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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5 | [문화칼럼]
정의로움과 아름다움의 변증법
유제호/전북대교수.불문학 (2004-02-03 15:06:30)
유난히도 ‘오월’에는, 정의로우면서 아름다운 것을 향해 타오르는 목마름이 있습니다. 현실이 아름다우면서 정의롭고 문학이 정의로우면서 아름다운 세상을 향한 해묵은 소망이 되살아납니다. 형! 1991년 봄,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는 형의 글에 남몰래 휘청거렸습니다. 솔직히 말해, 정의로우면서 아름다운 것의 척도로 여겼던 형의 세계가 돌연 정의로움에 등을 돌렸다고 느꼈습니다. 숱하게 자살을 생각하면서도 끝내 광화문 네거리를 서성이고 말았던 1970년대에는 차라리, 이런저런 도피의 구실이라도 있었습니다. 1980년대 후반, 그토록 왜곡된 상황, 그토록 채색된 현실, 그토록 제도화된 인간들의 숲에 둘러싸인 그들에게 달리 무슨 길이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그들의 분신(焚身)이 과연 ‘걷어치울 굿판’에 불과했겠습니까? 형이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우라’고 한 석이 결코 그들의 분신을 향한 ‘질타’가 아니라, 끝내 살아남은 자들의 시새움 섞인 애틋한 진혼(鎭魂)에 가까웠다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 현실이 문학을 감싸듯이, 문학이 현실을 감쌉니다. 현실에서 아름답게 정의로울 수 있듯이, 문학에서 정의롭게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더욱 분명한 것은, 처절하게 정의로운 것은 저절로 아름답고, 처절하게 아름다운 것은 저절로 정의롭습니다. 정의로움도 아름다움도 사회적으로 제도화되고 역사적으로 채색되고 상황에 따라 왜곡되는 가운데, 현실과 문학이 각기 독립적인 양상 아래 상호 침투합니다. 현실의 특정 상황에서 처절하게 정의로운 것은 문학이 이룩할 수 있는 아름다움을 능가합니다. 우리 시대의 분신(焚身)은 그 어떤 문학 장르로도 성취할 수 없는 처절하게 정의로운 것을 현실에서 보여 주었습니다. 아름다운것, 얼마간 정의로우면서 아름다운 것은 문학의 몫으로 남겨 둔 채 말입니다. 형! “작아지면서 커지자”는 소리가 꼭 형에게서만 아니라 세계 도처에서 움트고 있습니다. 언어공동체에 관련하여 표준말의 이데올로기적 속성이 고발당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언어체계가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 계층, 세대별로 다양한 어법 및 문체의 총화(總和)가 개별 언어체계를 구성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습니다. 문화공동체 또한, 형이 말하는 “생태적 공동체이자 공생공동체인 마을”에서 시작하여, 이질적(異質的)인 것들의 점층적인 결합체로 정의되고 있습니다. 거시사회학을 미시사회학에 종속시키는 관점과 더불어, 형이 말하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인격적 신용 관계에 의한 수평적 네트웍”도 중요시되고 있습니다. 사회체보다 일상체에, 공동문제보다 개인문제에, 사회체제보다 생화세계에, 정치사회보다 시민사회에, 이념문화보다 실제문화에 초점을 두려는 경향들이 자리잡아가고 있습니다. 불변의 진리를 내세우는 철학은 전쟁과 폭력을 유발하기 마련이라는 반성과 더불어 철학의 붕괴가 선언되는가 하면, 철학의 영역이 이제 사회학으로 이관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하고 있습니다. 형이 말하는 “서구적 합리주의 세계와의 결별”과 “생명가치를 기반으로 하는 지역자치제”도 도처에서 거론되고 있습니다. 나아가서는, 개개인의 만남을 단위로 이루어지는 자연발생적 합리성 역량이 강조되기도 합니다. 이같은 주장들에 동의하면서도, 턱없이 공허하고 외로운 소리들이라는 생각 또한 지울 수 없습니다. 밖으로는 맑스가 말한 “구조화된 사회적 총체성”이 우리를 에워싸고 있고, 안으로는 형이 우려하는 “남에게 피해를 줄 정도의 말초적 이기주의”가 도사리고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20여 년 전의 사진이겠지요. 형의 출감을 기념하여 찍은 그 사진에 기라성같은 문인들과 지식인들이 형을 에워싸고 있습니다. 이따금 나는 그 사진에서 어쩔 수 없이 지배와 피지배로 얽혀 있는 인류사의 축도(縮圖), 어쩔 수 없이 제도화된 인간들의 군상(群像)을 보는 듯하여 절망감에 몸서리를 칩니다. 나를 스쳐가고 내가 스쳐왔던 장면들 또한 이같은 틀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3선개헌을 알리는 신문지를 갈기갈기 찢었으나 끝내 공중에 흩 뿌리지는 못했습니다. 유신(유신) 찬반 투표 당시, 끝내 반대표를 찍었지만 중대장이 발악하듯 내지르는 “개새끼!” 소리에는 쌍말을 마주 건네지 못하고 내심으로 끝내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대학교 2학년, “야 씹할 놈아 곱게 강의실에 들어갈래 끌려가서 좇배기좀 칠래” 운운 정강이를 걷어차는 사복을 물끄러미 쳐다만 보다가 끝내 자리를 피하고 말았습니다. 가르치는 학생들 중에 이른바 ‘학원 프락치’가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이 핑계 저 핑계고 끝내 나몰라라 하고 말았습니다. 학생들을 징계하는 자리에서 그게 아니라고 소리쳤지만 내 발언을 회의록에 싣지 않겠다는 학장의 배려에는 끝내 안도감을 느꼈습니다. 학생들이 단신투쟁으로 쓰러져가던 어느 날, 연구실로 걸려온 보안부대 아무개 상병의 위협 전화를 끝내 그토록 정중하게 받았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현실에서 한껏 정의로운 다음에야 비로소 문학을 통해 아름다움을 일굴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름답기는커녕, 한 가닥 정의로움도 가누기 어려웠습니다. 정의로운 아름다움을 찾아 문학에 뛰어들기는 커녕, 현실의 한 언저리에서 엉거주춤 정의롭기도 힘에 겨웠습니다. 형이 말하는 “인격적 삶의 일회성과 중차대성”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각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바로 그같은 자각 때문에, 형이 말하는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비판적 통찰력이 오히려 자리이자(自利利子)의 말초적 이기주의에 압도당하고 만다는 데 있습니다. 갈수록 거대한 조직으로 구조화되는 사회적 총체성 속에서 말입니다. 형의 “생명의 세계관”,“생명의 경제학”을 잘 이해하고 있으며 기꺼이 동의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삶뿐만 아니라 모든 생물, 무생물까지 서로 공생하고 해방하고 통일하는” 그 세계를 실현하는데는, 몇 겁(劫)에 걸치는 정의로움과 아름다움의 변증법과 아울러, 끊이지 않는 혁명이 요구될 것입니다. 형이 말하는 그 세계를 앞당기기 위해서라도, 문학으로 현실을 범람시키거나 철학으로 사회를 재단하려 들어서는 안 되리라 믿습니다. 우리 특유의 현실에서 학생들의 분신은 처절하게 정의로왔습니다. 아름다운 것, 얼마간 정의로우면서 아름다운 것은 문학의 몫으로 남겨준 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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