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4 | [서평]
제국주의 문화의 맹목적 수용
『은식문화의 수수께끼』
(1992, 마빈 헤리스, 한길사)
지 역 사 회 연 구 모 임
지 역 사 회 연 구 모 임
(2004-02-03 14:44:08)
88올림필의 열기가 한창 고조되고 있을 때 하나의 헤프닝. 서울의 사대문안에서 (기대타 대도시를 포함해서)는 개고기를 파매하는 것을 금지한 적이 있었는데 이유는 간단하다. 서양의 사람들이 개고기를 먹는 민족은 올림픽을 개최할 자격이 없으니 올림픽을 보이코트 해야된다고 협박(?)을 하였고, 다른 민족의 말을 잘 듯는 당시의 정부는 그 조건을 받아들여 음식점에서 보신탕을 파는 것을 금지시킨 것이다. 얼마나 잘한 일인가! 또하나의 헤프닝. 동물학대 금지법이 제정이 될 것 같아 이젠 개고기를 마음대로 먹을 수 없게 될 것같다. 이또한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결과물이 아닌가? 정말 잘한일이다.
이책의 저자인 마빈헤리스는 미국의 대표적인 인류학자 중 한사람이다. 그의 저서증에는 『음식문화의 수수께끼 : Cow, pigs, Wars and Witch : The Riddies of Culturer, 한길사』가 이미 소개된바 있고, 음식문화의 수수께끼는 얼마전에 한길사에서 나왔다. 그는 음식문화의 수수께끼를 유물론적 관점에서 풀어가고 있다. 그에 의하면 각 지역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음식문화의 차이는 동물성식품과 식물성식품이 인간의 식생활에서 서로 다른 역할을 한다는 가정에서 출발을 하고 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동물성식품의 섭취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동물성식품은 유용성은 크지만 지역에 따라서 그 양의 차이가 각기 다르게 나타나고 그 양이 부족한 곳에서는 동물성 식품이 상징적인 힘을 갖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이러한 상징적인 힘은 각 지역의 실정에 맞는 음식문화의 특성을 발전시키는 것으로 파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인도의 신성한 소의 경우를 보자. 초기의 인도는 소고기를 먹고 지냈지만 건조하고 토양이 딱딱한 북부인도지방의 경우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소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게 되고 이에 따라 평민들은 소를 보호하려는 욕구가 강하게 표출되어 결국에는 소고기를 먹는 지배층과 마찰을 빚게 되어 지배층은 종교적으로까지 솔르 신성시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도 지역에 있어서 소야 말로 가장 적당한 농기계의 역하과 단백질공급원(우유와 죽었을때의 살코기로써)으로 존재하게 되며 그 결과가 현재와 같은 상황을 만들게 되었다.
유태교와 이슬람교가 종교적으로 돼지고기를 먹는 것을 금하는 이유를 저자는 다음고 k같이 파악하고 있다. 즉 사막에서 돼지를 키우기에는 많은 물과 응달을 인위적으로 만들어야 하며, 이러한 현상은 결국 돼지가 인간과 경쟁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평들은 돼지를 불필요 한 것으로 파악을 하게 되고 이런 고기를 먹는 지배층과 마찰을 빚는 결과를 낳았고, 지배자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종교적으로 - 종교가 인간을 통제하기에 얼마나 편리한다 - 이런 고기를 먹는 것을 금지시키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말고기를 먹지 않는데 영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유럽인들은 말고기를 먹는다. 유럽의 경우 말고기를 먹는 거슨 오랜 역사동안 어떤 시기는 말고기를 먹고 어떤 시기는 말고기를 먹지 않았다. 저자는 그 이유를 말의 유용성에서 찾고 있다. 즉 어떤 시기에는 말이 귀중한 것이되고 어떤 시기에는 말은 그리 귀중한 것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인들에 의해 인간들은 같은 지역안에서도 때로는 말고기를 먹기도 하고 때로는 먹지 않기도 했다는 것이다. 개고기를 왜 먹는가에 대해서 지은이는 폴리네시아 원주민들의 경우를 예로 들면서 폴리네시아에서는 초식동물이 존재하지 않았고 개만이 유일한 가축이었다. 더구나 알곡이 없는 이들에게서 닭고기는 개고기 보다 더욱 희귀한 것이 되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그들은 개고기를 신이주신 음식으로 생각하게 되었으며 개고기를 먹었다는 것은 그만큼 그 지역의 권력과 접촉할 기회가 많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외에도 식인의 이유, 벌레를 먹는 이유, 우유를 못먹는 민족, 소고기를 좋아하는 미국인등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다.
이상으로 책의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았다. 결국 그 지역의 음식이란 그 지역에서 단백질 섭취를 위해 어떤 것을 먹기가 가장 적절한가에 의해 결정된다고 저자는 보고 있다. 우리의 주위에는 보신탕을 먹는다면 마치 못먹을 것을 먹는 사람처럼 징그런 눈초리로 사람을 쳐다보는 사람이 있다. 그사람은 정말로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이란 것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그 사람의 사고 속에는 서양의 개와 동양의 개의 개념을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다. 서양의 개야 처음부터 관상용과 사냥용으로 키워져 왔지만 동양의 개야 처음부터 식용의 개념으로 키워져 왔다. 우리는 진돗개를 보신탕용으로 키우지 않는다. 보신탕용은 소위 말하는 똥개일 뿐이다. 그런데 그런 똥개마져 관상용의 개로 치부해 버린다면, 그건 서양인이 우리를 바라보는 것과 하등의 차이가 없다. 그건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서양의 사고를 우리가 하고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개고기를 먹든 먹지 않든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제국주의 문화의 사고를 아무런 의식없이 그대로 사용하고 있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이런식의 사고는 단순히 개고기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요즘의 우르과이 라운드에도 그러하고, 영화도 그러하다. 다시한번 생각해보자. “우리는 우리의 사고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문화를 생각하고 이쓴 것은 아닌가”하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