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1993.4 | [문화칼럼]
동학농민혁명 백주년과 김창석
박 영 학 / 원광대 교수. 언론학(2004-02-03 14:33:22)
전주에서 모악산행 첫 도보 출발점은 완주군 구이중학교앞이다. 바로 이 중학교 건너편에 농협창고가 서 있고 그 농협창고 앞마당에 무심한 돌비석 하나가 기운 어깨를 추수릴 생각도 못낸 채 그냥 그렇게 서있다. 그저 그렇고 그런 비석이려니 싶어 무신결에 들여다본 비문은 균전사김창석(均田使金昌錫)의 선정을 칭송하고 있었다. 균전사 김창석! 그는 누구인가? 황현(黃玹)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 따르면, 원래 전주 출신인 그는 세당조장지만석(世當租莊至萬石) 즉 만석지기 거부라고 한다. 그는 고동연간의 극심한 호남지방 가뭄피해를 조정이 구호하기 위해 국세를 반감조처했을 때 그것을 역이용하여 균전사 부조(賻租)명목의 소작료를 부과하여 그것을 착복한 위인이다. 균전사는 가뭄 피해를 당한 전지(田地)를 복구하기 위해 설치된 특별관리직이다. 기록에 따르면 1800년대의 가뭄은 매우 혹심하였다. 고종 25년(1888년)의 가뭄은 무논의 개구리가 말라죽을 정도였다고 한다. 농초가 황폐했으므로 국고 수입의 근간인 호남 땅의 복구가 당시 조정의 급선무였다. 그런데 김창석은 농지 복구 주관직책인 균전사가 되기 위해 무려 10만냥의 뇌물을 국은(國恩)이라는 명목으로 왕실에 바쳤다. 그 돈을 받은 '上(고종)은 매우 기뻐하였는데 승지였을 때도 수 차례에 걸쳐 수백냥을 헌상한 인물' 이라고 황현은 그의 저서에 적고 있다. 그런 그가 범한 부정한 수법을 보면, ① 왕실의 위용을 등에 업어 부호들의 땅을 빼앗아 ② 떠돌이 농사꾼(手)을 꼬드겨 ③ 3-5년의 면세작농(免稅作農)을 약속한 후 ④ 결실기에 세금을 강징하여 ⑤ 재결(災結)이라고 허위보고 한후 고스란히 착복하였다는 것이다. 고종실록 갑오 9월 17일조를 보면, 그런 그가 백지징세(白地徵稅)한 착복 내역을 보면 임피에서 1천196石, 부안에서 305石, 옥구에서 75石이었다. 이러한 범행이 갑오개혁운동에 따라 그해 9월에 밝혀진 것이므로 그의 범행은 갑오년 이전에 자행한 것임이 분명하다. 조선조 고종연간의 농민 수탈에 관한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김창석의 비행은 관방전(官房田) 관리책임자인 도장(導掌)이나 여늬 과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경상도나 함경도 또는 평안도에 비해 궁택전(宮宅田), 관택전(官宅田), 양반 권세가의 부재지(不在地)가 월등 많았던 전라도는 그만큼 관리나 아전배의 작폐가 클 수 밖에 없었다. 이들 부재지(不在地)는 세금이 평전세(平田稅)보다 낮았다. 수령과 이서배들이 이점을 역이용하여 협잡질을 폈다. 평전세와 동일하게 징수하여 그 차액을 착복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부재니 위임 경작권을 행사하여 부당이익을 취한 셈인데 수령들은 이런 경작권을 따내기 위해 눈에 쌍심지를 켜고 로비 활동에 열을 올렸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경작에 임해야하는 농민들은 강제로 그 땅을 가꾸어야 하므로 달가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경작에 임해야하는 농민들은 강제로 그 땅을 가꾸어야 하므로 달가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뼈가 으스러지는 신역을 감당하고도 남은 것은 수탈과 굴종 뿐이였으니 말이다. 이런 조선조말의 어지러운 부패의 와중에서 거금의 백지징세(白地徵稅)를 자행한 김창석의 행적이 오늘 농협창고 앞에 선정불망비(善政不忘裨)로 탈바꿈되어 서 있다. 물론 한 인간의 전 생에가 전적으로 부정과 악행으로 일관되었으리라는 확신은 서지 않는다. 지난 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어느시기에 착한 일을 쌓았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김창석의 그 뒤 행적은 기록을 접할 수 없어 알길이 없다. 다만 그가 갑오년(1894년) 이전의 부정 부패 공무원이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런 사실이 호도된 채 오늘까지 선정비로 미화되고 있다. 1백년이 채 못되는 역사의 뒤안에도 이렇듯 허상은 실상을 찍어 눌러 거짓 증언의 몸짓으로 서 있음을 본다. 1894년 동학혁명운동이 들불처럼 호남땅에 번지지 않았던들 김창석의 부정은 영원히 망각의 늪 속에 수장된채 더욱 '당당한 기념비'로 미화됐을 것이다. 그의 부정한 탐욕의 농간에 뼈마디가 녹아나는 고된 노동을 감내했을 당시 농민의 곤고한 삻을 되새겨 본다.어찌 그런 그들이 갑오년의 들불을 그냥 좌시만 할 수 있었겠는가. 내년이면 그렇게 억눌려 핍박받던 갑오년의 농민들이 이름도 없이 전라도 들녘의 어디에서 또는 산골에서 죽어간지 1백년이다. 찍혀 죽고, 찔려 죽고, 맞아 죽고, 눌려 죽고, 주리 틀려 죽은 그 한 많은 넋들이 지금도 중음신으로 남녁 산하를 떠돌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그들의 그런 원혼을 달랬던 지난번 '씻김굿'판은 얼마나 값있는 행사인지 모를 일이다. 이제 코 앞으로 다가온 갑오동학농민혁명 1백주년기념의 사업이 그들의 원혼을 바로 씻어 주는 거룩한 자리가 되게 하자. 항상 살아 남은 자들은 죽은 의인들에게 빚이 많은 법이기 때문이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