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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4 | [문화가 정보]
박문기씨의 죄짓지 않는 농사 입암산 아래 사는 사람들
김 연 희 / 문화저널기자 (2004-02-03 14:36:31)
백제기행 가는 날은 오던 비도 그친다는 말이 무색하게 아침부터 봄을 재촉하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일료일 아침. 몇년동안 홀수달에만 다녀온 백제기행을 짝수달로 바꾼 후에 처음으로 가는 기행이다.(때문에 올해는 일곱번의 백제기행을 가게 된다) 근래들어 백제기행은 미리 접수하지 않으면 기행에 참여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여왔다. 이번 기행에도 전화신청자와 문의하는 사람이 많이 있어 차 한대 좌석은 채울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였다. 그러나 아침부터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한 비를 핑계로, 접수했던 사람들 마저 나오지않자 문화저널 식구들은 안타까운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약속을 지키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야속한 마음과 원망에 앞서 비속에 팜여해 준 회원들의 고마움을 생각하며 20여분이 지나서야 서둘러 정읍을 향해 출발할 수 있었다. 여러번 기행에 참여했던 사람은 익숙한 솜씨로 마이크를 잡고 소개했고 처음 참가한 사람은 약간은 긴장된 모습으로 자기 소개를 하며 한가로운 일요일 아침의 전주시내를 벗어나고 있었다. 순창에서 출발한 장교철선생님이 합류하기로 되어 있는 정읍 칠보면 사부소에 도착한 것은 약속시간이 30여분이 지난 시간이었다. 우리일행이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만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은근한 걱정으로 주위를 둘러 보았고, 때마침 공중전화안에서 여기저기 전화 연락을 하고 나오시는 장선생님을 발견하고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정읍의 산외면에 있는 김동수씨 가옥으로 향했다. 아흔아홉간 고가로 알려져 있고 민속자료 제26호로 지정되어 있는 김동수 가옥으로 들어가는 길목은 우리가 탄 대형버스가 들어갈 수 없어 걸어갈 수 밖에 없었다. 아직 봄을 말하긴 이른 때여서인지 봄비라 하더라도 찬 바람은 매우 쌀쌀하게 불어왔다. 고향의 정서가 물씬 풍겨나는 돌담과 '이리 오너라'라고 외쳐댔던 큰 나무대문앞에 서니 당시의 생활에 대한 상상의 날개를 펼칠 수 있었다. 아니, 그런데 이 가옥의 관리인이 교회를 갔다며 대문에는 열쇠만이 채워져 있는 것이 아니다. 한참을 밖에서 서성거리고 있던 우리일행은 이웃집에서 구해온 열쇠를 받아들고 대문이 아닌 쪽문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조선시대 정조 8년인 1784년에 김동수씨의 6대조 김명관이 지은 이 가옥은 실제로 아흔아홉칸짜리 집이어서 알려지기 보다는 조선때의 가옥모양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서 민속자료로서 가치가 크다고 한다. 이 가옥은 궁전형 분산배치법에 따라 행랑채, 사랑채, 안채, 별당채의 4구로 구획되어 있고, 본채는 중앙에 대청이 있고 좌우에 방, 그앞에 부엌이 있는 좌우대칭 ㄷ자형의 건물이 들어서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건물이 진짜 99칸이 되느냐는 질문에 윤덕향선생님은 조심스런 미소를 띄우며 실제로는 99칸이 넘을수도 있고 안될수도 있지만 나랏니맘 ㄴ이 100칸이 넘는 집에서 생활 할 수 있는 그 당시의 법도에 따라 큰 집은 대개 아흔아홉칸 집으로 부른것이라고 설명하신다. 사당, 행랑채 등 이곳저곳을 둘러본 일행은 농부사학자 농초 박문기선생이 사는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농사를 지으며 우리의 역사를 규명하는 소설을 쓰고 있는 박문기 선생은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여간 궁금한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있기나 할까, 많은 사람들이 개인의 집을 찾아가 이야기를 듣는 실례가 되지 않을까 은근히 걱정되었다. 그러나 이런 걱정을 비웃기라도 하듯 넓은 방으로 우리는 안내되었고 반가운 친척이 찾아온 듯 박문기씨는 반갑게 맞아 주었다. 양옥과 한옥 두 채의 집 사이에 넓은 뜰이 눈에 들어왔다. 윗채 한옥은 박문기선생의 어머니 최영단 여사가 기거하고 있다. 문화저널 식구들은 남의 집에 찾아오면서 점심까지 신세질 수는 없었기에 김밥과 도시락을 준비해 왔다. 그러나 ‘사람집에 찾아오는 점심까지 대접 못할까 봐 점심을 싸가지고 오느냐’는 최영단 여사의 호통에 도시락은 차에 두고 내려오는 수밖에 없었다. 방에 들어가자 마자 박문기선생과 인사를 나누는 동안 커다란 상 두 개가 펴지고 음식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집에서 담근 전통 술 한잔과 백김치, 동치미 국물등 시장한 배를 채워주기에 충분한 성찬이었다. 한쪽에서는 오늘 기행이 오히려 조촐한 회원들끼리 오기 잘했다며 우스게 소리를 했다. 식사가 끝나갈 즈음 농초 박문기씨의 말문이 봇물처럼 터지기 시작했다. 이미 세상에 『대동이(大東夷)』나 『맥이(貊耳)』를 발표해 우리의 역사를 새롭게 조명해 가고 있는 그였기에 그의 말은 흥미진지 했다. 우리나라를 가르쳐 동쪽의 오랑캐란 뜻으로 동이(東夷)라고 불러 왔다. 여기서 이(夷)는 오랑캐 이가 아니라 대(大)와 활궁(弓)의 합자이기 때문에 ‘큰 활을 사용하는 민족이’라 읽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이 단어 하나의 사작에서부터 그의 역사인식은 출발한다고 하게TEk. 또한 장사지낸다는 뜻으로 활에 화살을 먹인 형국인 조(弔)를 써왔으나 근래에 와서 중국인들의 죽을 조(早)를 많이 쓰는 것은 엄밀하게 따져 「적」자를 잘못쓰고 있다는 지적이다. 박문기선생은 서양인의 조상인 견융에 대해 흥미있는 이야기를 꺼낸다. 서양인과 개는 닮은 점이 수백가지도 더 된다면서 몇가지를 얘기해 준다. 서양인들은 자식이 어느 정도 클 때까지는 보살펴주지만 그 후에는 돌아보지 않는 매정함이 있는데 개 역시 매몰찬 성질이 강하다고 한다. 음식도 펄펄끓는 뜨거운 것은 먹지 않는점, 동양인들은 따뜻한 바닥에서 잠을 자도 불편을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또한 후각이 제일 발달된 점은 서양인과 개의 대표적 공통점이라고 한다. 신체적으로도 눈동자의 색깔이 노랗거나 파랗고, 살갗에는 오색의 털이 길게 나있으며 아랫입술이 발달하여 핥아먹는 등 많은 점이 개와 비슷하다며 우리 민족과의 차이를 정확히 꼬집어 내신다. 우스게 소리처럼 서양인들과의 차이점을 이야기했지만 그 이면에는 서양의 문화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요즈음의 세태를 더 걱정한다. “그들의 문화에 젖어들다보면 옳고 그름의 분별력까지 잃게 된다.”며 우리민족의 우수성을 알아가는 일보다 외부의 문화에 휩쓸리는 오늘은 현실을 안타까워 하신다. 우리의 음식문화에 대해선 음식은 피를 만들고 피가 사람과 사람의 마음을 형성하기 때문에 계절에 맞지 않는 음식, 조미료나 가공식품등은 우리를 좀 먹게 하는 음식이라고 한다. 그래서 요즈음 제철에 나지 않는 음식을 많이 먹게 되니까 철이 없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조상들이 행했던 태교를 중요치 않게 생각하는 것등은 우리를 부정하는 일이나 마찬가지라고 강조한다. 박문기 선생의 ‘죄짓지 않는 농사’ 이야기가 나왔을땐 더욱 흥미있는 말들이 오고갔다. 복된 땅을 우리대에 와서 농약으로 망쳐가고 있다며 자신이 하고 있는 농사법에 대해 이야기 해주신다. 식무롸도 대화를 하며 식물도 생각하고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 현대에 와서 과학적으로 증명이 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우리의 조상들은 과학이 증명되기도 전부터 농사 지을 때 풍물을 쳐서 땅의 영기를 살리고 병충해의 피해를 이겨왓다. 박문기 선생은 그지혜를 그리고 실천해가고 있다고 한다. 일년에 한번씩은 꼭 농악을 쳐주고, 그렇지 않으면 녹음 테이프라도 틀어주는 정성ㅇ르 들여 다른 땅보다 지력이 튼튼한 땅과 농약없는 밤맛 좋은 쌀을 생산해 낼수 있었다고 한다. 박문기 선생은 좀 더 많은 계획을 가지고 있다. 단지 소설이 아니라 민족사학계로 진출해 우리의 역사를 좀더 체계적으로 정립하고 인식시켜 나갈 것이고 한다. 박문기씨 계획을 끝으로 우리 일행은 훈훈하고 넉넉한 대접에 감사하고 머리속이 꽉 채워지는 듯한 우리의 뜨거운 피를 새삼 실감하며 자리를 일어섰다. 들어올 때 인사를 드렸어야 하는 박문기 선생의 어머니 최영단 여사가 계신 윗채에 인사를 드리러 뜰을 가로 질러갔다. 미리 인사를 드린적이 있는 이동엽 선생님이나 박남준, 이병천 편집위원은 최영단 여사 옆에 앉아 우리 일행에게 덕담한마디를 해주시길 청한다.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 귀를 세우고 있는 모습이 어색하신지 “내가 뭘 알아야 말씀을 드리지요.”하면서 머뭇거리신다. 이분이 5.60년대에 환자와 눈만 마주쳐도 병을 낫게 하는 능력이 있었다니 자세히 바라보게 된다. 그러나 어디 한군데 특별한 분은 아니셨다. 그저 평범하고 온화한 우리의 인자하신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우리는 요즈음 눈이 멀어가고 있어요. 외국의 것이라면 다 좋고 우리의 것이라면 초라하게 느끼는데 그 원인이 있어요. 먹고 살만하고 공부를 많이 햇다고 해서 세상을 간단히 편하게 살아가려고 해요. 우리의 정신고 k마음을 잃고 심지어 부모까지 떼어놓고 살려고 해요. 사람들의 마음속에 인정이 막혀 있으니 그것만 합쳐지면 좋은 세월을 맞을 수 있을 겁니다”라며 내정신 내마음이 내나라에 있어야 이겨낼 수 있으니 근본을 찾아야 한다고 힘주어 말씀하신다. 우리 일행은 다시 한번 고마움의 인사를 드리고 정읍이 발생지인 민족종교 보천교의 본부를 향해 출발했다 차가 출발한 지 얼마안가 트럭 한 대와 좁은 길에서 만났다, 그차에서는 낯익은 얼굴의 사람들이 한 사람 내려왔다. 부안에서 시를 쓰고 있는 박형진씨였다. 기행에 참여하고 싶어 출발장소로 갔으나 늦게 도착해 물어물어 기행팀을 찾아오는 길이라고 한다. 안면이 있는 분들이 반가히 맞아주고 뒷자리에서는 술이 오고가고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민족종교 보천교에 대해 연구해온 안후상씨의 대략적인 설명을 들으며 보천교의 본부로 들어섰다.증산도에 속해 있던 차경석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신앙체계인 보천교는 조선의 전권을 거머쥐기 위해 전단게로써 조선의 식민지 상황을 극복해 내고자 신정부 건설운동을 나타냈고 국권회복운동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보천교운동은 정치적 성향ㅇ르 띤 인물들이 중심이 되었고 1907년 이후부터 차경석이 죽은 후 보천교본소가 해체되는 1936년까지를 보천교의 활동시기라고 규정짓고 있다. 그러나 민족종교에 대한 당시의 탄압과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일제시대의 사회 운동에 있어 친일이냐 반일이냐는 이분법적 시각으로 민족 종교에 대한 연구들이 진행되고 있어 보다 객관적인 평가작업들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한다. 전주로 돌아오는 길에 증산 교본부에 들러 증산교에 대한 대략적인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인식도 함께 해볼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민족 역사에 대한 규명작업을 하는 박문기선생의 삶과 민족종교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민족에 대한 퍽도 많은 이야기를 들은 하루 였다. 봄냄새가 상큰하게 묻어오는 초봄. “오붓한 식구들의 기행이 다른 어떤 기행보다 기억에 남을 것 같다”는 백제기행 첫 커플 김경석씨의 기행소감을 들으며 돌아오는 길은 비가 그친 후의 쾌청한 날씨 만큼 상큼한 기분을 담아 올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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