자체가 완전히 백지화돼버렸다. 대한교육보험에서는 전국의 모든 사옥을 똑같은 모양으로 짓고 본사에서와 마찬가지로 모든 사옥의 지하는 교보문고를 위한 공간으로 마련되어 있다. 하지만 전주에서의 일처럼 교보문고 의 지방점 개설은 모두 각 지역 서적상들의 강력한 방대에 부딪혀 이루어 내지 못했다. 그래서 교육보험사옥이 있는 각 지역에 고보문고 매장은 마련되어 있지만 실제로 교보문고는 서울에서 밖에 볼 수 없다. 개점식까지 한 전주배장은 진열해 놓았던 책만 수거해 간 채 8년이 지난 지금까지 진열대만 놓여져 있던 그대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상태이다. 아마 다른 지역의 매장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저희 대한교육보험에서 생각하는 교보문고의 운영방침은 영리만을 추구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보험업을 통해서 얻은 기업이윤을 사회에 환원 시키는 문화사업의 하나입니다. 실제로 전주의 영세 서적상들이 자신들의 생존권을 주장하면서 개점을 반대했는데 그들 중 대부분은 학생들의 참고서를 주로 취급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참고서류는 취급하지 않겠다는 약속까지 했는데 우리의 순수한 뜻이 왜곡되어 결국 지방에 교보문고를 세우는 일은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당시 개점을 담당했던 교보문고 홍보과 관계자의 말이다. 교보문고가 단순히 책만을 파는 일반서점들과는 다르게 문화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해내고 있어 다른 서점들과는 뚜렷한 차별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교보문고의 지방개점을 강력하게 반대하는 지방 서적상들의 주장을 외면할 수도 없다. “교보문고가 순수하게 지역문화의 발전만을 위해 설립도는 것이라면 우리들도 굳이 반대할 이유는 없습니다. 하지만 86년 당시 상황이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았지요. 당시 출판문화협회 이민규 회장과 대한교육보험 이도선 회장은 절친했고 서로의 이해가 얽혀있는 사이였습니다. ‘교보’라는 이름으로 전국에 체인을 결성하여 출판계의 유통시장을 장악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습니다. 당시 석유비축자금 5백억원이 유통기금으로 유출될 거라는 소문이 무성했습니다.” 전주 서점연합회 관계자의 지적처럼 만약 재벌이 출판계와 서적계를 장악한다면 영세업자들이 주축을 이루는 우리나라의 출판계와 서적계는 큰 혼란을 겪에 될 것이 뻔하다.
중소 서적상의 입장에서는 대기업들이 서적산업에 진출하는 걸 못마땅한 일로 받아들일 것이고 단단히 경계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서적계 안에 자본이 유입되는 것을 막고 있을 수 만은 없다. 지금 당장만 하더라도 독자들은 하꼬방 같은 소규모서점보다는 편리한 대형서점을 즐겨찾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사시 f전주에서의 교보문고 설립이 백지화된 것을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은 서점들의 주 고객인 대학생들과 지식인들이다.
중.고등학생들은 대부분 참고서등의 학습자료를 구입하기 위해 서점을 찾는다. 그래서 그들은 서점을 이용에 별다른 불편을 느끼지 않느다. 하지만 대학교재와 전문서적, 외서적을 구입해야하는 지방의 대학생들과 일반 고객들은 적지않은 불편을 경험했을 것이다. “분류도 정리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아 마음놓고 책을 고를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주문받은 책 이외의 다른책은 아예 구비해놓지도 않아 참고도서를 구하려면 서울로 직접 가야해요. 서울의 대형서점에 가면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를 만큼 많은 책들이 각 분야별로 가지런하게 정리되어 있어요. 서울에 갈 때마다 느끼는 억울한 생각에 전주에 교보문고가 서지 못한것에 대한 아쉬움을 갖곤 합니다.” 대학원에서 외국문학을 전공하는 한 학생의 말이다. 이처럼 전주를 비롯한 전북지역에는 책을 파는 서점만 있을 뿐 서점문화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대형서점이 지역에 들어서는 것을 반대하는 지방의 중소 서적상들의 속사정이 어떻든지 소비자인 독자들의 입장은 그럼s 속내에서 비롯되기보다는 직접 접하는 서점의 환경에 의해 정리되어질 수밖에 없다. 책에 관한 정보를 많이 제공해 주고 원하는 책은 언제든지 손쉽게 구해볼 수 있는 서점이 독자에게는 좋은 서점인 것이다.
영세업자들은 보호해야한다는 논리만을 가지고 재벌들의 출판, 서적계의 진출을 막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 자본주의 시장에서 중소 서적상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경영하는 서점의 환경을 개선하여 독자들이 굳이 대형서점을 찾지 않아도 될 조건을 만들어 가야할 것이다. 물론 대형서점이 모든 면에서 월등한 편리함을 제공하는 건 사실이지만 고객들을 생각하고 올바른 문화공간으로서의 토양을 일구려고 노력하는 서점에 등을 돌릴 고객은 아마 없을 것이다.
사단법인 전국서점조합연합회 전북지부 전주시 서점조합에서는 지난해 9월 전라북도 도서유통기구 설립 계획안을 내놓았다. 이 계획안에 의하면 도서 유통기구는 도서 전시장을 비롯한 도서 집하, 분류 및 보관창고, 청소년을 위한 문화 예술공간, 교육센터, 무료 도서관, 편의점 등을 고루 갖춘 유통센터를 건설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구를 통해 공동으로 조직을 운용하여 도서 유통상의 불이익을 개선하고 독자들에게 양질의 책을 값싸게 공급하고 필요한 책은 언제든지 찾아볼 수 있고, 지역의 문화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방안들을 모색해 나가고자 한다. 도서유통기구의 설립은 일단 계획만을 놓고 보면 재벌기업이 지방에 서점을 세우는 일이 어려워진 지금의 상황에서 지역 중소 서적상들의 고충도 해결해주고 독자들의 요구도 충족시켜줄 수 있는 방안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출자 예상 금액만해도 50억원에 이르고 있어 결코 만만한 사업이 아님을 알수 있다. 그 뜻은 아주 좋지만 재정구조가 취약한 전주시 서점조합이 이 사업을 어떻게 실현 시켜낼지 그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올 93년은 독서 인구를 늘리고 도서 출판 문화를 육성하기 위해 문화부가 정한 ‘책의 해’이다. 시청각 매체가 발달하고 레저문화가 폭넓게 자리하면서 ‘독서’라는 낱말은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의 귀에 점점 낮설게만 들린다. 가뜩이나 독서풍토를 만들기가 힘들 요즘 발길을 돌리게 하는데 일조하는 것은 아닌지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