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1994.4 | [문화저널]
도시-거름틀의 문화
김 태 경 / 경인 여자 전문대 교수 (2004-02-03 14:52:49)
엠비씨 텔레비젼 「아들과 딸」에서 귀남이 아버지의 「홍도야 울지마라」는 반드시 촌 주막 집에서나 어울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촌 주막이든 도시의 까페든 가슴조이며 쫓기 듯 살고 싶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사람이면 으레 그래지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도시 사람들한테는 그 분위기가 쉽지 않다. 그러지 못해서가 아니라 무언가에 스스로 잔뜩 포장되어 원래 사람 사는 모습이나 그 다양성일랑은 아예 접어두고 사는데 익숙해졌으며, 자신의 모습은 어디론가 숨어버린 그런 구조 속에 살고있기 때문이다. 회색중의 회색도시 서울은 세계에서도 몇 번째 안가는 나쁜 공기를 가졌다고 한다. 그 히끄므래한 태양 빛 속의 도시를 사람들은 편하게 이용하고 좋아해 하면서도 뒤로는 싫어한다. 도시라는 틀 속에 끼어 스스로의 모습을 찾지 못해 공허해 할 때가 있다. 저 나쁜 공기를 마시며 우리가 살아야겠느냐고 물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기서 살고 싶지 않다고 대답은 하면서도 살고 있고 공기가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스스로 마시고, 그러면서 불평은 불평대로 하고... 왜 그런가? 때지고 보면 얼른 이해가 가지 않을 일이나, 도시가 좋으면서도 싫기 때문이다. 사람이 여럿이 모여 살고 또 편리하니까 아무렇지 않게 여기고 편하게 사용하니까 그렇지 기실 따지고 보면 사람의 삶이 얼마나 다급하면 땅속까지 커다란 굴을 뚫어 다녀야만 하는가? 곰곰히 생각해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고, 뭔가 뒤틀려도 한참 뒤틀렸다. 도시를 생각하면 본디 편리한 것이어서 좋은 것이고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잘 생각해보면 - 쉬 포현이 안되는 - 뭔가 뒷맛이 개운치 않은 것이 항상 있다. 바로 이 것이 우리들 도시문화의 진짜 위상은 아닐까? 이런 개운치 않은 뒷맛들이 편리함이라는 사탕에 녹아들어 잊고 지내다가 오랫동안 축적되어 헤어나기 어려운 환경문제라는 또 다른 일거리를 만들어 내게되는 스스로 만든 덫에 스스로 걸리는 격이요, 또한 오늘의 개운치 않은 일을 미리 없애버리는 것이 내일의 후환을 없애는 길이라는 일상의 범사와 다름이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환경문제가 현재 커다란 지구의 문제로 부각된 것이 사실이지만, 결국은 우리들의 개운치 않은 문화에 익숙해진 우리들의 나태한 몸짓에서부터 출발된 작은 것임을 우리는 느껴야 한다. D.PEPPER 는 그의 저서 현대환경론을 통하여 문화적 여과라는 말을 쓰고 있다. 이 말에 대한 해석도 구구하겠지만 환경문제와 관련시켜서 보면 인간은 오랜 세월 동안 그들이 나름대로 형성해온 문화에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익숙해져 가기 때문에 원래 자연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시각 자체를 차츰차츰 여과 당하고 스스로 형성해온 문화에 익숙해져 살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여과장치란 바로 인간의 삶 속에서 그들이 스스로 만들어 온 것들이기 때문에 사실은 삶의 과정 자체가 곧 여과장치가 되어 왔던 것이고 그것이 스스로 우리를 포장시켜온 것이다. 그래서 어떤 여과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원래의 모습이 아는 인식된 환경으로서 자연을 볼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인식된 환경의 출발은 어디인가? 바로 인간이 만들어낸 규칙화되고 정형화된 잣대로 불규칙하고 자유분방한 자연의 형태를 측정해 내려는 데서 출발한다. 달리 말하면 이 측정의 순간이 바로 孝子가 말하는 道可道는 非常道요, 名可名은 非常名이 되는 것이다. 인간의 눈으로 발견된 道를 道라 하면 그 순간부터 이는 이미 정형환 된 문화로 굳어져서 인간의 품속에서 놀아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이미 이것은 항상 원래의 모습을 볼 수 있는 常道가 아니요, 마찬가지로 이것이 이런 것이라고 정의해서 이름을 지어 버리면, 그 순간부터 그것은 인간의 원래 눈을 가리우는 여과장치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닌가? 꼭 이런 식의 무위적 발상은 아니더라도, 인간은 그 아득했던 원시시대부터 지금까지 그 편리한 문화에 대한 동경 때문에 쉽게 그들 나름대로 자연을 정형화하는 작업을 하는데 익숙해져 온 것이고 그것이 결집되어 과학이라는 굳건한 잣대를 만들어 오늘날의 문명을 이룩해 온 것이니 여과가 일어나기 전의 시각으로 오늘의 문명이라는 도시를 보면 개운한 것이 어디 하나라도 있겠는가? 꼭 이런 식의 무위적 발상은 아니더라도, 인간은 그 편리한 문화에 대한 동경 때문에 쉽게 그들 나름대로 자연을 정형화하는 작업을 하는데 익숙해져 온 것이고 그것이 결집되어 과학이라는 굳건한 잣대를 만들어 오늘날의 문명을 이룩해 온 것이니 여과가 일어나기 전의 시각으로 오늘의 문명이라는 도시를 보면 개운한 것이 어디 하나라도 있겠는가? 사실 노자가 살 수 있는 정신적 공간을 하나도 없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흔히들 환경문제는 사회전반의 인식변화가 필요하다는 말을 참으로 많이 한다. 그 인식변화가 반드시 필요하긴 한데 가장 시급한 인식의 변화는 우리가 우리 생활 문화 속에서 알게 모르게 형성되어온 여과장치에 대한 인식부터 출발해야 비로소 환경문제가 우리들의 작은 문제임을 알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문제는 이미 우리들의 문화가 무엇이 개운치 않은 문화인가? 를 쉽게 느낄 수 없도록 굳어져 있다는 데에 있고, 우리들 삶의 범사에서 출발된 작은 문제일 수 있는 환경문제가 이제는 큰 문제로, 해결될 수 없는 문제로만 굳어져 간다는 데에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부터라도 거름 틀로(여과장치) 걸러지기 이전의 모습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노자 시대로 돌아가지는 말은 아니다. 다만 지나치게 여과 당한 우리의 모습을 되씹어, 거름 틀이 있는 문화 그것이 바로 환경문제의 주범일 수 있음을 느껴보자는 이야기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다음 사항부터 차차 알기로 한다. 첫째, 가장 맹목적으로 인간에게 여과의 문화를 형성시켜온 것이 경제적 효율의 논리에 있음을 알고, 이것이 그 동안 인간의 모든 살림살이를 지배해왔기 때문에 그 반대로 가장 자연계의 모습을 비교해 봄으로써 우리에게 가리워진 여과장치가 무엇인지를 밝히고, 둘째, 자연계의 에너지흐름 구조와 경제계의 에너지 구조를 (엔트로피) 알아보려 하며 세 번째로 경제학의 정상상태론과 자연계의 개체 수 증가 모형을 비교해 보려 한다. 또한 네 번째로 경제계의 논리와 생태계의 논리의 타협으로 지속 가능한 개발의 가능성에 대해서 알아봄으로써 총 5회분의 이야기 중 이번 이야기는 다만 문제의 제기로 만족하려한다. 결국 인간의 삶의 모습과 자연의 삶이 모습을 경제학과 생태학의 기본개념들을 통하여 비교해 보자는 이야기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적어도 무엇 때문에 우리가 추구해 온 생활 자체가 바로 여과 이 되어버렸는가? 에 대한 모습은 밝혀줄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안방과 화장실이 같이 붙어 있어서 잠자고 똥을 누는데 편리하고 좋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거기서 개운치 않은 그 무엇인가를 느껴야 하는 것이 당연하게 생각되어야 한다면 우리들의 지나친 독단일까? 독단이어도 좋고 이 시대 분위기에 맞지 않는 말이라도 좋다. 하지만 우리의 도시, 우리의 환경문제를 거기서부터 풀어보자는 이야기는 독단이 절대 아니다. 사실 위생적이어서 깨끗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문제가 없어서 그렇지 돼지우리 앞에서 우리는 그들의 형태와 크게 다를 바가 없음을 느껴야 함이 인지상정이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에잇! 이 길이 편한 길이니까... ’ 하는 그 순간이 바로 자기의 생활에 여과지를 대는 순간인 것이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