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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4 | [한상봉의 시골살이]
잃어버린 모교
김 유 석 / 시인 (2004-02-03 14:27:43)
통학버스가 왔다. 동구밖에 모여 참새처럼 재잘거리던 아이들이 차가 멎자마자 후다닥 뛰어 올라 자리를 잡는다. 운전기사 아저씨는 건성건성 스치는 아이들의 인사를 받으며 햇살같은 얼굴들을 하나하나 확인한다. 몇 안되는 숫자여서 한눈에 들어오지만 개학한지 며칠 되지 않은 터에 아직 낯이 설은 아저씨는 출석부른느 성생님이 되어 거듭 꼽아본다. 오늘도 얼굴 하나가 빈다. 경적을 울리며 마을 안길로 시선을 꿰면 서고티 사는 잠꾸러기 명재가 메리(개이름)를 앞세우고 헐레벌떡 달음박질치고 잇다. 언제나 지각생인 명재가 타면 차는 다음 마을을 향하여 달려간다. 그러나 오늘은 손님 하나가 더 있다. 아침일찍 읍내장 보러 나가는 부안댁아줌마의 가쁜 숨소리가 꽁무니에 매달려 오른 것이다. 새학년이 되면서 타게된 통학버스. 뽀얗게 김서린 차창에 낙설르 하거나 자기자리라고 좌석에 이름자를 끄적거리는 아이들은 마치 소풍이라도 가는 듯한 기분에 들떠 있다. 아직 희노애락에 점염되지 않은 천진스런 아이들은 입때까지 다니던 ‘우리학교’가 그만 문을 닫게 된 일쯤은 아랑곳 없이 아침마다 타는 버스가 마냥 즐겁다. 등교시 간에 볼 수 있게된 만화책이 재미있고 책가방을 둘러 메지 않은않은 어깨는 마구 장난질이라도 치고 시을 만큼 가뿐하다. 마을에 또래가 없이 혼자 입 학한 햇병아리 영미도 엄마대신 언니 오빠들과 어울려 가는 학교가 싫지만은 않은 듯 코묻은 웃음을 연신 소매 끝에 훔쳐낸다. 마을에 통학버스가 다니게 된 것은 인근에 있던 학교가 페교된 까닭에서다. 올 봄으로 개교 스므한돌을 맞이한 이 학교는 여타의 농촌소개 학교들이 그렇듯이 이농의 몸살을 앓다가 그만 명맥이 끊기게 되었다. 해를 꺼듭할수록 신입생들은 줄어들고 몇안되는 상급생마저 농촌을 버리는 부모따라 도시로 하나 둘씩 전학을 가게되자 폐교와 복식학급 운영방안을 놓고 숙고한 끝에 복식수업의 문제점이 크게 부각되어 결국 폐교 조처를 취하게 된 것이다. 복식학급 즉, 한 교사가 한 교실에서 두 학년 이상의 학생을 동시에 맡아 가르치는 경우를 말하는 것으로 한 시간을 학년별로 쪼개어 가르쳐야 하고, 한 학년의 공부를 가르치는 동안 나머지 학년은 자율학습을 하도록 되어있기 때문에 이들 학생들의 학력은 자연히 부진할 수 밖에 없는 문제점을 안게 된다. 또한 2개의 학년을 동시에 지도하는 방법으로 운영되기도 하는데 그 경우 저학년을 기준으로 수업할 수 밖에 없어 다소 지루하고 학력 성취도도 정상적인 학급운영에 비해 훨씬 뒤떨어 지은 것으로 판명 되므로써 거리는 멀지만 정상적인 교육을 받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원래 이 학교는 면소재지에 있는 본교에서 분리되어 나온 분교엿다. 분교 이전 본교는 총 학생수가 3천명을 너는 커다란 학교였다. 당시만 해도 농촌인구가 전 국민의 절반을 훨씬 웃도는 비율을 차지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각 면단위에는 대개 하나의 학교밖에 위치해 이지 않아서, 요즘의 여느 도시 학교들처럼 한 학급의 크기가 60명을 넘어서는 과밀학급으로서 후진국의 교육적 특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을 때였다. 되짚어 보자면 좀 아이러니한 면도 있었는데 마을 가까운 곳에 타교가 위치해 있어도 행정구역상 해당 주소지에 속하지 않으면 입학은 물론 편입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하여 소재지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마을에 사는 아이들은 운동장이 훤히 내다보이는 이웃학교를 두고도 한마장 거리가 넘는 길을 다리절며 오가야 했다. 그러한 아이들은 위하여 분교가 설립되었고, 비록 분교라 해도 오늘의 본교 못지않은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렇게 이십여성상 동안 수백명의 학생들을 배출한 학교가 다시 본교에 통합되기에 이름 과정을 보면 현 우리 농촌의 실상을 아주 잘 알 수 있다. 교육이 백년대계임은 에나 지금이나 다름없다. 요즘 농촌을 떠나는 젊은이들을 붙잡고 까닭을 묻자하면 절반 이상이 자식들의 교육문제를 앞세운다. 우리들의 부모가 우리들을 두고 갈망했던 그 당시도 비슷하긴 했지만 그때에는 분명 단계같은게 있었다. 적어도 우리들의 부모는 고등교육을 받을 때쯤해서 자식들의 대처진학을 원했다. 것도 당신들이 자식을 위한답시고 직접도시로 따라나선게 아니라 하숙을 붙여 유학을 보냈다. 질 좋은 교육뿐아니라 그만한 나이에 홀로서기 까지를 심어주었던 것이다. 거기에 배하면 취학기의 아동을 둔 대다수 요즘 농촌 젊은이들의 사고 방식은 전혀 다른 양상이다. 그들은 무조건 도시 학교를 선호하는 경향이 짙고 그를 위해서는 부득불 농촌을 떠야 한다는 타성에 젖어 있다. 물론 앞서 얘기한 일부 농촌학교의 실상을 고집한다면 새삼 변명할 말은 없다. 허지만 농촌학교라고해서 꼭이 교육의 질이 떨어진다는 선입견이라면 내가 보고 들은 사실들ㅇ르 거짓없이 들려주고 싶다. 년전에 나는 아들의 교육현장을 우연히 참관한 적이 있었다. 전교생이 겨우 백여명의 웃도는 분교, 열여섯의 아이들이 얼굴을 마주 보고 앉아 공부하는 삼학년 교실, 산수시간이었따. 중년의 여선생이 칠판에다 학생수만큼 문제를 적어 놓고 한사람씩 나와 풀수 있도록 한다. 다풀면 틀렸다고 생각하는 아이들에게 다시 나와 고치도록 한다. 그리곤 아이들로 하여금 서로의 답이 맞는 가를 확인하게 한다. 틀린 아이들에겐 좀 더 쉬워보이는 문제를 다시 내어 풀게함으로써 꺼려하는 산수 과목에 흥미를 갖도록 유도한다. 재미있는 위인 이야기를 덧붙여가며 말이다. 그런 수업광경을 지켜보며 나는 영상매체를통해 눈동냥한 어느 선진국 교육장면을 떠 올렸다. 가르치는 방법도 방법이지만 교실의 분위기가 더욱 그러했다. 교실이 모자라 2부제 수업까지 한다는 도심학교에 비해 불과 열여섯명의 아이들이 개인지도 받듯 모여 앉은 교실 절반은 햇살이 고여 한층 맑았다. 비싼 돈을 들이고도 받기 어렵다는 개인지도가 이곳에서는 자연스럽고 평등하게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또한 이 학교를 졸업하고 평등하게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또한 이 학교를 졸업하고 시내에 잇는 중학교에 진학한 대다수 학생들의 성적이 상위권에 속한다는 낭보가 계속해서 들려온다. 실제로 이웃집 아이는 전교수석을 차지하여 그의 부모로터 종종 술대접을 받기도 한다. 구태여 지적하자면 도시아이들에 비해 컴퓨터나 미술학원, 피아노 학원을 선택할 여지가 좁다는 것이다. 경제적인 여유에서도 그러하고 지리적 여건도 탐탁지 않음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들이 뱅루 수 없는 것들을 농촌아이들은 온몸으로 터득한다. 논밭에서 일하는 부모들의 땀을 배우며 올챙이가 개구리고 되는 모습, 피는 꽃, 열매등등 수많은 자연을 직접 관찰함으로서 우리가 곧잘 얘기하는 전인교육을 자연스레 습득하는 것이다. 이제 나는 농촌학교에서 근무하는 교사들의 정신자세나 사기저하를 운운하는 일부의 목소리가 기우임을 자신잇게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더늦기 전에 대처로 나오라는 도시 친구들의 부추김 앞에 아이들이 얼굴을 올려 놓지 않겠다. 다만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가 오래도록 페교되지 않기를 소망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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