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5 | [특집]
우리 역사속의 영원한 구심점, ‘80년 오월’
임동확/시인.광주일보 월간예향 기자
(2004-02-03 15:14:02)
대체로 세월은 두 가지 얼굴을 가진 존재다. 단도직입적으로 ‘망각’과 ‘자정능력’이라고나할까. 여하튼 세월은 우리에게 어떤 식으로든 과거의 아픔과 사랑, 슬픔과 기쁨 등 속을 잊게 해준다. 하지만 동시에 그 중에서도 귀하고 소중한 기억만을 현재와 미래의 지상 위에 남겨두기고 한다. 이러한 세월의 양면성을 생가가면서 개인적으로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 1980년 5월의 시간 속으로 되돌아가 본다. 그러나 솔직히 ‘나’는 그 전처럼 아픈 것만은 분명 아니다. 다만 고목나무에 박힌 옹이처럼 바람과 세월의 흔적을 안고 살아가 수밖에 없구나, 홀로 탄식하고 추억 할 뿐이다. 혹은 역사의 망각과 자정능력에 새삼 놀라며 여린 촉수로 오늘, 여기의 삶의 의미를 가늠하고 가끔씩 내일로 향하는 창문쪽으로 시선을 던질뿐인 것이다.
과연 그렇다고 해도 5월은 공소시효가 지난 ‘우리들’의 과거지사에 하나일 뿐일 것인가. 또는 그 얘기를 꺼내는 것 자체가 괜히 거북살스러운, 이제는 잊어도 좋은 역사의 치정인가. 물론 피해 당사자의 경우 과연 아니다, 일 것이다. 반면에 가해자의 경우 될 수 있는 한 묻어 두었으면 하는 심정이 지배적이라 쉽게 짐작되는 일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너무 단순하게 도식화된 나마의 생각인지 모른다. 인간의 존재란 묘한 것이어서 상황에 따라 가변성을 지닌, 천의 얼굴을 가진 존재여서 지금 어떻게 변해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말인즉슨 우리가 지탄에 마지않았던 자들도 충분히 괴로워하면서 당사자보다 더 오래, 어둡고 음습한 세월의 터널을 통과하고 있는 사람이 충분히 있을 수가 있으며, 비록 소수일지라도 그 반대의 경우도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세월의 힘에 동일하게 지배받고 있다는 사실이며, 무엇보다도 아무도 거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소위 화해의 주체가 가해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거친 비유로 어떻게 무자비하게 때린 자가 일방적으로 얻어맞기만 한 자에게, 이 정도의 세월이 지났고 주변의 여론도 그러하니 그만 이쯤에서 끝내자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보낸 13여년의 세월 동안 가장 어처구니 없는 일 가운데 하나도 바로 거기에 있었다. 즉 화해 주체의 뒤바뀜이라고나 할까. 그런 것들이 자꾸 해결의 실마리를 어렵게 했고, 묵은 상처를 더욱 덧나게 했다고 여겨진다. 다시 말해 그럴 자격이 전혀 주어지지 않는, 입에 묻은 피를 지우지도 못한 권력자와 그 하수인들이 감히 이러쿵 저러쿵 입방아를 찧으면서 사태를 더욱 악화시켜 왔던 것이다. 그러나 다시 강조하지만 세월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물론 얼마전까지 수많은 분신과 고문과 폭압, 그리고 감시와 도청, 협박 등을 너무도 빨리 잊게 하는 마취제로 작용하게 하지만 그러한 역사적 난적들을 응징하고 처벌하는 기능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세월의 힘을 무서워하면서도 신뢰한다.
개인적으로 늘 회한과 공포, 슬픔과 자학의 대상이었던 그 날들이 이제 결정적으로 죽지도 지지도 않는 인간의 아름다움에 대한 신뢰감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다소 엉뚱하게 들릴 이야기인지도 모르지만, 나는 사실 처음 무한대의 피해의식만을 느꼈다. 뿐만 아니라 우린 져버렸고, 도저히 저들을 이길 수 없다고 단정했다. 그래서 나는 감히 역사에 대하여, 진리에 대하여 신뢰할 수 없다고 쓰기도 했었다.
그런데 세월이 조금 흐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항할 수 있었던 인간의 아름다움이랄까.
뻔히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불의와 맞서왔던 역사의 힘이 희미하게나마 느껴졌다. 그 순가, 오월에 대한, 아니 역사 속에 무수한 사건들에 대해 품었던 의문들이 조금이나마 풀리는 것을 체험해야 했는데 무엇보다도 역사의 내적 연속성을 확인할 수 있었던게 개인적으로 가장 큰 행운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달리 말해 아무런 연관이 없어 보이던 역사 속의 무수한 사건들의 진정한 힘은 인간의 ‘살아있음’을 끊임없이 확인시켜 주어왔던데 있으며, 동시에 그것으로 하여 이나마의 삶의 체제나마 지속하게 만들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면 80년 오월은 순전히 광주 사람들만의 것인가. 그 중에서도 도청에서 끝가지 싸우다 죽거나 살아남은 자들의 것인가. 한동안 우린 그렇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우선 그들 앞에 우리는 모두 죄인일 수 밖에 없고, 그들의 울부짖음을 외면한 방관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그들의 영웅적 결단과 행동은 딱히 그들의 실존적 선택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일까.
나는 단언 아니다, 라고 믿는 사람 중의 하나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토록 싸울 수 있었던 데는 일차적으로 다수의 말없는 시민이 그들을 지지하지 않고 있었다면 처음부터 불가능한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포위 당하면서 동시에 역포위하는 형국, 그러니까 광주 안팎의 모든 양심인의 내면적지지 없이는 그토록 오래, 치열하게 싸워낼 수 없었다는 판단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최후에 남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하는 역사해석은 달라져야 한다. 그것은 또 다른 의미의 정신주의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5월의 역사적 의미를 고립화하거나 협소화의 가장 큰 원인인 까닭이다. 그래서 필자는 일전에 만난 민중가수 김민기씨가, 나는 당시 김제의 논에서 일하고 있을 때여서 공수부대가 광주로 이동하는 것을 보고도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못하다가 다음 날 전주로 올라가 문정현 신부에게 2만원을 주며 광주로 빨리 떡사서 보내라고 한 적밖에 없다느 고백조차 그 날을 있게 한 원동력이라 믿고 있다. 동시에 설령 공수부대원이었을지라도, 그들이 나중에라도 역사적 진실에 눈뜨기 시작했다면 5월의 무수한 동심원에 기꺼이 포함시켜야 한다고 믿는 편이다.
그렇듯 80년 5월은 우리 역사 속에 무한히 넓어지고 깊어지는 구심점이 되어야 한다. 잠들어 가는 양심을 깨우고, 언제라도 불의와 맞설수 있는 인간 중심주의의 불씨, 그리고 자연과 사람, 무생물과 우주까지도 드높게 화합하고 공생하는 역사적 매개로 거듭 탄생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수많은 우리 역사 속의 소중한 기억들이 소모되고 사장된다는 그러한 자각과 노력이 부족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광주5월’이니 ‘광주 민중항쟁’이니 하는 용어를 극히 꺼려한다. 우선 그 용어 자체가 한정된 지역성을 내포하고 있고, 또한 은근한 배타성과 독점성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80년 5월은 단연 시작에 불과하다. 나찌의 경험이 인류에게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한, 소중한 자산이듯 우리도 그것을 우리의 역사 속에 당당히 편입시켜 나가야 할 책무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필자는 무심한 세월의 ‘자정 능력’이라고 믿는다.
인간은 저항할 수 있을 때 아름답다. 동학농민전쟁 1백주년을 앞둔 시점에서, 나는 80년 5월과의 연속성을 거기에서 찾는다. 5월은 당분간 우리에게 그렇게 이길 수 없었음에도 질 수도 없는 막강권력에 대한 항체로 작용할 것이다.